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79화 (79/189)

79화

그런 관계?

무슨 관계?

바르셀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오딜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자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호기심이나 궁금증 따위가 아니었다. 사지가 잘린 것도 아닌데 제 몸이 아닌 양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신부님이 올가 누나를 괴롭히는 줄 알았는데, 올가 누나가 좋아하니까,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져서, 혼란스러워서…….”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멈춰선 이가 오딜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르셀다는, 정말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듯 서글프게 말했다.

“저는 그게 연인 사이에 하는 일인 줄도 몰랐어요. 그때 저는 겨우 아홉 살이었단 말이에요.”

등줄기를 타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올라와, 오딜은 반사적으로 혀를 깨물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릿한 감각이 입안에 퍼졌으나 악물고 있는 이에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무심코 소리를 입 밖에 내버릴 것 같았기에.

오딜은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투나 사냥 외의 일에는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었고, 이해심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바르셀다가 고백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전후 사정을 세세히 묻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였던 바르셀다가 우연히 목격한 것.

연인 간에 하는 일.

소년이 훔쳐본 것은 올가와 로스카옌의 정사 장면이었다.

“그때는 제가 봤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숨겼어요.”

“…….”

“그다음에는 오딜 아저씨가 무서워서 말을 못 했어요.”

“…….”

“그런데 올가 누나가 숨어 버리고, 시간이 지나 저도 나이를 먹고, 보고 듣고 그게 뭐였는지 알고 나니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바르셀다가 울먹이듯 토해 내는 말 마디마디가 비수가 되어 오딜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오딜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입과 코까지 감쌌다. 눈앞이 핑 도는 것이 숨이 막혀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올가가, 내 여동생이…… 로스카옌과 연인 사이였다고?’

아닐지도 모른다.

바르셀다의 착각일 수도 있고, 그날 한 번뿐인 불장난이었을지도 모르며, 올가가 사실 오딜 몰래 다른 여러 남자와 사귀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올가가 임신한 것은 다른 남자의 아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피하던 여동생의 모습을 떠올린 순간, 다른 모든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말을 못 했구나.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꼬리를 잡을 수가 없었던 거였어…….’

올가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많았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고, 성격도 차분하고, 일은 서툴렀으나 마음씨가 너그러워 얼뜨기 같은 사내놈들에게도 친절했다.

오딜이 아무리 올가를 감싸려 해도 그는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다. 사냥도 나서고 무너진 집이나 울타리도 보수하며,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마을의 망나니들을 주먹으로 다스리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위험한 곳에 가지 마라, 수상한 놈이랑 어울리지 마라, 늘 조심하고 주의하고 사내놈들은 다 짐승 새끼니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잔소리를 밥 먹듯이 했지만, 오딜이 동생 옆에 붙어 있는 시간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오딜이 하도 잡아 댄 탓에 올가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었으나 그렇다고 마주치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오딜이 모르게 남자와 사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어떤 다리 시커먼 놈이 겁도 없이 제 여동생에게 손을 댈지 몰라 불안 반 걱정 반으로 전전긍긍하면서도, 누군가와 연애를 하면 자신에게 말은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올가가 덜컥 임신을 한 것이다.

오딜은 아직 올가가 누구와 사귄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대체 어떤 놈이 제 여동생을 임신시켰느냐며 샅샅이 뒤지고 다녀도 올가를 임신시킨 남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오딜의 눈이 뒤집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 여동생을 임신시켜 놓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놈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며 칼을 들고 설치는 오딜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했다. 앞에 나설 깜냥은 없더라도, 적어도 진심으로 올가를 사랑한다면 뒤늦게라도 사실을 밝히는 것이 사람 된 도리 아닌가. 그런데 열 달이 지나 올가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도 오딜 앞에 나서는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딜은 그 점이 이상하다 못해 수상해서 올가를 채근했다.

<대체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길래 제 애를 밴 여자를 홀로 내버려 둔단 말이야! 그런 놈은 애비 자격도 없어!>

누군지 알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릴 기세로 호통을 치는 오딜을 마주할 때마다 올가는 방문을 닫고 틀어박히거나, 이웃집으로 피신하거나, 교회로 도망쳤다.

오딜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강간을 당해 임신한 거라면 범인이 누군지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딜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호위대장이었으니, 오딜을 이길 수 있는 남자는 마을에 없었다.

상대 남자를 사랑해서 감싸려 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올가는 오딜을 무서워했지만 오딜이 그녀를 차마 어쩌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노발대발한다고 한들, 올가가 나서서 남자를 감싸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결국 오딜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허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누구인지 밝히지를 않았을까.

