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삼형제 가운데 첫째인 알렉세이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년이었다. 평소엔 조용히 책을 읽다가도 수확 철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요령 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나와 돕고는 했다.
조용하고, 성실하지만, 눈에는 띄지 않는 아이.
어머니는 그런 알렉세이를 무척 편애했다.
알렉세이가 귀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였다.
<알렉세이. 너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라. 너한테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세 형제의 외모가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다른 것은 분명했으나, 어차피 그들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는 점 외에, 세 형제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서로 친하지도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는 둘째 형이나, 철부지 같은 막냇동생에 비하자면 맏이인 알렉세이는 너무 조용해서 존재감 없을 정도였으나, 그런 알렉세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한 번 있었다.
올가가 임신을 하고도 애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은 오딜뿐만이 아니었다.
한때지만, 혹시 올가를 임신시킨 남자가 미성년자라 감추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던 적이 있다. 그 추측에서 가장 먼저 이름이 오른 것이 바로 세 형제 가운데 첫째, 고작 열일곱 살이었던 알렉세이다.
물론 근거 없는 추측이었기에 소문은 곧 사그라들었다. 오딜은 물론이고 나자예프나 바르셀다도 알렉세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알렉세이는 조용하고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음험하고 끈질긴 성격이었다. 만약 짝사랑하던 여자가 제 애를 가졌다는 것을 알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으리라.
그런 알렉세이도 올가의 임신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카이라트처럼 혼자 틀어박히는 성미는 아니라도,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을 꺼려 하던 알렉세이가 드물게 냉정을 잃고 서재를 엉망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바르셀다는 제 형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냉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그의 폭력적인 성향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망나니인 둘째 형보다는 말이 통하겠다 싶은 생각만 했다.
올가가 마을의 북쪽에 틀어박히고 3년쯤 지난 후였을까. 내내 비밀을 간직하느라 입이 근질근질했던 바르셀다는 기어이 알렉세이에게 몰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바르셀다. 네가 본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으, 응.>
알렉세이는 맏형답게 바르셀다를 타이르며 돌아섰다. 그 뒤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온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알렉세이가 홀연히 사라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세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흐윽, 죄송해요. 죄송해요…….”
바르셀다는 반지가 없는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훌쩍였다.
나자에프와 바르셀다를 이어 주던 금색의 반지는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는데, 제 마음에 얹힌 죄책감은 아직도 변함없는 존재감을 과시하며 그를 짓누른다.
고통에 몸부림칠 때는 잊어버릴 수라도 있었던 기억이 다시금 밀려와, 바르셀다는 머리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
“로스카옌. 왜 입을 다물고 있었어?”
“무엇을 말인가?”
“왜 닥치고 있었느냐는 말이야. 그동안.”
누군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넘어진 자세인데도, 오딜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내가 무서웠냐? 칼이라도 맞을 것 같아서? 아니면 남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게 부끄러워서? 사제직에서 쫓겨나는 게 싫어서?”
“…….”
“변명을 할 생각이 없다면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무슨 낯짝으로 계속 여기에 있었어?”
흔들, 오딜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뒤틀려 있던 몸이 바로 섰다. 오딜은 휘청거리며 다가와 로스카옌의 멱살을 쥐었다.
“왜 책임을 안 지고 입을 닫고 있었느냐고, 이 더러운 자식아!”
“무슨 책임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오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로스카옌을 밀쳤다. 철퍽. 들고 있던 그릇이 엎어지며 새로 끓인 뜨거운 스튜 국물이 바닥에 엎어졌다. 한쪽 손에 화상을 입은 것 같았으나 오딜은 신경 쓰지 않았다. 뜨겁다는 자각도 없었다.
“네가 진짜 올가를 사랑했으면…… 아니,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책임을 져야지. 남편이 되었어야지. 가장으로서 부인과 아이를 지켰어야지!”
바닥에 넘어진 로스카옌을 향해 외치는 오딜의 노성을 들으면서도, 로스카옌의 탁한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자네 생각이지.”
“뭐?”
“올가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어.”
흐트러진 옷자락을 갈무리하지도 않고,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로스카옌은 힘없이 대답했다.
“올가는 단 한 번도 ‘보호’를 바란 적이 없단 말일세.”
16. 로스카옌의 비밀
로스카옌이 처음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미사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종래 있던 신부는 치매에 걸려 본 교구로 송환되고, 젊은 로스카옌이 마을의 신부가 되어 대신 미사를 진행하고 고해성사를 들었다.
올가는 신심이 깊은 편은 아니었으나, 고해성사만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아니, 이 마을의 고해실은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과장이 아닐 만큼, 올가는 틈만 나면 고해실을 찾았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있었던 일,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떤 생각을 했고.
아침 햇살이 밝아서 눈이 부셨고, 점심에 먹은 스튜가 미지근해서 맛이 없었으며, 오는 길에 죽은 매미를 봐서 재수가 없었다는 말까지.
