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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81화 (81/189)

81화

로스카옌은 올가가 하는 말을 들어 주고, 그녀의 뜻에 따라 주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랬기에 올가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스카옌이 환속하여 그녀와 결혼한다면, 남편이 된다면, 가족이 된다면.

그때도 과연 로스카옌이 그녀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을까?

올가는 그녀를 사랑하고 염려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옭아매는 모든 감정들이 지긋지긋했다. 사랑하는 로스카옌마저 그녀를 구속하려 든다면 더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로스카옌. 사람의 감정은 변해요. 하지만 추억은 변하지 않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제 일어났던 일은 바뀌지 않는다.

올가는 로스카옌과 함께 미래를 꾸려 나가기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과거의 추억을 남겨 놓고 싶어 했다.

“로스카옌,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사세요. 나는 내 인생을 살 테니까.”

올가의 필사적인 눈빛에 로스카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고해성사를 하러 찾아왔던 올가.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던 올가.

사랑하던 가족을 더는 사랑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겁쟁이인 자신을 책망하던 올가.

로스카옌은 올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진실로 상대를 배려하는 거라면, 세간의 상식이 아닌 올가가 원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옳았다.

그래서 로스카옌은 침묵했다.

두 사람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다.

올가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그녀의 소망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

“올가가 원했던 건 자유였어.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그러다가 죽었잖아. 올가가 죽어 갈 때 네놈은 뭘 했냐고!”

흉터 가득한 손이 검은 두루마기를 움켜쥐고, 마치 물건을 들어 올리듯 로스카옌을 들어 올렸다. 검은 법모가 벗겨져 백발을 드러낸 로스카옌의 얼굴에 젊은 시절의 단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회와 죄책감에 자신을 놓아 버린 자의 눈은 검고 혼탁했다. 오딜은 부들부들 떨다가 로스카옌의 멱살을 놓았다.

로스카옌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렸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진실을 밝혔으면…… 결혼을 했으면, 그래서 나가서 살았으면, 올가가 죽을 일도 없었어.”

“대신 올가의 일생은 불행했겠지.”

“뭐라고?”

“올가의 판단이 옳았어. 자네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간섭하며 돌아다니는 걸 보면 알지 않는가. 남편감으로는 꽝이라는 것을 알았던 게지.”

넘어진 까닭에 검은 옷에 흙먼지가 들러붙고 스튜의 건더기가 달라붙어 지저분했으나 로스카옌은 옷을 털지 않았다. 옷에 달라붙은 더러운 것을 털어 낸다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도, 이 죄책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기회가 있었잖아. 15년 동안 시간이 있었잖아…… 왜 말을 안 했어? 왜 사실을 밝히지 않고…….”

“내가 사실을 밝혔으면, 자네의 죄책감이 더 가벼워졌을까?”

로스카옌의 질문에 오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부릅뜬 눈가가 붉었다. 실핏줄이 터진 건지, 시야가 핏빛으로 얼룩덜룩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이 입안을 깨물어 상처가 난 탓인지, 분노로 피가 역류하는 탓인지 로스카옌은 알 수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물어봐야 대답을 들려 줄 리가 없지. 그러니 남은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게 최대한의 속죄 아니겠나.”

어쩌면 죽는 순간에는 올가도 후회했을지 모른다. 자신을 지켜 줄 누군가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딜로부터 벗어나, 혼자서 아이를 낳고 살았던 8년은 올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다던 올가의 말을 로스카옌은 잊지 않았다.

아마 시간을 되돌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로스카옌이 올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로스카옌은 죄책감을 안고도 후회조차 하지 못했다.

“스튜가 엎어졌으니 다시 만들어야겠구먼…….”

로스카옌은 바닥에 엎어진 그릇을 보고 무심하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멧돼지는 가죽이 질겨 늙은이의 힘으로는 벗길 수 없다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딜은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시선을 내리자 바닥에 엎어진 스튜가 보였다.

엉망진창이 되어 누구도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저녁식사. 요리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 음식이 꼭 제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아, 오딜은 허겁지겁 주저앉아 엎어진 그릇을 뒤집었다.

내용물은 전부 바닥에 쏟아졌지만, 진득한 국물과 옥수수 몇 알이 그릇에 붙어 있었다. 오딜은 얼굴에 소스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그릇에 처박고 그것을 핥아먹었다. 비릿한 피맛에 섞여 드는 새콤달콤한 소스의 맛이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오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눈두덩에 묻은 소스가 흘러내려 눈가에 들어갔는지 눈이 따가웠다. 오딜은 얼굴을 닦아 내지도 않고, 그릇이 가면이라도 되는 양 얼굴에 덮어썼다.

