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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87화 (87/189)

87화

“헉……!”

마치 여러 개의 조명을 켰을 때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아페티트의 그림자가 열 개로 갈라졌다.

아니, 그림자가 맞을까? 열 개의 그림자는 생긴 것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으, 어어……!>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젠장, 내가 왜 여기서! 왜 내가, 왜 나만……!>

<엄마, 엄마아아…….>

메아리치는 절규에 먹혀 불꽃이 타들어 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페티트는 분명 가만히 서 있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은 그림자는 치솟는 불길을 피해 도망치려는데 발이 묶여 달아날 수 없는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끔찍할 만큼 생존만을 갈구하는 그 비명에 사비나는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붉은색으로 가득 찬 풍경을 응시했다. 이번엔 목이 베인 것도 아닌데 손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창고 안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사비나는 이 붉은 빛을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

에르잔이 일으켰던 정화의 황금빛 불꽃과는 전혀 다른, 정말로 모든 것을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붉은 불길이 주위를 에워싼 광경.

‘불……!’

시야에 가득한 빨간 색을 <불>이라고 자각하자, 숨이 턱 막혀 오는 열기가 가득 차며 벽에서 진짜 불길이 치솟았다.

“사비나 아가씨, 조심하십시오!”

벽 쪽에 기대어 있던 나무 사다리가 불에 타 쓰러졌다. 이 창고에는 2층도 없는데 웬 사다리일까. 의문을 품을 시간은 없었다. 에르잔은 자신을 향해 무너져내리는 나무 기둥을 발로 차 반대편으로 쓰러뜨렸다.

기둥이 무너지고 나무판자가 떨어진 너머에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붉은 불길은 열기와 빛으로 그곳의 어둠도 집어삼키려는 듯 다급하게 머리를 처넣었다.

원래부터 이렇게 창고가 컸던가? 기둥이 떨어지고 벽이 무너지면 밖이 보여야 하는데, 무너진 창고의 벽 너머에는 또 다른 창고가 있을 뿐이다.

에르잔은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다. 갑자기 불꽃이 치솟는 것은 예상외였으나, 뒤는 문이었다. 우선 창고를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에르잔은 사비나를 불렀다.

“사비나 아가씨, 우선 옷소매로 코를 가려 연기를 마시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문밖으로…… 사비나 아가씨?”

대답은커녕 기척조차 없는 것이 의아하여 돌아보자, 사비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르잔의 어깨 너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통나무와 흙으로 만든 집이 불타서 무너지고, 살려 달라는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는 곳.

죽음의 저주라는 지독한 악몽에 덧씌워져, 잊고 있었던 장면.

제가 살던 마을이 불에 타고, 군인들이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모습이다.

“사비나 아가씨!”

“아, 으…….”

에르잔의 부름에도 사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에르잔을 보고 있지 않았다. 치솟는 불길과 불에 타 무너지는 천장, 열 개로 갈라져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그림자,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한 욕망의 화신 아페티트.

아페티트는 치솟는 불길이 저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조금도 뜨겁지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욕망하셨지요?”

꼭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페티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욕망하셨지 않습니까?”

평화롭게 살던 제 마을에 들이닥친 괴한들이 두려웠다. 제 어미와 저를 떨어뜨리는 낯선 손길이 싫었다. 처음 타 보는 마차에 갇혀,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지켜봐야만 했던 불타는 풍경을 보며 어린 사비나가 느꼈던 감정. 죽음의 화신이 되어 <죽이고 싶지 않다>, <그저 죽고 싶다>고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이전에 그녀가 강렬하게 열망했던 것.

싫어.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

이 사람들 무서워.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

이대로 우리 마을을 내버려 두란 말이야.

기억에 없는, 혹은 잊고 있었던 어린 소녀의 원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었으나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너져 가는 풍경 속에서도 유유자적하게 다가오는 아페티트의 모습이 꼭 제 목을 옥죄는 올가미처럼 느껴져, 사비나는 호흡을 멈추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쿵쿵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으나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상관없었다. 죽음의 화신인 그녀는 숨을 쉬지 않아도 고통만 느낄 뿐, 죽지는 않으니까.

“죽고 싶지 않다고 욕망하셨지요?”

“나, 나는…….”

“모순된 일이지요.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죽어 버리길 바라면서, 정작 자신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아니에요…….”

사비나의 턱이 덜덜 떨렸다. 아페티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찌를 듯이 빛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었다.

“불로와 불사. 인간이라면 흔히 욕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죽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느껴야 하는 고통도 있는 법.

그렇게 말하면서 아페티트가 고개를 가까이 했다. 입술이 닿을 만큼 밀착한 거리였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인데도, 자신만 가지고 있기를 바라지요. 과연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오는 아페티트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니,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가늘게 흘러내리는 핏방울이다.

“헉……!”

눈앞에서 아페티트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빙긋 웃는 남자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몸이 뒤로 밀려났다. 불길을 뚫고 나타난 에르잔이 사비나의 허리를 안았다.

“사비나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지, 지금, 죽였…….”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아페티트를 죽였어……!”

“예?”

제 호위기사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에 사비나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정작 에르잔의 검이나 옷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을 판단할 겨를은 없었다. 사비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죽이지 마세요…….”

