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먹먹한 느낌이었다.
시야가 까만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아직 눈을 뜨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 사비나는 알 수 없었다.
“깨어나세요, 나의 반려여.”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어, 사비나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목이 따끔거리며 숨이 막혀 와 얼굴을 찌푸리자, 작게 하아. 하는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축축한 것이 그녀의 목을 핥았다.
“당신의 피라니, 이 아까운 것을.”
“……흣!”
따끔거리는 목에 와 닿는 축축한 것이 혓바닥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비나는 얼른 제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밀쳐 내려 했다.
하지만 밀쳐 내려 해도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헉헉거리며 고개를 내저으려던 사비나의 턱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감촉이 와 닿았다.
“왜요? 무섭습니까?”
“읏…….”
빛이 들어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비나는 제 앞에 허리를 굽히고 목을 핥는 남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
그녀와 똑같은, 저주의 화신이라는 남자.
마을의 서쪽에 감금되어 있는 욕망의 핵, 아페티트.
“아페티트…….”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에, 에르잔을 어떻게 했어요?”
분명 에르잔과 함께 숲길을 걷고 있었는데, 왜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 걸까?
번쩍 정신이 든 사비나가 몸부림치자, 아페티트는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아니, 놓아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는 허리만 굽혀 그녀의 목을 핥고 있었고, 사비나가 움직이지 못했던 것뿐이지만.
“당신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대답해요. 에르잔은? 나와 함께 있던 금발의 기사는…… 어떻게 되었죠?”
“글쎄요? 당신이 바라던 대로 되겠지요.”
“뭐라고요?”
사비나의 기가 찬 질문에 아페티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저는 당신의 반쪽. 당신은 저의 반쪽. 우리 둘이 함께할 때 온전한 하나가 된다면, 제가 곧 당신의 욕망인 것을.”
“나는…… 나는 당신을 원한 적 없어요.”
“욕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죽음을, 이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아 사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페티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만 기울였다.
“당신의 욕망을 이루어 드리고 싶었답니다.”
“나는 아페티트에게 뭔가를 바란 적 없어요.”
“당신의 욕망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저는 이곳에 계속 갇혀 있었던 거죠.”
“나는 당신을 욕망한 적 없어요!”
“그렇습니까?”
아페티트의 목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머리카락인가? 하고 생각한 순간, 실선에서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헉……”
“후후후.”
아페티트가 손끝으로 목 주위를 한 번 문지르자, 목이 베여 피가 흐르던 것이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물었다.
아니, 어쩌면 피가 흐르는 것이 환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마을의 저주는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리고 당신은 반쪽인 저를 두고 떠나셨지요.”
“내가 언제…….”
“당신은 계속, 저를 그리워했을 겁니다.”
욕망.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때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다른 존재의 희생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죠. 사람의 모든 감정은 욕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분노하고, 욕망을 이룰 수 없게 만든 상황을 증오하며,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에 체념하지요. 당신도 그렇지요?”
“아니에요!”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나의 반쪽이 되어 줄 아름다운 화신이여. 당신의 분노가 모든 것을 불에 태우고, 당신의 증오가 모든 생명의 씨앗을 짓밟고, 당신의 체념이 모든 희망을 꺾어 버리는 것을 부정하면 안 된답니다.”
아페티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의 얇은 입술이 맵시 있게 휘어지며 만드는 미소는 흡사 장인이 붓으로 그려 낸 명화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인공적이었다. 지상을 밝히는 태양의 금빛이 아닌, 사람을 홀려 욕망에 눈이 멀게 만드는 황금을 닮은 금빛 눈동자. 오딜의 황금색 눈동자는 맹수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페티트의 눈동자는 맹수의 것도 파충류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살아 있는 무언가의 눈이 아니라고 할까. 혹은 <무엇>이라고 특정 지을 수 없는 존재의 눈이라고 할까.
스스로 악마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아페티트는 정말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그가 앞에 서 있는데 꼭 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귓등이 간지러웠다. 위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래에서 발목을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등에 뭔가 닿은 것 같은데, 그것이 아페티트의 몸인지, 벽인지, 아니면 바닥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부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나의 반려여. 하나가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아…….”
