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내일 아침에 오딜이 찾아오면 더 피하기 힘들어져요. 오늘 밤에 움직이죠.”
“움직인다고요?”
“지금이 아니면, 아페티트를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에르잔이 생존에 대한 감이 뛰어나다면, 사비나는 자신을 향한 적의와 그녀의 행동을 강제하고 간섭하는 낌새를 쉽게 읽어 냈다.
처음 오딜은 사비나를 꺼려 했고 적의에 가까운 경계심을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기색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때는 ‘사비나가 수상하기 때문에’ 비협조적이었다면, 지금은 ‘오딜이 원하는 바와 사비나가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녀를 설득하려 구는 점이라고 할까.
말이나 행동 자체가 아무리 다정하고 무해할지라도 그 안에 숨겨진 의미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반(反)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나긋하고 부드러운 말로 달래듯이 잔인한 명령을 내려왔기 때문에 더욱.
에르잔이 보인 미묘한 태도나 말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바르셀다의 핵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내가 서쪽에, 아페티트를 만나러 가는 걸 막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건, 서쪽이 더 위험한 장소이기 때문에…….”
“오딜에게 도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위험하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죠?”
그랬다. 사비나나 에르잔이 죽거나 말거나, 외부인인 그들의 생사는 기실 오딜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마을에 도움을 주려던 사람이 위험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면 마음이 좋지는 않겠지만, 오딜 자신은 마을의 북쪽에 발을 들이는 것이 껄끄럽다고 하지 않았나.
사비나는 카림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북쪽은 체념한 이들의 공간이기에, 외부인이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네나뷔스테도 말하지 않았나. 오딜을 끌어들이지 말고, 서쪽의 핵을 먼저 흡수하면 사비나를 믿어 보겠다고.
그런 저항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사비나를 북쪽으로 먼저 보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만약 사비나가 서쪽으로 가고자 한다면, 에르잔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것처럼 이번에는 오딜이 막아설 것이다.
그녀의 기원을 가로막고, 소망을 짓밟고, 자유는커녕 안식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잡아끌고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보낸 세월이 15년이다.
오딜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건 분명 사비나가 하려는 것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았다. 형식적이나마 주종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오딜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
오딜이 사비나가 하려는 일에 훼방을 놓기 시작하면 해결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오딜 몰래 서쪽에 다녀오려면 오늘 밤밖에 기회가 없어요.”
“저만…… 데려가시는 겁니까?”
“나 혼자서 다녀온다고 하면 에르잔이 반대할 거잖아요?”
“제가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그건 내가 반대할 거예요.”
“…….”
사비나는 어깨에 대충 두르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던졌다. 어두컴컴한 밤인데도 타올 하나만 걸친 그녀의 하얀 몸이 유달리 선명하게 보여, 에르잔은 급히 몸을 돌렸다.
“에르잔? 왜 그래요?”
“아, 아닙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몸이 식어서 다시 목욕을 하려는 건가요? 서둘려야 하는데.”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에르잔은 사비나로부터 최대한 몸을 돌린 채, 허리에 두른 타월을 부여잡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쩔쩔맸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일까? 사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에르잔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등을 돌렸다.
“에르잔. 왜 나를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 머,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나는 입을 옷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에르잔이 가져다줘야 하는데.”
“그,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십시오! 밖은 추우니까요…….”
“밖이 추우니까 에르잔도 같이 들어가야죠.”
사비나가 에르잔의 팔을 끌어당기자, 이상할 정도로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타월의 끝이 풀리면서 남다른 부피감을 자랑하는 단단한 살덩이가 튀어 올랐다.
“에르잔…….”
사비나는 당황한다기보다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에르잔의 그곳과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사비나가 오딜을 내쫓기 위해 에르잔의 등에 몸을 기댄 순간부터 죽 이렇게 되어 있었다. 아침까지 할 일이 있다는 건 오딜을 쫓아내기 위해 둘러댄 거짓말이었는데, 자신은 바보같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변명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아 에르잔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외출하기 직전 소매의 단추가 떨어진 것을 알아챈 사람처럼 사비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성기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자, 에르잔은 얼른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아가씨! 금방, 금방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만져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에르잔은 극렬히 부정했다. 성에 대해 해박한 것은 아니라도 본능이 무엇을 갈구하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사비나가 만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 에르잔은 타월로 아래를 가리며 사비나의 뒤로 돌아갔다.
“먼저, 먼저 가십시오, 아가씨. 제가 옷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에르잔. 하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차오르는 수치심과 끊어질락 말락 하는 인내심이 뒤섞여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애달플 정도로 떨리는 그 음성에 사비나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 한 발짝 물러났다. 에르잔은 여전히 그녀로부터 비스듬하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밀어내는 것 같은데…….’
