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사비나와 에르잔이 머무는 오두막에서 서쪽의 교회까지 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둥그런 울타리가 쳐진 광장의 남쪽 길을 따라 카밀라와 카이라트가 머무는 세 채의 집이 늘어선 구역을 지나 교회로 가는 방법.
거리가 멀긴 하지만 길이 넓고 다니기 편하게 다져져 있는 데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밤에도 다니기 쾌적했다.
다른 하나는 연못가를 지나, 바르셀다가 감금되어 있던 동쪽 첨탑을 끼고 북쪽 숲길을 지나는 방법.
단순히 거리만 따진다면 지름길이지만 높은 나무 때문에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밤에는 달빛마저 가리는 탓에 한층 더 어두웠다. 게다가 장애물도 많아 숲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리어 남쪽 길보다 시간이 더 걸릴 정도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공기가 습했다. 바닥에 밟히는 땅의 흙도 마치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처럼 질척했다. 사비나는 후드를 벗고 자신들을 둘러싼 울창한 검은 나무를 둘러보았다.
‘남쪽 길의 저주는 상당히 옅어져 있었는데…… 이곳의 저주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어. 우리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일까?’
사비나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익숙했지만, 에르잔은 길이 좁고 장애물이 많아 위험하다며 자신이 앞서 걸었다.
‘네나뷔스테를 피해 달아날 때도 장애물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에르잔의 뒤를 따라가니까 확실히 편하네. 에르잔은 길을 잘 찾는 능력이 있나 봐.’
사실 에르잔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저 사비나가 잔가지에 피부를 긁히거나 옷자락이 걸려 찢어지는 일이 없도록, 에르잔이 그녀의 눈높이에서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를 꺾어 내고 발에 채는 돌을 옆으로 밀어내며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에르잔의 보폭이 넓고 걸음이 빠른 까닭에 숲길을 다니기 편하게 골라내는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비나는 막연히 체구가 커다란 에르잔이 밀고 나가니 울창한 숲길도 다니기 편해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벅. 저벅. 앞서 걷는 남자를 올려다보자 커다란 등을 감싼 붉은 외투가 보였다. 그 위로는 짧은 금발이, 양옆으로는 형태 좋은 귀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에르잔에게는 이 숲에 깃든 저주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겠지. 사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잰걸음으로 에르잔의 뒤를 따라갔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사비나의 키가 그리 작은 것도 아닌데, 에르잔의 뒤에 서면 마치 커다란 방패 뒤에 숨어서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그녀에게 위협적인 어떤 것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밤에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 까닭에 에르잔은 망토를 걸치지 않았다. 그의 외투가 짧아 뒤따라서 걸어도 옷자락이 스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사비나는 이유도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페티트는 어떤 자입니까?”
“네?”
한창 딴생각을 하던 중에 에르잔이 갑자기 말을 걸어와, 사비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에르잔은 사비나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멈추는 일도 없이 여전히 앞만 보고 길을 고르며 나아갔다. 사비나는 잠시 멈춰 섰다가 황급히 에르잔을 뒤따라가며 대답했다.
“아페티트와는…… 한 번밖에 만나 보질 못해서, 자세히는 몰라요.”
“대략적인 것이라도 좋습니다.”
대략적인 것이라니, 뭘 말하는 걸까.
그의 인상착의를 물어보는 걸까? 서쪽 교회에 감금되어 있는 건 아페티트 하나뿐이니 그를 알아보지 못할 일은 없다.
목소리나 행동을 보면 저주 때문에 괴로워하는 상태도 아니었다.
다만 정신이 약간 이상하다고 할까. 자신을 악마라고 칭하며 사비나를 반려라고 부르는 등,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대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에르잔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그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 아페티트와 입을 맞춘 사실을 에르잔에게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골라내어 감춰 두고 단편적인 정보만 전달할 만큼 사비나는 언변이 좋지 못했다.
그녀가 침묵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에르잔이 다시금 물어 왔다.
“서쪽 교회의 창고 안에 감금되어 있다고 하셨지요. 바르셀다처럼 공격적인 성향입니까?”
“아,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네나뷔스테처럼 무기를 들고 있거나, 뭔가를 담아 둔 관이나 사물함 비슷한 것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무기는 없었어요.”
그랬다. 분명 사비나를 끌어안을 때 아페티트의 양손은 들린 것이 없이 비어 있었다. 몽롱한 와중에 마치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지만, 아페티트가 사비나의 팔을 잡아끌거나 하지는 않았다. 꾹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몸이 멋대로 움직여 아페티트에게 다가갔다고 할까.
