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해가 기울었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빽빽하게 들어찬 검은 사철나무 탓에 날이 저물었는지 아닌지 알기 어렵지만,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온 네나뷔스테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뭇가지가 아로새기는 그림자의 길이만으로 시간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언니…….”
“줄디즈, 배고프니? 조금만 기다려. 오딜 아저씨가 저녁 식사를 가져올 거야.”
평소 오딜은 사냥을 해도 날고기를 뜯어먹은 까닭에 그의 집에는 주방은커녕 마땅한 조리도구 하나 없었다.
오딜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로스카옌이 있는 서쪽 교회로 내려갔고, 네나뷔스테는 동생들과 함께 오딜의 집에 남았다.
그리고 누가 데려가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자예프도 창고에 쑤셔 넣은 짐짝처럼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날이 춥네, 네나뷔스테. 곧 겨울이 오려나 봐.”
“아직 여름인데.”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네나뷔스테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자예프는 무릎을 움켜쥐고 웅크려 앉았다.
“사비나가 없으니까…… 내 마음이 얼어붙은 것 같아. 그래. 마치 한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조용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져.”
“그럼 얼어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닥쳐 줄래?”
“사비나, 보고 싶어…….”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는 그녀에게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아 이곳에 남기로 한 것이 실수였을까.
나자예프는 때늦은 후회를 속으로 삼키며 구시렁거렸다.
“이게 다 네나뷔스테, 네가 사비나를 쫓아내서 그래.”
“뭐래, 이 멍청이가.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나는 사비나에게 첫눈에 반했단 말이야.”
“얼씨구?”
“사비나는 아름다워. 처음 봤을 때, 난 올가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닮은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있다니…….”
네나뷔스테가 나자에프의 머리를 후려치며 말을 끊었다.
“나자예프, 눈이 안 보인다고 정신도 같이 날아갔어? 그 여자가 무슨 올가 언니를 닮아! 차라리 로스카옌을 닮으면 닮았지!”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사비나는 귀족인 만큼 올가보다 조금 더 고상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이목구비나 전체적인 인상은 확실히 나자예프의 첫사랑인 올가를 닮았다.
“네나뷔스테, 너야말로 기억이 어떻게 된 거 아냐? 갑자기 로스카옌이 왜 튀어나와!”
“로스카옌도 원래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잖아? 그 여자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고.”
“지금 장난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얼마나 흔한데 겨우 그런 걸로……!”
“누가 있는데?”
나자예프의 말을 자르며 네나뷔스테가 되물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로스카옌 말고 또 누가 있는데?”
“어, 어?”
“대답해 봐, 나자예프.”
네나뷔스테의 지적에 나자예프는 당황했다. 검은 머리도 분명 흔하고, 검은 눈동자도 분명 흔한데.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떠올리려 하니 기억나는 얼굴이 없었다.
“것 봐. 로스카옌밖에 없지? 그놈이랑 한패가 분명해.”
“하지만 사비나는 외부인이잖아. 우리 마을이 얼마나 작은데, 수도만 해도 인구가 수십 배는 될걸? 겨우 그걸 가지고…….”
“분위기도 닮았지. 음침하고 속에 꿍꿍이를 숨기고 있으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첫, 들키지 않은 척 뻗대는 게.”
“네나뷔스테, 사비나를 모함하지 마!”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신경 긁을 거면 저리 꺼져, 나자예프!”
네나뷔스테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가격하자, 나자예프는 떫은 소리를 내며 옆으로 고꾸라졌다가 도로 일어났다.
“너무하네, 정말! 내 눈이 안 보인다고 이러기야?”
“난 네가 눈을 감고 다니기 전부터 이랬는데. 우도가 없어서 머리를 날려 버리지는 못하겠네.”
“나, 나는 부상자란 말이야! 저주의 반동으로 눈도 잃어서, 언제 뇌가 아래로 흘러내려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인데, 넌 동정심도 안 들어?”
“두 눈깔 다 제대로 박혀 있는데 무슨 헛소리야?”