고해성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야기를 올가는 몇 시간 동안이나 떠들어 댔다.
로스카옌은 올가에게 고해성사란 잡담이나 근황 보고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알려 줄까 하다가, 우선 마을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해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오해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로스카옌 신부님이 좋아요.”
“올가 양?”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는데, 로스카옌 신부님은 들어 주시잖아요.”
올가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말이 빠른 편도 아니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느리지만 신중했으며, 조용하지만 결코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몇 시간이나 말을 해도, 내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시잖아요.”
“그것이 제 의무니까요.”
“제가 매일 찾아와도, 귀찮다고 내쫓지 않으시잖아요.”
“고해성사를 듣는 것이 제 일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속에 있는 말을 지껄일 뿐인데도, 그만하라고 말리지 않으시잖아요.”
“…….”
올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고해성사가 아니라는 것을.
올가는 다만 말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하지 못하는 말을, 고해실에서 고백하고 싶었다.
고해실은 그녀에게 있어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고백을 묵묵히 들어주는 로스카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의 이해자였다.
그러니 올가가 로스카옌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사랑해요.”
“올가 양. 저는 사제입니다.”
“신의 종으로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사제의 일이잖아요? 그럼 당신은 저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평소의 그녀를 아는 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만큼 대범하게 달려드는 올가를 밀어내는 방법을 로스카옌은 알지 못했다.
그저 배운 대로, 익힌 대로, 앵무새처럼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입이 다물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자를 모르는 젊은 청년이 감당하기에 올가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맹목적이었다.
“당신밖에 없어요, 로스카옌.”
“올가…….”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당신밖에 없다고요.”
올가가 사랑한 것은 로스카옌의 지극히 일부였다. 지극히 일부였으나 전부이기도 했다.
올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로스카옌.
그녀가 말문이 막혀 주저하고 있더라도 보채지 않고 기다려 주는 로스카옌.
올가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 그녀의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려 하는 로스카옌.
그녀를 위하면서도, 그녀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
올가에게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에 여념이 없는 남자는 질색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남자는 더욱 최악이었다.
“오딜은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어요. 내가 사랑했던 오빠란 말이야…….”
오딜에 대한 가족애를 말할 때, 올가는 늘 과거형으로 말했다.
하나뿐인 가족인데, 오빠인데, 그녀가 의지해야 할 존재인데.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인생에 간섭하고, 하려는 일을 가로막고, 뜻대로 휘두르려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반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져서 미칠 것 같다고, 올가는 절규할 때조차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흐느꼈다.
“날 내버려 두라고 하고 싶은데, 오딜이 바라보면 말이 안 나와요. 눈물만 주륵주륵 나와요. 바보같이…….”
올가는 겁이 많았다. 그녀는 늘 말을 꺼내기 전에 여러 번 생각했고, 말을 하다가도 멈추고 다시금 표현을 고르고 골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고, 올가가 말을 멈추면 이때다 싶어 제 의견을 덧붙이고, 올가가 표현을 정정하기 전에 멋대로 넘겨짚고 오해했다.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속 시원히 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로스카옌에게 고해성사를 할 때, 올가는 울기만 했다. 자신이 말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도 멋대로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말을 하다가 멈춰도 보채지 않고 기다려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말을 마칠 때까지 몇 번이나 침묵이 이어지고 몇 번이나 말을 더듬거리며 표현을 정정해도, 중간에 말을 끊거나 넘겨짚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한 번도 속내를 털어놓은 적 없기에 느리고 서투를 수밖에 없는 올가를 기다려 준 사람은 로스카옌이 유일했다.
그러니 올가가 로스카옌을 구원자로 여기고, 그에게 고해성사할 때 해방된 기분을 느끼고, 그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올가가 로스카옌에게 바라는 덕목이 딱 거기까지였다는 것이다.
“올가. 사실을 밝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밝히면요? 사제를 그만두고, 나랑 결혼하려고요?”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혼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너무 힘들고 고달픈 일일 테니…….”
“난 힘들다고 말한 적 없는데,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올가는 정색하며 로스카옌의 손을 뿌리쳤다.
“로스카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올가.”
“그러니까 내가 계속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면 안 되나요?”
올가에게 가장 지긋지긋한 것은 그녀를 구속하는 것이었다. 오딜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좋아한다면서 정작 제 마음을 전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 남자들의 시선, 행동, 제 이야기를 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말투, 그녀가 침묵하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다는 좌절감.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이기적인 배려가 올가는 지긋지긋했다.
“뭐가 옳은데요? 뭐가 좋은데요? 나는 싫은데?”
“올가. 사람은 누구나…….”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로스카옌은 내가 힘들고 고달플 거라고 미리 넘겨짚는데요?”
자기표현이 부족한 올가가 필사적으로 전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로스카옌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간섭하려 드는 그 모든 것들을 거부했다.
“로스카옌, 제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