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7. 의심이 싹트기 시작할 때
사비나와 에르잔이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대체 숲속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있었던 걸까.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 귀가 화끈해질 만큼 부끄러웠으나 싫지는 않았다.
옷가지에 붙은 흙먼지나 나뭇잎을 떼어 내도 옷은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다. 체취를 묻히는 짐승처럼 살갗을 비비며 한참을 물고 빨고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서로의 체액을 묻힌 채로 있을 수도 없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목욕 준비를 마치고, 아직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의자에 앉아 반쯤 졸고 있는 사비나를 깨웠다.
“사비나 아가씨, 주무시기 전에 씻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응, 에르잔…….”
몸이 무거운데 신기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찰로 피부가 빨갛게 될 만큼 제 몸을 쓰다듬던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주는 느낌이 여전히 좋아, 사비나는 에르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아가씨?”
“후우…….”
사비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에르잔의 옷섶에 뺨을 문질렀다. 일어나서 씻으러 가야 하는데 일어나는 것이 귀찮았다.
이대로 에르잔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은 마음이 반, 주인이 되어서 목욕도 하지 않고 비위생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반이었으나 몸이 노곤하여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허리 아래가 뻐근하고 다리 사이가 얼얼한 것이야 이제 익숙해져 불편하지 않은데, 이 남자의 넓은 품에 파고드는 것은 어째서 이토록 편안한 걸까. 사비나는 의자에 앉아 상체만 앞으로 기울여 에르잔의 허리에 팔을 걸친 불편한 자세임에도 꼭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에르잔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비나를 감싼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다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매만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목덜미를 쓰다듬자 사비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땀에 젖은 건지 머리카락이 조금 축축했다.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응……?”
에르잔은 사비나의 몸을 가볍게 안아 들고는, 헛간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욕실이라고는 해도 교회에 있는 것처럼 제대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나무욕조에 비바람이 들지 않도록 천막을 쳐 둔 것에 불과했다. 욕조는 제법 튼튼했으나 나무나 흙벽이 아니라 천막인 까닭에 물이 빨리 식는 것이 단점이었다.
에르잔은 얼른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 아직 김이 나는 뜨끈한 물에 사비나를 안고 들어갔다.
“에르잔……?”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목욕물이 식으면 감기에 걸리실 것 같아…….”
이제까지 에르잔은 사비나가 목욕을 마칠 동안 밖에서 경계를 서거나, 사비나가 잠들면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몸을 닦아 주었지만, 지금 사비나는 혼자서 목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물수건으로 그냥 닦고 끝내기엔 숲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에르잔은 사비나와 함께 욕조에 들어와, 물에 젖어 들러붙은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에, 에르잔? 잠깐만요……!”
“혼자서 벗으실 수 있겠습니까?”
사비나가 당황하여 옷깃을 붙잡는 것을, 스스로 벗으려고 그러는 거라고 착각한 에르잔은 순순히 손을 떼고 물러났다.
물러났다고는 해도 욕조 안인지라 두 사람은 거의 무릎을 맞댄 채로 마주 보는 거리였다.
“가, 같이 목욕하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도 곤로하실 텐데, 그래도 그대로 잠드시면 위생상 좋지 않을 것 같아…….”
오전에 오딜이 까탈스러울 만큼 집요하게 위생을 점검했기 때문일까. 사비나가 피곤하다면 그냥 잠들게 해 주고 싶었으나 그래도 목욕을 시켜야겠다는 의욕이 더 앞섰다.
에르잔은 가만히 앉아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녀가 스스로 옷을 벗기를 기다리는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비나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히끅. 옷깃을 붙든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들썩이는 사비나의 모습에 에르잔은 그녀가 감기에 걸렸나 싶어 금세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소, 손 치우세요!”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사비나가 허둥대며 시선을 피하자, 에르잔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손을 거두었다.
참방. 욕조의 더운물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사비나 아가씨.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아, 아뇨! 벗어야죠. 벗어야…….”
벗어야 하는데, 에르잔이 눈앞에 있다.
그 상황이 사비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상한 일이다. 벌써 몇 번이나 살을 맞대고 몸을 섞고, 알몸을 보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닌데.
섹스할 때가 아닌 상황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욕조가 비좁아 목욕하기 불편하시다면, 나가서 시중을 들겠습니다.”
철썩. 에르잔이 몸을 일으키자 욕조 끝까지 닿아 있던 수위가 훅 낮아졌다. 사비나는 욕조에서 벗어나려는 에르잔의 젖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사비나 아가씨?”
“아, 그게…….”
방금까지 부끄러워서 피해 놓고는, 그가 멀어지는 순간 손이 먼저 나가 옷깃을 붙잡는다. 사비나는 어쩐지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에르잔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에르잔도…… 젖은 옷을 입고 나가 있으면 감기에 걸리잖아요. 여기 있으세요.”
한겨울에도 맨몸으로 설산을 오르는 훈련을 받았던 에르잔은 옷이 흠뻑 젖은 채로 사비나의 목욕 시중을 들어도 감기에 걸리지 않지만, 사비나의 ‘여기 있으라’는 말에 에르잔은 다시 풍덩 몸을 가라앉혔다.