오딜은 그 이유를 지금 와서 알았다.

‘로스카옌이 사제라서, 사제가 여인과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알려지면 뭇사람의 비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사제 자격도 박탈당하니까…….’

올가는 로스카옌을 지키고자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계속해서 마을 교회의 신부로 있을 수 있도록, 아무 일도 없는 척 혼자서 아이를 키우려 했다.

‘하지만 왜……? 왜 로스카옌은 올가를 내버려 두었지?’

만약 로스카옌이 올가를 사랑했다면, 아니, 사랑이 아니라 비록 하룻밤 불장난이었을지라도 제 아이를 가진 여자를 그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사제직을 포기하고 환속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올가와 가정을 꾸렸어야 했다. 오딜이 알고 있는 로스카옌은 제가 살기 위해 타인을 사지로 내모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15년 동안 홀로 늙어 가며 저주받은 마을 사람들을 돌본다는, 어떤 이득도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처음에는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신부님께 따질 생각이었어요.”

바르셀다도 묻고 싶었을 것이다.

연인 사이였으면서, 왜 올가를 홀로 두느냐고. 당당하게 진실을 밝히고 올가와 가정을 꾸리는 게 옳은 일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고해실에 들어가니까, 입이 안 떨어져서…….”

하지만 몸이 조금 더 자랐을 뿐 그때의 바르셀다는 아직 사춘기 소년이었다.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비밀의 무게를 소년이 어찌 감당할까.

바르셀다는 로스카옌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고해실을 뛰쳐나왔다.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은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으니까, 미칠 것 같아서…….”

바르셀다는 코를 훌쩍이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로스카옌 신부님…….”

흐느끼는 소리에 굳어 있던 다리가 겨우 풀리는 게 느껴졌다. 오딜은 비틀거리며 얼른 방을 빠져나왔다.

비밀을 털어놓았으니 후련해진 건지, 바르셀다는 더는 로스카옌을 부르지 않았다.

‘죄송해? 뭐가 죄송해, 로스카옌에게 죄송해할 게 뭐냐고!’

솟구치는 격정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 머릿속을 꽝꽝 울려 댔으나 오딜은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참았다.

여기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바르셀다가 놀랄 것이다. 그는 아직 환자였다. 그리고 바르셀다에게 왜 진실을 밝히지 않았느냐며 화를 낼 권리는 오딜에게 없었다.

오딜은 빠른 걸음으로 교회를 빠져나오다가, 그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넘어져서 다쳐봐야 상처는 금방 낫는다는 것을 아는 오딜은 굳이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 머리부터 땅에 부딪힌 까닭에 시야가 흔들리고 골이 띵했으나, 금방이라도 다문 입술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던 노성은 충격 때문인지 안으로 쑥 들어갔다.

오딜은 시야가 빙빙 돌아가는 것을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하도 오래 숨을 참고 있었는지, 공기가 들어오자마자 기침이 났다.

콜록. 콜록. 끈이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기이한 자세로 꺼꾸러진 오딜의 기침 소리 사이로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스며들었다.

“오딜. 괜찮은가?”

모락모락 따끈한 열기가 나는 그릇을 들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의 모습이 거꾸로 보였다.

“……로스카옌.”

“주방에 사냥감을 놓고 간 걸 봤네. 멧돼지는 내 힘으로 가죽을 벗기기가 어려워 우선 토끼고기로만 요리를 만들었어. 네나뷔스테에게 가져다주게.”

젊을 적의 머리색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만큼 백발이 풍성한 주름진 얼굴. 검고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딜은 혀를 씹었다.

“너냐?”

“음?”

“너였냐, 로스카옌.”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오딜의 황금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번뜩였다.

***

바르셀다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어찌나 울었는지 머리가 아파 왔으나 속은 조금 후련해졌다.

아직 뻐근한 목과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으로 누운 바르셀다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로스카옌 신부님. 저는 정말 형한테만 살짝 말했는데…….”

알렉세이, 나자예프, 바르셀다.

세 형제는 아비가 각각 다른 까닭에 서로 친하지 않았다. 특히 나자예프는 당시에도 모두가 상대하지 않고 피하려 할 만큼 미쳐 날뛰는 망나니였기에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격도 성향도 다른 세 형제가 공교롭게도 여자 취향만은 똑같은 것은 어째서였을까.

“제가 형한테 말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바르셀다는 다시 끄윽, 눈물을 삼키고는 커다란 덩치를 태아처럼 동그랗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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