하지만 창고 안에 다른 무엇이 있었던가? 사비나는 곰곰이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긴 했는데…….’
창고에 난 작은 창문. 눈이 부실 정도의 햇살이 아페티트의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던 것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커다란 살림살이가 있었다면 비좁거나 거치적거린다는 느낌이라도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럼 아페티트는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 계속 갇혀 있었던 건가?’
저주에 잠식된 이상 먹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으니 아페티트가 15년 동안 서쪽 창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었다면 누군가와 교류한 것도 상당히 오랜만일 것이다. 실제로 아페티트는 사비나를 만나, 굉장히 반가워하는 듯했다.
“창고엔 아마 아무것도 없었을 거예요.”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네. 외벽에는 장미덩굴이 감겨 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도 신기했다. 낡은 교회,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은 창고인데 칙칙하게 썩어 버린 검은 나무벽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붉은 장미가 피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몽롱한 와중에 봤던지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주에 오염된 장미는 아닌 것 같았다. 대체로 저주에 오염되면 생물이든 사물이든 본래의 색채를 잃고 혼탁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바르셀다가 갇혀 있던 동쪽 첨탑도 낡고 먼지가 쌓여 있는 데다가, 벽화 위로 실지렁이 같은 검은 저주가 기어 다녔으니까.
그런데 그 장미는 저주의 핵인 아페티트가 갇혀 있는 창고 벽을 따라 피어나 있었는데도, 어떻게 그런 선명한 빛깔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
사비나는 그 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장미에 뭔가가 있나? 아니면 아페티트의 저주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로스카옌 신부님이 뭔가를 한 걸까?’
로스카옌은 사비나와 에르잔에게 친절했으나, 그들이 원하는 정보는 무엇 하나 알려 주지 않았다. 사비나는 로스카옌을 원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로스카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니, 무엇을 바라는지 사비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을의 저주가 풀리기를 바란다기엔 비협조적이고, 풀리지 않기를 바란다기엔 두 사람에게 친절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로스카옌 신부님이, 네 개의 핵을 지닌 이들에게는 가족이 있다고 그랬는데…….’
바르셀다에게는 나자예프와 또 다른 형이 아나 있고, 네나뷔스테에게는 네 명의 동생이 있었다.
북쪽의 핵은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생존자가 가장 많다고 하니 분명 관련된 인물이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창고에는 아페티트밖에 없었다.
카밀라나 카이라트와 인척 관계인 것 같지도 않았다.
로스카옌 사제는 외부인이니 그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아페티트의 ‘가족’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의 반려가 찾아오기를 계속 기다렸답니다. 바로 당신을요.>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아페티트의 말에 숨이 턱, 막혀와 사비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비나 아가씨?”
이번에는 에르잔도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사비나의 목에 뭔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아가씨! 어디서 긁히신 겁니까? 목에 피가……!”
“네? 피요?”
에르잔의 검에 베였던 상흔은 완전히 사라졌는데, 또 목을 베였나?
사비나가 손끝으로 목 언저리를 문지르자 뭔가 가느다란 것이 걸렸다. 매끈하면서도 탄성이 있는 실 같은 것을 잡아당기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상처가 아니라, 목에 뭔가 실 같은 게 걸린 것 같아요.”
“실……이라고요?”
에르잔은 사비나가 들고 있는 끊어진 실을 건네받고는, 그것을 들고 자세히 보았다.
“사비나 아가씨. 이건 실이 아니라 머리카락입니다.”
“머리카락요?”
이렇게 어두운데도, 피처럼 붉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앗!”
이상하다, 고 여긴 순간 에르잔의 손 안에서 머리카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에 타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에르잔의 손에 정화된 거 아닐까요?”
“그건 저도 잘……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다급하게 소리를 높였다. 왜 그러는 걸까? 고개를 들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에르잔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사비나 아가씨, 목에……!”
사비나의 목에 다시 붉은 선이 덧그려지더니, 이번에는 정말로 주르륵, 빨간 핏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라?’
목에서부터 간질간질한 느낌이 올라오더니, 그것은 이내 따끔거리는 느낌으로 변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서늘하기도 하고, 불에 덴 것처럼 뜨겁기도 한 감각.
이 마을에 오기 전, 사비나가 숱하게 겪어 왔던 그 감각이 지금 자신을 덮치고 있었다.
‘에르잔…….’
에르잔을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에르잔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뭐지? 에르잔이 내 목을 조르는 건가?’
이상하게 갑갑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저항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땀이 차는 건지, 에르잔이 붙잡은 제 목이 뭔가 축축한 것으로 흥건하게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