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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76화 (76/189)

76화

에르잔이 기사양성 훈련소에 입소한 것은 기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서도, 황실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서도, 제힘으로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곳이라면 자신을 받아 줄 것 같아서, 자신이 있어도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상급생도 나가떨어지는 고된 훈련에 에르잔은 곧잘 적응했다. 체격만 좋은 게 아니라 감도 남다른지, 교관이 한 번 시범을 보이기만 하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본래 인내하는 일에 익숙한 에르잔은 반복 훈련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배운 대로 검을 휘두르고 체력을 단련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비한다면 훈련은 도리어 생각할 필요가 없어 편했다.

훈련생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숙소나 연무장만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교관들의 방과 휴게실도 청소하고 빨랫감까지 도맡아 세탁해야 했다. 그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따금 잔심부름도 해야 했다. 때로는 일도 없이 불러다 놓고 괜히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감내해야 했다.

다른 훈련생들과는 달리, 에르잔에게는 그것이 딱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기사 교육은 체력단련뿐 아니라 지식과 이론의 습득도 병행하는 것이었지만, 에르잔은 여전히 불만이 없었다.

<내가 양말이나 세탁하려고 훈련소에 들어온 게 아닌데.>

<교관한테 차를 타서 가져다주는 게 기사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툭하면 훈련생을 불러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 욕하는 교관들이 기사도를 말하는 게 우습다.>

불평불만이 가득한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에르잔은 그들에게 공감하지 못했으므로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했다.

교관들은 에르잔의 능력을 넘어선 요구는 하지 않았고, 기사도에 반하는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에르잔에게 민간인을 폭행하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훔쳐 오라고 지시했으면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소와 정리정돈을 하고, 깨끗하게 빨래를 하고, 맛과 영양의 균형이 잡힌 요리를 하는 것은 에르잔이 생각하기에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에르잔은 교관들이 차 심부름을 시켜도 모욕감을 느끼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다른 동기들처럼 일부러 차에 침을 뱉거나 걸레로 찻잔을 닦아 가져가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세워 놓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욕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르잔을 보고 너는 왜 그렇게 몸이 크냐며 말도 안 되는 인신공격을 해 대도 그러려니 했다. 실제로 고아원에서는 에르잔의 체구가 커서 다른 아이들의 자리가 그만큼 비좁아졌기 때문에 몸이 크다고 잔소리를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가정에서 자라온 소년들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견디지 못할 일들이, 공교롭게도 에르잔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에르잔은 성실하게 훈련을 받고, 군소리 없이 교관들의 수발을 들었으며,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불려가 잔소리를 듣고 벌을 받아도 꿋꿋하게 감내했다.

본래도 인내심이 강했던 에르잔은 교관들의 말도 안 되는 횡포와 갑질을 견뎌 내면서 더욱 참을성이 강해졌다. 남다른 힘과 감각에 더불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무장한 에르잔이 훈련소에서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것에 이어 황실 수비대 입단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실 수비대에 입단한 이후, 에르잔은 새로운 장벽에 부딪혔다.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어. 에르잔, 자네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네.>

무엇이 부적합인지 알 수 없었다. 에르잔은 배속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퇴소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입단한 동료들이 하나둘 배속을 받아 떠날 동안 에르잔은 그들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대기실에서 정물처럼 서 있는 것이 에르잔의 일과였다.

온종일 서 있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성문을 사수하는 수비대는 출입자가 없는 한 미동도 없이 서 있어야 했으니까.

이야기할 동료가 없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근무 중 사담은 당연히 금지이므로.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 바로 나설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대기하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면 아주 사소한 위협에도 곧장 반응할 만큼 긴장감을 유지해도 피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종일 긴장을 유지한 채 묵묵히 서 있어도, 에르잔을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에르잔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검을 찬 채로 대기실에 서 있기를 반복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면서.

저 문은 언제 열릴까.

과연 열리기는 할까.

그것은 에르잔이 훈련소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마주한 막막함이었다. 고아원에서 나가 살길을 모색할 때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조차도 없다.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소란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에르잔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을 기다리며 마냥 서 있어야 했다.

