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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83화 (83/189)

83화

예상치 못한 방해꾼, 아니 불청객의 등장에 에르잔이 얼른 사비나를 밀어냈다. 그는 타월만 걸치고 있는 사비나의 몸을 어떻게 가려야 할지 당황하다가, 케이프를 뒤집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이곳에 계십시오.”

에르잔은 대충 수건을 둘러 아랫도리만 가리고 천막을 밀어젖히듯이 비집고 빠져나왔다. 혹 크게 천막을 젖혔다가 바깥에서 사비나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한 행동이었으나, 에르잔이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나온 꼴을 마주한 오딜은 순간 손에 힘이 빠져서 저녁식사가 든 그릇을 떨어뜨렸다.

철퍼덕. 로스카엔이 애써 만들어 준 두 번째 고기 스튜는 그렇게 명을 달리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그게……. 목욕하던 중이었나?”

한눈에 봐도 아는 것을 구태여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에르잔은 시선을 내려 발치에 엎어진 그릇의 처참한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오딜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 씻었습니다. 혹시 요리하는 데 일손이 필요해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으, 응?”

“저는 옷만 걸치면 되지만…… 사비나 아가씨의 착의 시중을 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건너편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차, 착의 시중?”

에르잔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사비나의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오딜은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가 와 말을 더듬었다.

여간해서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오딜의 반응을 보며 에르잔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쩐지 이 마을에 온 뒤로 이상하게 종종 말을 더듬게 된다 했더니만, 설마 이 ‘말 더듬는 증상’은 전염되는 것일까.

“아니면 먼저 교회로 돌아가 계시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오딜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수습하려다 혀를 또 깨물 뻔했다. 혓바늘이 돋는 듯한 감각과 함께 눈가를 찡그렸다가 도로 크게 눈을 뜬 오딜은, 기침인지 신음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들른 거야. 신경 쓰지 말게.”

이런 야밤에 목욕하는 천막까지 찾아와 들이닥쳐서는 한다는 변명치고는 참으로 조악했으나 원래 말을 들으면 대체로 수긍하는 에르잔은 오딜의 변명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랬군요. 그런데 가져오신 요리가 이렇게 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

“상관하지 마! 아니, 괜찮아, 괜찮아! 저녁 먹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차피 처치 곤란이었는데, 잘 됐지 뭐.”

오두막에서 기다리고 있을 네나뷔스테 남매와 나자예프를 깨끗이 잊어버린 오딜은 제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목각인형을 움직이는 듯한 뻣뻣한 동작과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위화감을 감지한 것은 에르잔이 아니라 사비나 쪽이었다.

“오딜.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으헉!”

천막을 살짝 걷고 나온 사비나의 모습을 목도하고 오딜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혀를 깨물고 말았다.

“앗, 사비나 아가씨!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잔은 서둘러 오딜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사비나의 몸을 가리려 했으나 헐벗은 상태로는 사비나에게 덮어 줄 것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제 아랫도리에 두른 타월이라도 벗어 사비나의 몸을 가려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다행히 에르잔이 생각한 바를 실천하기 전에 사비나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에르잔의 등 뒤에 가볍게 몸을 밀착한 채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오딜을 바라보았다.

에르잔에 이어 사비나까지 맨몸에 타월과 뒤집힌 케이프만 걸친 채로 나올 줄은 몰랐던 오딜은 때린 사람도 없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오딜. 목욕 중이라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좀 기다려 주겠어요?”

“어? 아니, 아니! 용건 같은 거 없어!”

오두막이 비어 있고 천막에서 물소리가 들릴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설마 함께 목욕하고 있었을 줄이야. 너무 예상 밖이라고 할까. 예상했어야 했는데 미처 몰라서 아차 싶었다고 할까. 오딜은 눈이 먼 것도 아니면서 나자예프처럼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가씨가, 아가씨가 괜찮은가 해서 잠깐 들른 거야. 팔을 다쳤었잖아?”

“낮에도 봤잖아요.”

“아, 그랬나? 그랬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자기 이름도 잊어버린다더니만, 아침에 만나 까탈스럽게 식사 자리를 훼방 놓고 낮에 네나뷔스테와 만나게 했던 것까지 깡그리 잊고 있었다. 그러나 오딜은 자신의 지능이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충격의 연속이었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사비나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로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목욕을 하긴 했지만 워낙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오딜로부터 혹 비듬이나 이가 옮겨붙을까 경계한 에르잔은 천막의 천을 끌어당겨 사비나를 더욱 철저하게 보호했다.