아페티트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미소 짓고 있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며 그 틈에서 붉고 뭉툭한 것이 삐져나왔으나, 몽롱한 상태인 사비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것이 그녀의 뒷덜미를 받치고, 물컹한 덩어리가 옷 너머로 그녀의 몸을 감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페티트와는 달리 그것은 무척 차갑고 또한 축축했다. 젖은 천이 들러붙는 감촉이 오싹해, 사비나는 의식이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저항하려 했다.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로는 어떤 저항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꼭 차가운 물속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고 답답했다. 아니, 질척하게 엉겨 붙는 흙 알갱이의 감촉을 보면 물보다는 늪에 가깝다고 할까.
‘어라. 늪……?’
의식은 멀어지고 귀는 멍멍한데, 그녀의 머릿속에 엉켜 있던 실타래를 작은 바늘이 쿡, 찌른 것처럼 뜨끔한 감각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늪에 빠져 죽어갈 때 하늘에서 구원의 밧줄이 내려온다면, 붙잡을 건가요?>
<예. 붙잡고 매달릴 겁니다.>
결코 큰 목소리가 아닌데도, 이상하리만치 강직한 그 음성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그래야 늪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진흙 연못에 빠져 물이끼가 잔뜩 끼고 녹이 슬어 울리지 않는 종. 그것을 건져 내 진흙과 이끼를 닦아 낸 뒤 방울을 다시 매단다고 해서 다시 종이 울릴 거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에르잔의 단호한 목소리는,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은, 모든 더러움을 정화하는 듯한 맑은 눈동자는 먹구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처럼 아주 당연하게, 마치 원래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한 점 의심이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녹이 슬고 줄이 썩어 문드러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은 나설 자리가 없다.
종루에 매달린 종은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아주 청명한 소리를 내며 깊이 울려 퍼지니까.
“사비나 아가씨!”
하늘에 손이 달려 있다면 밀려오는 파도를 내리쳐서 잠재울 수 있을까. 에르잔이 사비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녀에게 엉겨 붙어 있던 축축한 덩어리들을 눌러 터뜨리듯 떨쳐 냈다.
철퍽, 하고 물에 흠뻑 젖은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얼어 버릴 것처럼 차가웠던 몸을 단단한 팔이 감싸 안았다.
“에르, 잔…….”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느꼈던 차갑고 갑갑한 무언가가, 에르잔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사라졌다>기보다는 <도망쳤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사비나의 몸에 엉겨 붙던 습습하고 묵직한 덩어리들이, 꼭 천적을 피해 달아나는 짐승처럼 후다닥 멀어졌으니까.
“죄송합니다, 아가씨. 녀석들이 워낙 빨리 아가씨를 끌고 간 탓에…….”
“……네?”
“오딜이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군요. 사비나 아가씨, 제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에르잔은 사비나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어느 놈이냐?”
이상한 질문이었다. 서쪽 창고에 갇혀 있는 저주의 핵은 아페티트라고 분명 이야기했는데.
에르잔은 사비나를 문가에 바짝 붙어서게 하고는, 그 장소가 최후의 보루인 것처럼 사방을 매의 눈으로 훑으며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대비하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사비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끌어안고, 그에게 안긴 순간 몽롱해지며 늪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가 딱히 사비나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에르잔? 아페티트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주의를 흐트러뜨리면 공격에 대응이 느릴지 모르니 잠시만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에르잔의 진지한 목소리에 사비나의 의식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뭐냐? 사비나 아가씨를 어쩌려고 했지?”
너희들이라니.
지금 이곳에는 자신과 에르잔, 그리고 맞은편에 서 있는 아페티트뿐인데.
사비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서 아페티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에르잔의 검에도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 듯, 사비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에르잔의 시선은 아페티트가 아닌,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 마치 가까이 있는 것 같기도, 멀리 있는 것 같기도 한 존재를 경계하는 듯한 시선.
“다가오지 마라!”
에르잔이 허공을 향해 위협하듯 검을 휘두르자 뭔가 푸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사라졌다.
무엇이 낸 소리일까? 아페티트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사비나는 설마, 싶은 마음에 다시 에르잔을 불렀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지금은 잠시…….”
“지금 이곳에, 몇 사람이 있나요?”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사비나는 지금 당장 의문을 해소해야 했다.
꼭 미지의 무언가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몸이 떨려 왔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돌아보지 않고, 검을 쥔 손에서도 힘을 빼지 않고, 나직이 대답했다.
“……열두명입니다.”
에르잔이 말을 마친 순간, 창고에 불이 붙은 것처럼 빨간 불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