“사비나 아가씨!”

“왜, 왜 죽이는 건데요? 왜……! 왜!”

검은 눈동자가 슬프게 젖어 들더니, 피가 섞인 붉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경악에 물든 에르잔의 표정을 살피기보다 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나 몸은 제 의지와는 달리 움직였다.

마치 수족을 부릴 능력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처럼, 내내 움직이지 않던 팔이 에르잔을 밀쳐 냈다.

“가기 싫어! 날 내버려 둬!”

“사비나 아가씨!”

이젠 입조차도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사비나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야!”

온몸이 부르르 떨려오며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것이 땀인지 피인지, 아니면 다른 액체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어느새 어린애처럼 작아진 제 그림자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에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팔다리가 휘청이더니 몸이 뒤로 넘어갔다.

<엄마. 엄마…….>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림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 줄디즈 정도일까? 하지만 줄디즈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들,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천진하기에 더욱 망설임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잔혹한 말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마치 긴 꼬챙이에 꿰뚫린 것처럼 섬뜩한 감각이 정수리를 관통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사비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페티트의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쓰러지는 것을 지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옥죄는 것 같기도 한 모양으로.

“주, 죽은 게…….”

“제가 죽기를 욕망하셨습니까?”

아페티트가 눈을 가늘게 하며 웃었다.

분명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죽는 것을 보았는데. 환각이었을까?

사비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혀를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가 흘러나왔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부릅뜬 그녀를 보고, 아페티트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당신의 욕망을 마주한 기분은?”

“내가, 이런 걸 바랐다고요……?”

“인간은 때로 자신이 욕망한 것을 부정하기도 하는 법이지요.”

남의 물건을 탐해 제가 훔쳐 놓고 도둑질한 사실이 드러나면 별로 갖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며 변명하고, 너무 갖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상대를 원해 관계를 가져 놓고 정을 통한 사실이 들통나면 그냥 실수였다고 둘러대고, 증오하는 사람을 저주해서 죽여 놓고 정말로 죽으면 사실 정말로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둥.

욕망은 끝을 모르고 인간은 염치를 모른다. 제가 진실이라고 믿고 목숨 걸고 추구하던 것도, 손에 들어오거나 필요 없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볍게 던져 버린다.

과거의 욕망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욕망한다.

“기억은 흐려지고 왜곡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거짓말을 할 때, 과거를 부정하려 할 때, 반박하려면 이쪽도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요.”

“나, 나는 불을 지르지 않았어요.”

“없애 버리고 싶다고 욕망하셨지요.”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았어요. 그 전에는…….”

“죽이고 싶다고 욕망하셨지요.”

마치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 주었는데, 원하는 능력까지 주었는데 무엇이 불만이냐는 듯 아페티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불타 무너지는 창고 안에서, 절규하며 허우적거리는 열 개의 그림자를 달고도 온화하게 웃는 아페티트는 정말로 악마처럼 보였다.

“에, 에르잔. 에르잔은 어디…….”

“가까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욕망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처음 만났을 때, 에르잔이 그런 체질인 걸 몰랐으니까……!”

“네나뷔스테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멀리 꺼져버리길 욕망하셨지요.”

에르잔이 네나뷔스테에게 손대면 그녀가 다치니까. 반대로 에르잔이 다치는 것도 걱정이 되어서.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욕망을 감출 수는 없답니다.”

에르잔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에르잔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에르잔이 몰랐으면 좋겠다. 그녀가 저주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 수 없도록, 위험할 때는 제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

“필요할 때만 곁에 있고, 원치 않을 때는 사라지길 바란다니. 참으로 가증한 욕망이 아닙니까.”

“아니에요, 나는 에르잔에게 자유를 주려는 거라고요……!”

“그럼 왜 놓지 않고 계십니까?”

“뭐라고요?”

“불타 무너지는 창고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탈출해야 하는데, 당신이 그리 붙들고 계시니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저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페티트가 손을 들어 가리키자, 불길이 갈라지며 에르잔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불에 타서 무너진 기둥을 어깨로 받아내며 사비나를 감싸 안았다.

“사비나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네……?”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등에 딱딱한 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에르잔이 제 위에 몸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비나를 향해 무너져 내린 기둥을 에르잔이 몸으로 받아 낸 것이다.

분명 아페티트에게 안겨 있었는데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매캐한 연기가 열기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녀석들이 불을 지른 모양입니다. 우선은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녀석들?

아페티트의 그림자를 말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사비나가 본 아페티트는 진짜가 맞을까? 분명 혼자 있었는데 에르잔은 여럿이라 답했고, 에르잔의 검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 죽었는데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비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안개처럼 사라졌다.

‘환각……? 설마.’

아페티트가 보여 준 환각일까? 아니면 지금 눈앞의 에르잔이 환각일까?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이 마을에 도착한 것부터가 사비나가 만들어 낸 환각이었을까?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눈만 부릅뜬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비나의 뺨을 에르잔의 커다란 손이 감쌌다.

“괜찮습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저는 죽지 않습니다.”

악몽을 꾸던 그녀 곁에서 맹세하던 때와 똑같은 음성으로, 에르잔이 답했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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