사비나는 자신을 거부하는 반응을 알아차리는 데 능숙했다. 카밀라가 울부짖으며 다가오지 말라고 할 때도, 네나뷔스테가 칼로 위협하며 내버려 두라고 할 때도, 오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시선을 피할 때도 그들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헷갈렸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밀어내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모순되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알았어요.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에르잔이 말하는 바와 그로부터 느껴지는 느낌이 상반된다면 겉으로 표현하는 말에 우선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비나는 젖은 타월을 벗어 그것으로 머리를 감싼 후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에르잔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단단하게 곧추선 제 분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 수준까지 떨어지다니…… 나는 이제 나자예프를 나무랄 자격도 없어…….”
에르잔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서 얼굴을 찡그리며 눈가를 짚었다. 나자예프가 들었다면 그 수준이 무슨 의미냐고 되물었다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는 없었던 까닭에 에르잔은 순수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을 삼키고, 눈을 부릅뜬 에르잔은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사비나의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고, 자신도 무장을 해야 한다.
‘아페티트라고 했지. 대체 어떤 남자일까.’
나자예프의 평으로는 자신보다 더한 난봉꾼이라고 하고, 오딜의 평으로는 바르셀다와는 다른 의미로 위험한 자라고 한다.
그리고 에르잔이 모르는 사이에 아페티트와 마주친 사비나는, 오딜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쪽보다 아페티트가 있는 서쪽을 먼저 공략하겠다고 선언했다.
네나뷔스테와의 약속이 있다고는 해도 오딜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에르잔만 데리고 간다는 것을 볼 때, 아페티트는 적어도 바르셀다처럼 위협적인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의미로 위험한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사비나 아가씨가 상처 입는 일이 없도록, 내가 지켜 드려야 해.’
솟구치는 욕망을 굳은 결심으로 잡아 누르고, 에르잔은 서쪽으로 가는 동안 사비나로부터 최대한 아페티트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뭐? 없어?”
“미안하다, 네나뷔스테. 오면서 내가 그만 스튜를 엎질렀지 뭐냐.”
“어쩐지 늦는다고 생각했지……. 됐어. 어차피 얘들도 기다리다 지켜서 잠들었으니까.”
네나뷔스테는 잠든 아이베크와 자니베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줄디즈는 졸다가 깼는지, 꾸벅거리던 고개를 부스스 들고 오딜을 돌아보았다.
“오딜 아저씨……?”
“어이쿠, 줄디즈가 깼구먼.”
아무리 굶어 죽지 않는 몸이라고 한들 어린아이를 굶기면 죄책감이 든다. 오딜은 주머니 속에서 딱딱해진 빵조각을 꺼내어 줄디즈에게 건넸다.
“배고프냐? 딱딱해졌다만 이거라도 먹으면 좀 나을 거야.”
“오딜 아저씨, 이상한 거 먹이지 마.”
“이상한 거라니, 로스카옌이 만든 빵인데. 꽤 달아.”
“줄디즈. 당장 버려!”
로스카옌이 만들었다는 소리에 네나뷔스테가 눈을 부라렸다. 줄디즈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들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제 손바닥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만 핥아 먹고 오딜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왜 그래, 네나뷔스테. 애들 먹을 때만이라도 좀 편하게 놔줘.”
“편할 수가 없잖아. 그 빵에 뭘 넣었을지 어떻게 알고?”
“내가 먹고 남긴 건데?”
“오딜 아저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줄디즈는 아니야.”
“그럼 네가 먹어 보고 판단하면 되겠네.”
오딜이 굳은 빵을 들이밀자, 네나뷔스테는 진저리치며 오딜의 손을 쳐 냈다. 원래도 한 입 거리밖에 되지 않았던 빵조각은 바닥에 떨어져도 소리 하나 나질 않았다.
“버려. 아니면 나자예프 입에나 처넣든가.”
“나자예프? 그러게.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딜 갔어?”
“몰라. 거치적거려서 밖으로 내쫓았는데. 오면서 못 봤어?”
“뭘 밟으면서 오기는 했는데, 그게 나자예프였나……?”
오딜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가로 다가갔다. 흙과 낙엽을 밟는 감각과 사람을 밟는 감각은 당연히 다르지만, 워낙 경황이 없었으니 나자예프를 밟은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정말 나자예프였다면 오두방정을 떨면서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다.”
혹시 밖에서 자다가 입이라도 돌아간 건 아닌가 확인차 문을 열어 본 오딜은, 아무리 둘러봐도 나자예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자예프가 안 보이는데?”
“알 게 뭐야. 춥고 배고파서 교회로 돌아갔나 보지.”
“그 녀석, 눈도 안 보여서 교회까지 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럼 가다가 비탈길에 굴러떨어져서 목이라도 부러졌겠지. 찬바람 드니까 문 닫아 줘, 오딜 아저씨.”
“그래…… 애도 아니고. 날 밝고 나서 찾아봐야겠다.”
나자예프의 생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오딜은 문을 닫고 불을 피운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그새 네나뷔스테의 치마폭에 얼굴을 폭 파묻고 잠든 줄디즈의 등에 모포를 덮어 주고, 오딜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