“오딜. 중요한 용건이 아니라면 내일 날이 밝고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대로는 사비나 아가씨께서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에르잔. 나는 괜찮아요.”

“괜찮으면 안 되지! 말만 한 처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딜이 펄쩍 뛰며 부정하자 사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는 손바닥만 하다더니만 이번엔 또 말만 하다니.

“오딜. 뭘 하러 온 거예요?”

“나는, 아가씨가 걱정이 되어서…….”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걱정할 일이 있어요?”

“그게, 그래도…… 아, 그래! 아가씨는 귀하게 자랐는데, 이런 촌구석에서 불편한 일이 없을까 했지.”

“불편이라면 지금 상황이 제일 불편한데요.”

목욕을 마쳤으니 옷을 갈아입고 쉬어야 하는데 오딜이 들이닥친 상황이라 나갈 수도 없고, 옷을 입을 수도 없다. 모든 독과 병증에 내성이 있는 사비나는 감기에도 걸리지 않았으나 굳이 그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오딜이 이 시간에 찾아오는 거, 불편해요.”

상당히 직접적인 표현에 에르잔과 오딜이 동시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사비나가 불편하다고 한 것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 무례한 일이라서는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까다로울 만큼 예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오딜이 찾아오면 사비나를 신경 쓰느라 에르잔이 편히 쉬지 못한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미안하네. 나는 네나뷔스테 일도 있고 해서, 아가씨가 혹시라도 서쪽에 먼저 갈까 봐…….”

“네나뷔스테와 약속했으니까요.”

사비나의 단호한 대답에 오딜은 위험하다고 버럭 소리를 칠 뻔했다가, 다시 입안을 깨물었다. 하도 혀를 여러 번 씹었더니 이젠 입안에 가득한 것이 피인지 침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알았어. 그래도 아가씨, 아직 한 번도 북쪽에 가 본 적이 없잖아? 핵을 흡수하는 건 위험한 일이잖아. 급한 일도 아니니 우선 우리 마을을 둘러보고 천천히 계획을 세워 보는 게 어때?”

“급한 일이 아니라고요?”

“어차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안 죽었으면 며칠 더 걸린다고 죽지도 않아. 내가 같이 북쪽에 가 줄 테니까…… 여차하면 카밀라랑 로스카옌도 데려가면 되니까, 너무 앞서가지 말라고.”

아페티트가 있는 서쪽은 위험하다.

원래도 사비나가 그곳에 방문하는 것을 꺼려 했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니 가만둘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비나를 콘바야젠 백작의 성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니, 꼭 귀족의 성이 아니라도 평범한 다른 마을로라도 가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네 개의 핵을 모두 흡수하기 전에 마을을 벗어난다면 균형이 어그러질 테니까. 이것도 저것도 영 마땅치가 않으니, 오딜로서는 시간이라도 끄는 것이 최선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래? 다행이구먼! 그럼 내일은…….”

“오딜. 내일 일은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나와 에르잔은 방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비나는 팔을 뻗어 에르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원래도 밀착하고 있던 몸이 더욱 가까이 달라붙어 에르잔이 뻣뻣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사비나는 팔을 풀기는커녕 도리어 쪽 소리가 나도록 에르잔의 등줄기에 입을 맞추었다.

커헉. 헛기침인지 헛구역질인지 모를 것을 하며 입을 틀어막은 오딜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오딜. 더 할 말 있나요?”

“아, 아니. 아니…… 가, 갈게! 내일 오겠네!”

“너무 일찍 오면 곤란해요. 아침까지 에르잔과 할 일이 있거든요.”

아침까지, 라는 표현에 에르잔과 오딜이 동시에 목이 막힌 듯 켁, 하는 소리를 냈다. 뻣뻣하게 굳은 에르잔과는 달리 오딜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몸을 돌려 후다닥 뛰어갔다.

에르잔은 제 허리를 감싼 가느다란 팔의 감촉에 주의를 빼앗겨, 오딜이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저어,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보기엔 어때요?”

다시금 그녀를 끌어안으려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사비나가 그의 곁을 쓱 빠져나오며 아직 젖은 상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꽉 쥐어 물기를 짜냈다.

“예? 무엇이 말입니까?”

“아무래도 네나뷔스테가 아니라 오딜이 훼방을 놓을 것 같지 않아요?”

원래도 서쪽은 위험하다며 말리긴 했지만, 이렇게 야밤에 뜬금없이 찾아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수상했다.

마치 사비나가 서쪽을 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것 같다고 할까.

“내일 아침에 오딜이 찾아오면 더 피하기 힘들어져요. 오늘 밤에 움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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