“뭐? 정말로? ……아윽!”
나자예프는 무심결에 눈을 떴다가, 다시금 눈이 시리게 아파 와 도로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계속 눈이 시큰거렸다.
‘눈알이 없다면 시큰거릴 리가 없지 않나?’
그럼 눈알이 전부 녹아 흘러내린 건 아닌 걸까. 나자예프는 감은 눈꺼풀 위로 슬며시 손등을 갖다 대었다. 아주 약간 누른 것만으로 또다시 눈동자가 시리며 귀 안쪽이 따끔따끔했지만, 나자예프는 그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해 눈두덩 안쪽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둥그런 감촉과 함께, 안에서 눈알이 굴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느껴지네…… 그럼 눈동자만 녹아 없어진 건가?”
“아까 눈깔 부라릴 때 보니까 빨갛게 보이던데.”
“빨갛게? 아, 그렇구나. 보호각인이 사라졌으니까…… 그건 그렇고, 네나뷔스테. 말 좀 곱게 해! 눈깔이 뭐야? 눈깔이! 눈알도 아니고!”
“나한테 있는 게 눈알이지. 너한테 박힌 건 눈깔이고.”
“너 정말…… 내가 너보다 4살이나 많은데,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 연상 대우를 받고 싶다? 아저씨라고 불러 줘? 나자예프 아저씨!”
“아니, 그거 말고!”
네나뷔스테는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는 나자예프를 걷어찬 뒤, 제 동생들을 끌어안았다.
“아이베크, 자니베크. 너희는 나자예프 아저씨처럼 되면 안 돼. 저 나이 먹도록 저렇게 살면 인생 헛사는 거야.”
“아저씨라고 하지 마!”
“어디서 큰소리야, 이 쓰레기가!”
네나뷔스테에게 정강이를 제대로 맞은 나자에프는 유리를 긁는 듯한 이상한 비음을 내지르더니 한쪽 다리를 안고 껑충껑충 뛰어 문밖으로 피하려다 문턱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저것 보렴. 저 나이 되도록 할 줄 아는 게 나자빠지는 것밖에 없지. 너희는 절대로 닮으면 안 된다?”
“내 욕 그만하고 나 좀 일으켜 줘!”
로스카옌을 욕하기는 했으나, 그는 역시 사제다운 인품을 지닌 자였음을 나자예프는 뒤늦게 깨달았다.
입도 험하고 손도 거친 오딜 또한 마을의 호위대장으로서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이들을 돌보는 인정 많은 성격이었음을 깨닫고 속으로 후회했다.
왜냐하면, 네나뷔스테는 나자예프의 발버둥이 꼴 보기 싫다는 듯 엎어진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차서 굴려 내보낸 후에 문을 쾅!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로스카옌은 손은 밟을지언정 내쫓지는 않았고, 오딜은 욕은 할지언정 버려 두지는 않았는데.’
로스카옌과 오딜이 나자예프를 얼마나 측은하게 여기고 인정을 베풀어 주었는지, 네나뷔스테에게 매몰차게 쫓겨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하는 후회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자예프는 낙엽 위를 구르다가 발라당 드러누웠다.
아무리 밖에서 곡소리를 해 봤자 네나뷔스테는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신발에 이어 그릇이나 연장이 날아오지 않으면 다행일까.
“오딜. 빨리 와…….”
나자예프는 자신이 싸늘한 밤바람을 그대로 맞고 얼어 죽기 전에 오딜이 돌아와서 그를 발견해 주길 바랐다. 기왕이면 잔소리는 조금만 하고 얼른 그를 둘러업어 안락한 침대 위로 옮겨 주면 더 좋겠다는 허황된 바람을 지닌 채 눈을 감았다.
***
“로스카옌, 있나?”
토끼 두 마리와 새끼멧돼지를 잡아 온 오딜은 죽은 짐승을 주방에 대충 던져 넣고, 교회로 들어와 로스카옌을 찾았다.
그러나 교회 주위에도, 미사실 안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이런. 나 혼자서는 요리를 할 수가 없는데…….”