차라리 언제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1년이든 10년이든 에르잔은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 튼튼한 에르잔의 정신력을 좀먹기 시작했다.

만약 끝까지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배속을 받지 못했으니 탈단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에르잔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차라리 퇴소 명령이라도 떨어졌더라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겠지만, 에르잔에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 해도 막막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에르잔의 앞에 나타난 것이 콘바야젠 백작이었다.

<우리 가문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가씨가 있어. 자네가 그 아가씨의 호위를 맡아 주었으면 해.>

첫 명령이었다.

황실 수비대의 기사가 수행하기에는 수상쩍은 명령이었으나 콘바야젠 백작은 황제의 대리인이었으므로 에르잔에게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빛을 보았다.

첫 임무라서 설레거나 들뜨는 마음은 없었다. 도리어 이제야 자신에게 역할이 주어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에르잔 무스코바예프입니다,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는 에르잔보다 한참 작고 가녀렸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고, 혹 제 체구가 커서 위압감을 느끼나 싶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는 곧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끌어 내려 얼굴을 가렸다.

눈이 마주친 것은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에르잔은 그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자신이 내민 손에 희고 고운 손이 얹어지는 순간, 가슴 속이 따스한 무언가로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도 역할이 생겼다.

그녀의 곁이라는, ‘있을 자리’가 생겼다.

이제 더는 막막하지 않았다.

사비나가 명령을 하면 그대로 따르면 된다. 명령을 하지 않으면 명령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

역할이 정해진 것만으로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만 같았던 에르잔의 마음은 단숨에 안정되었다.

사비나의 곁에서 그녀를 지킨다.

에르잔의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된 그 목표 하나가 그의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에르잔이 존재하는 의미가 되었다.

사비나의 곁에 있을 때 에르잔은 비로소 존재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 그녀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

심장이 멈추고 숨이 끊어져,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

“읏, 아…….”

섞이는 호흡이 뜨거웠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어깨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도리어 제 몸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키스가 처음도 아닌데 여전히 손을 떠는 것은 한심하지만, 그 떨리는 손으로 등을 쓰다듬었을 때 사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더…….”

섬은 사철나무가 우거진 숲에서는 하늘의 빛깔이 보이지 않는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어둠 속에서 두 남녀는 시각이 아닌 청각과 촉각에 의지하여 서로를 확인했다.

에르잔의 목 뒤에 둘려 있던 사비나의 팔이 풀리더니, 그대로 어깨를 타고 내려와 단단한 가슴을 쓰다듬었다. 심장의 고동을 확인하듯, 작은 주먹이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가 다시 손바닥으로 매만지기를 반복했다.

“아가씨, 잠시…….”

그녀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생리적인 반응만은 제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사비나가 만져 줄 때마다 자꾸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에르잔은 키스를 멈추고 그 열기를 밖으로 토해 내며 허리를 뒤로 뺐다.

그러나 사비나는 도리어 그에게 바짝 몸을 붙여오며 집요하게 에르잔의 몸을 더듬었다.

그녀의 아랫배에 육중한 무언가가 치달았을 때, 사비나의 손은 에르잔이 허리를 뒤로 빼는 것보다 빠르게 움직여 그것을 쥐었다.

“아, 아가씨……!”

“에르잔, 이거…… 나 때문에 그런 건가요?”

옷 너머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발기한 성기를 더듬으며, 사비나는 아침에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아침과는 확연히 달랐다. 의문이 아닌, 기대감에 들뜬 표정이었다.

“나 때문이죠?”

사비나가 다시금 물어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요염하게 빛났다.

낮을 집어삼키는 밤의 어둠이 이런 것일까. 에르잔은 홀린 듯 대답했다.

“예. 아가씨께서 이렇게 만드신 겁니다.”

스스로 대답해 놓고도 뭐 이런 변명 같은 말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한심한 대답인데도, 사비나는 에르잔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달콤한 향기가 가까워진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진득하게 달라붙으며 그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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