따갑고 비리고 역했으나 신기하게도 구토는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뭔가 토해 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에겐 육체적인 후련함조차 느낄 자격이 없다고 힐난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오딜은 그릇을 부여잡았다.

흙을 구워 만든 그릇에 쩌억, 금이 가더니 오딜의 손 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깨진 그릇 조각이 피부를 할퀴었다. 흉터 가득한 피부 위에 날카로운 자국이 새로 그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차피 오딜의 얼굴은 소스와 피로 범벅이었던 까닭에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구분은 잘 가지 않았다. 오딜은 얼굴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다가, 용수철이 튕겨져 나오듯 벌떡 일어났다.

“잠깐…… 그럼, 그 아가씨는?”

콘바야젠 백작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올가를 닮은 사비나.

그녀는 정말로 콘바야젠 백작의 딸일까?

오딜은 눈가에 흘러내리는 소스를 손등으로 대충 닦고 부엌으로 뛰어갔다.

“로스카옌, 로스카옌!”

“왜. 멧돼지 가죽을 벗겨 주러 왔나?”

“그 아가씨…… 그 아가씨는 뭐야? 정말로 귀족이야? 콘바야젠 백작의 친딸이야?”

분노가 가득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새끼를 잃어버린 짐승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오딜이 물었다.

“올가가 낳은 딸! 분명히 검은 머리였어.”

올가가 오딜과 마주치면 인사조차 하지 않고 쌩하니 도망간 탓에 조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몸집이 작은 여자아이였던 것만은 기억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15년 동안 시간이 흐르지 않던 마을이라서 잊고 있었다.

마을에 불벼락과도 같은 참극이 일어난 것이 15년 전.

올가가 딸을 낳은 것은 그보다 8년 전.

로스카옌이 이 마을에 온 것은 그보다 2년 전.

만약 제 조카가 제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딱 사비나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는 외부인일세.”

“닮았어. 닮았는데 어딘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지. 귀족이 아니라 꼭 수도사 같다고……!”

카밀라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사제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얼굴은 올가를 닮았지만, 사비나의 분위기는 로스카옌을 닮았다.

“그 아가씨지? 그 아가씨가 자네와 올가의 딸이지?”

“오딜. 이상한 망상 좀 그만하게. 사비나 아가씨는 콘바야젠 백작이 보내서 이곳에 온 외부인이야.”

“자네 입으로 그랬잖아! 진짜 애비는 불만이 없다고!”

에르잔과의 관계를 알고 충격받은 오딜이 상담인지 뒷담인지 모를 말을 했을 때, 로스카옌은 진저리치며 자리를 피했다.

나자예프의 말로는 에르잔이 제대로 사비나를 호위하지 못해 그녀를 다치게 했을 때, 성수를 집어 던지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던가.

“자네 딸이잖아! 내 조카가 맞잖아!”

“구속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로스카옌은 가죽이 잘 벗겨지지 않아 거꾸로 쥐고 있던 칼을 오딜을 향해 날렸다. 힘도 없고 싸움도 해 본 적 없는 로스카옌이 던진 칼은 오딜의 어깨를 살짝 긁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딜. 화가 나면 나를 때려.”

로스카옌이 오딜을 향해 다가왔다. 걸음이 느리고 등이 굽었음에도, 알 수 없는 독기가 느껴졌다.

“나를 칼로 찌르고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자르고 마음대로 해도 돼. 뭘 해도 돼! 나한테는!”

혼탁하던 검은 눈동자에 선명한 빛이 떠올랐다.

아니, 그것은 빛이 아니라 불 같았다.

“나한테는 뭘 해도 좋으니, 사비나 아가씨가 외부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마.”

저주에 물들어 시간이 멈춰 버린 마을. 이 마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마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외부인인 로스카옌은 나이를 먹는다. 마을 밖으로는 나갈 수 없지만, 로스카옌은 자신의 행동반경이 제한되는 것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자신이 지은 죄로 감옥에 갇힌 셈이라고 생각하면, 도리어 넓고 쾌적하기까지 했으니까.

“사비나 아가씨의 시간을 멈추게 하지 마. 이 마을에 가두지 말라고.”

“로스카옌, 대체…….”

“그러면 모두 죽어. 이번에야말로,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늘 느릿하게 대답하던 로스카옌이 아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하게 울려, 오딜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혀 그만 깨물게. 상처는 아물어도 잘리면 답이 없어. 혀가 잘리면 말도 못 하니까.”

로스카옌의 지적에 오딜은 그제야 자신이 혀를 깨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턱에 힘을 풀자 다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으나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되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로스카옌.”

“뭔가?”

“그 아가씨를 이 마을에서 내보내야 해. 한시라도 빨리.”

오딜의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눈은 맹수나 전사라기보다는, 광인의 것을 닮았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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