정작 사비나는 제가 붙잡아 놓고 에르잔이 순순히 다시 욕조에 들어앉자 당황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번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만 숙인 채로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에 푹 젖은 옷을 욕조 밖에 놓아두고, 알몸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했다.
천막 안에 등잔이라고는 하나뿐인지라 물속에 있는 서로의 몸이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비나는 에르잔과 함께 목욕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무릎을 부둥켜안았다.
나가지 말라고 붙잡은 게 실수였을까. 하지만 에르잔이 멀어지는 것은 싫었다.
그렇다고 옷을 벗고 같은 욕조에 들어와 있는 지금 상황도 부끄러웠다.
이것도 저것도 싫다면 결국 어쩌자는 건지, 우유부단한 자신의 모습에 가벼운 환멸을 느낀 사비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수그리는데, 에르잔이 문득 그녀의 뒷덜미를 감쌌다.
“에, 에르잔?”
“혼자서는 등을 씻기 힘드실 겁니다.”
사비나가 욕조 안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을 목욕하기 힘들어서라고 오해라도 한 것일까. 등을 감싸는 에르잔의 크고 단단한 손은 사비나의 몸을 착실히 지탱하고 있었으나, 몸을 섞을 때처럼 쓰다듬는 게 아닌 담백한 손길이었다.
“사비나 아가씨. 이쪽으로 돌아앉으시겠습니까? 우선 등을 씻고, 그 뒤에 머리를 감겨 드리겠습니다.”
연인 사이의 색스러운 분위기라기보다는, 보육원에 자원봉사를 나와 원아들을 씻기는 사람처럼 조금의 성적인 함의도 없는 말투에 사비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등을 돌렸다.
‘숲에서는 그렇게 열정적이었으면서…… 에르잔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섹스하고는 하에도 계속해서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고 싶은 건 자신뿐인 걸까. 사비나는 왠지 자신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철없는 주인이 된 것 같아 우울해졌다.
“사비나 아가씨? 어딘가 안 좋으십니까?”
“……괜찮아요.”
왜 우울한 기분이 되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르잔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사비나는 등을 돌린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에르잔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머리카락을 조심히 빗어 내는 감각은 싫지 않았다.
다만 두근두근한 제 심정과는 달리, 따끈한 목욕물이 식어 가는 것처럼 에르잔의 행동이 태연한 것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내가 왜 이러지?’
사비나가 아리송한 기분으로 흔들리는 등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이 목욕이 끝났다.
에르잔은 언제 다 씻었는지 말끔해진 모습으로 사비나를 다시 안아 들었다. 욕조의 물이 크게 출렁이더니 후드득. 하고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에르잔은 커다란 타올로 사비나의 몸을 감싸고, 타월을 하나 더 가져와 그녀의 긴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꼭꼭 눌러 물기를 빼 주었다.
호위기사가 목욕시중까지 드는 일은 없을 테니 서투를 법한데도 사비나의 몸을 꼼꼼히 씻고 물기를 닦아 주는 에르잔의 행동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사비나는 스스로 몸을 닦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에르잔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라 밖은 어둡다. 천막 안에서 흔들리는 주홍빛 등불이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커다란 손의 윤곽을 덧그리듯이 흐르는 모습을, 사비나는 새기듯이 눈에 담았다.
짧은 손톱과 마디가 굵은 손가락, 도드라진 손목뼈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힘줄과 함께 불쑥 튀어나왔다가 감춰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신기했다.
‘에르잔과 내 몸은 왜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네나뷔스테는 무척 키가 크고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지니고 있었고, 카밀라는 작고 말랐지만 은근히 뼈대가 굵어 힘이 넘쳤다.
그래도 두 여자는 사비나와 비교해 크게 체형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에르잔은 닮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비나와는 다르게 생겼다.
남자다운 굵은 목이나 넓은 어깨, 탄탄한 가슴. 허리는 분명 늘씬하게 뻗었는데 막상 끌어안으면 꼭 무슨 고목나무를 끌어안은 것처럼 단단했다.
그녀의 허리만 한 굵기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의 움직임을 좇다가, 사비나는 문득 다리 사이의 윤곽을 보고 얼른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사비나 아가씨, 이제 끝났습니다. 새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
“사비나 아가씨?”
몸을 다 닦았음에도 사비나는 가만히 에르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는 걸까. 에르잔이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사비나가 쓰러지듯이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 아가씨?”
“에르잔, 몸…… 아직 안 닦았잖아요.”
“예?”
에르잔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닦을 수 있습니다!”
“나도 해 줄게요.”
사비나는 제 몸을 감싸고 있던 타월을 벗고, 에르잔의 몸에 제 몸을 딱 붙였다. 살갗이 닿기가 무섭게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에르잔을 보니 사비나는 그제야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아무리 어두워도, 지근거리에서 눈을 마주하면 서로의 감정을 읽지 못할 수가 없다.
눈가를 붉히며 에르잔이 서서히 고개를 숙여 사비나에게 입을 맞추려는데, 바깥에서 오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애송이! 여기 있나?”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