자신이야 날고기를 뜯어먹어도 되고, 나자예프한테야 먹다 남은 살점이 붙은 뼛조각만 물려 줘도 된다지만, 네나뷔스테와 그녀의 어린 동생들에게는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이고 싶었던 오딜은 로스카옌을 찾아 교회 안을 돌아다녔다.
고해실과 기도실까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오딜은 복도 끝에 위치한 로스카옌의 방문을 열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잠이 덜 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르셀다의 목소리였다.
‘이크. 여긴 바르셀다가 쉬고 있었지, 참.’
원래도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창문을 가려 둔 탓에 한층 더 어두워, 바르셀다는 방에 들어온 사람의 인상착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제가 누워 있는 이곳을 찾는 사람은 로스카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그는 평소보다 조금 커다랗게 보이는 인영을 보고도 당연히 로스카옌이라고 판단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목이 말라요. 물 좀…….”
자신은 로스카옌이 아니며, 로스카옌을 불러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오딜이 말하려던 찰나, 바르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르셀다는 아직 환자였다. 상황 설명을 하는 것보다 시중을 드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오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협탁에 놓인 물주전자가 보였으나 물을 담을 잔은 없었다.
“신부님, 물…….”
바르셀다가 한 번 더 보채자, 오딜은 더 찾는 것을 포기하고 주전자의 뚜껑을 열고는 그곳에 물을 따라 바르셀다에게 건넸다.
기우뚱. 바르셀다가 오른쪽 어깨만 일으켜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 자세로 입을 벌리자 오딜은 주전자 뚜껑을 바르셀다의 입에 가져다 대주었다.
‘상처는 다 나은 건가? 내가 이마를 벽돌로 내리찧었는데 흉은 안 진 모양이군.’
마시기 불편할 텐데도 제법 목이 탔는지, 바르셀다는 입을 떼지 않고 꿀꺽꿀꺽 물을 전부 마셨다. 오딜이 빈 뚜껑에 다시 물을 부어 주자, 바르셀다는 그것을 전부 마셨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반복한 후에야 바르셀다가 후우, 한숨을 내쉬고는 도로 누웠다.
오딜은 주전자 뚜껑을 덮고 협탁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섬세한 일은 젬병이지만 바르셀다는 환자였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바르셀다가 잠들 때까지는 옆에 있어야겠다고 판단한 오딜은 침대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옆에 있어 주시네요.”
“…….”
목소리에 약간의 의아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것을 보니, 평소 로스카옌은 바르셀다의 상태가 호전되면 바로 자리를 떴던 모양이다. 바르셀다는 조금 침착해진 음성으로 어둠 속의 인영을 향해 물었다.
“형은 아직도 안 돌아왔죠?”
나자예프를 말하는 건가?
오딜은 뭔가 말을 해야 하나 망설였다. 동생을 제물로 삼은 형이니, 나자예프의 이야기를 들어서 바르셀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말을 걸어오는데 말없이 자리를 뜨기도 영 마뜩잖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갑자기 자신이 로스카옌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바르셀다가 깜짝 놀랄 것 같았다.
바르셀다가 기억하는 오딜의 마지막 모습은 그를 위협하는 모습이었을 테니, 갑자기 겁을 먹거나 반대로 공격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어쩐다…….’
오딜이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바르셀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뒤척여 옆으로 누웠다. 오딜과 마주하고 대화하려는 듯이.
“로스카옌 신부님. 죄를 고백하고 싶어요.”
고해성사를 하겠다는 소리다. 그건 사제가 아닌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오딜이 로스카옌을 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리를 피한다고 여겼는지 바르셀다가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제발요, 저는 몰랐어요!”
필사적인 외침에 주박이 걸린 듯, 오딜의 걸음이 멈추었다. 바르셀다는 몸을 뒤집어, 오딜을 향해 애타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어요. 두 분이 그런 관계인 줄 몰랐어요. 그냥 올가 누나가, 로스카옌 신부님과 함께 있는 걸 보고 놀래켜 주려고 숨었는데,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