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아가씨. 네나뷔스테의 말은 신경쓸 거 없어. 서쪽은 북쪽보다 위험하니까, 우선 북쪽으로 가.”
“아니에요. 네나뷔스테의 말대로 할게요.”
“것 참, 내가 같이 북쪽에 가겠다니까.”
“오딜은 네나뷔스테의 곁에 있어 주세요.”
사비나를 따라오려는 오딜을 만류하고, 그녀는 에르잔과 함께 오딜의 집을 나섰다. 오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사비나, 조심해.”
나자에프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오딜의 옆에 눌러앉기로 결심했는지 푹 주저앉아 사비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는 앞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바라보는 방향이 전혀 엉뚱한 곳이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사박사박. 나뭇잎을 밟는 두 개의 발소리만이 어두운 숲을 메웠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수풀을 헤치고 나가는 사비나를 다급하게 부른 건 에르잔이었다.
“사비나 아가씨, 정말로 서쪽부터 가실 겁니까?”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서쪽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선 로스카옌 신부님께…….”
“나는 알아요. 한 번 만났거든요.”
“만났다고요? 아페티트라는 자를?”
사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딜의 말로는 북쪽보다 위험한 게 서쪽이라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주군이 서쪽의 핵을 품은 자를 만났다니.
주군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다는 사실에 에르잔이 얼른 사비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려 주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곧바로 서쪽으로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제가 먼저 정찰을 다녀오겠습니다.”
“에르잔은 아페티트를 본 적도 없잖아요.”
“그러니 먼저 정찰을 다녀오겠습니다. 그 아페티트라는 자가 바르셀다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확신이 들면, 아가씨를 북쪽으로 모실 겁니다.”
“그러면 더 위험해져요.”
“예?”
네나뷔스테는 사비나를 시험해 보려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의 제안이야말로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돌파구였다.
만약 사비나가 북쪽의 핵을 먼저 흡수한 후에 아페티트와 마주한다면, 그의 핵을 흡수한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아페티트가 나보다 강력한 저주의 화신이라면, 핵을 최대한 많이 보유하는 편이 맞서기 편하겠지만…….’
아버지라면 사비나가 아페티트의 정체를 알았을 때, 무슨 수를 쓰려 할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아페티트에게 세 개의 핵을 빼앗기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성공하더라도 반동으로 사비나가 이지를 잃고 모든 것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존재가 되어도 문제였다.
‘두 개의 핵을 흡수한 지금이 적격이야. 최악은 피할 수 있으니까.’
만약 그녀의 아버지가 네 개의 핵이 모였을 때를 가정해 어떤 대비책을 세워 두었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지금이라면 아페티트에게 핵을 빼앗기더라도 네 개의 핵이 모두 모이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고, 반대로 그의 핵을 흡수하는 데 성공하면 이후의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네나뷔스테는 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오히려 잘 됐어. 나 혼자서는 떠올리지 못했을 계책이야.’
성공해도, 실패해도 최악은 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사비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에르잔.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올 거죠?”
“물론입니다.”
“내 명령을 듣겠다고 해 놓고서는.”
“……곁을 떠나라는 명령은, 아가씨를 지키라는 명령에 상충합니다. 그러니 떠날 수 없습니다.”
“나보다는 아버지의 명령이 우선이라는 거네요?”
사비나의 질문에 에르잔의 말문이 막혔다. 사비나는 가만히 에르잔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마치 햇살을 한몸에 받아 내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던 남자가, 지금은 조금도 어색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에르잔. 나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했잖아요. 나 같은 사람을 섬기면 안 돼요.”
“……속이셔도 됩니다.”
나직이 내뱉은 말은 평소와는 달리 묵직하게 울렸다. 사비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에르잔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다시금 확실히 말했다.
“아가씨께서 저를 속이시면, 속겠습니다. 몇 번이라도 속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믿을 겁니다.”
사비나가 에르잔을 속인다면, 속아 주면 된다.
그리고 다시 믿으면 된다.
그녀에게 더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주면 된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요령이 없어서,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밖에 믿음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
“몇 번이고 시험하셔도 됩니다. 아가씨께서 안심하실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늪에 빠져 죽어가는 이에게 드리워진 구원의 밧줄. 사비나는 그 밧줄이 허상일까 두려워 만지지도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에르잔은 그 밧줄이 되어,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 줄 것이다. 더 아래로 구원의 손길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닿으면, 사비나도 더는 그것이 허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뺨에 닿는 감각조차 이성이 마비되어 일으킨 착란이라고 생각한다면, 밧줄로 사비나의 팔을 감아 그녀를 늪에서 끌어 올릴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허상이 아닙니다.”
“에르잔…….”
“믿어 달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믿음이 갈 때까지 곁에 두셨으면 합니다.”
고집스러울 만큼 우직한 말투에 사비나는 어쩐지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답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에르잔의 말에 가슴이 설다.
“에르잔.”
“예, 아가씨.”
“키스해줘요.”
예상치 못한 명령에 당황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명령을 내린 것이 무색하게도,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달려들 듯이 입을 맞추었다.
15. 서성이는 밤
에르잔 무스코바예프는 인내하는 것에 무척 익숙한 남자였다.
세 살 무렵 고아원에 들어온 그는 부모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를 수용한 고아원의 원장 부부는 인심은 후했으나 경영능력은 형편없는 이들이었다.
고아원의 경제적인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고, 원아들의 수가 이미 저택의 수용인원을 한참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원장 부부는 버려진 아이를 죽게 놔둘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아이들을 거두어들였다.
그 많은 원아들을 감당하는 것은 원장 부부의 능력 밖의 일이었으나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아니면 버려진 아이들은 그대로 굶어죽고 말았을 테니까.
아이들은 비좁은 방에 서로 부대끼며 배고픈 식사로 끼니를 때우는 것에 익숙해졌다.
더러 다툼이 일어나 서로를 때리고 욕하고 울고 보채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원장 부부가 찾아오기도 전에 나이가 찬 고참들이 어린아이들을 진정시켰다. 물론 무력을 동반한 행위였으나 그것을 비난하거나 만류하는 이는 없었다.
비좁은 고아원과, 함께 부대끼며 사는 친구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원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불편과 폭력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배고픈 식사와 불편한 잠자리를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였다.
어린아이일수록 생존에 관해서는 눈치가 빠르다. 저를 거두어들인 고아원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렸다. 모두 함께 굶주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모두 같은 처지의 아이들뿐이었으므로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에르잔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고아원의 원아들은 부족한 식사와 비좁은 잠자리 탓에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작고 무척 마른 편이었다. 그래서 또래보다 체구가 크고 힘이 좋은 에르잔에게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동년배의 원아들이 쓰는 침대는 비좁아 몸을 웅크리고 자야 했고, 하루에 두 번 주어지는 식사는 주린 배를 채우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물론 불만을 말하거나 다른 원아들의 식사를 빼앗지는 않았다.
에르잔은 제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여덟 살 무렵에 이미 열두 살 원아의 키를 훌쩍 넘어선 에르잔을 입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음에도 자신을 원하는지, 거부하는지 정도는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에르잔은 생각했다. 이대로 고아원에 계속 머무르면 원장 부부는 물론이고 다른 원아들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다.
그것은 눈치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에르잔은 본능적으로 제가 살길을 모색했다.
고아원을 나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에르잔은 체구가 크고 힘이 셌으나 그것도 비교 대상이 또래 아이들일 때의 이야기였다. 겨우 여덟 살짜리 어린애를 노동자로 고용해 주는 곳은 없었다.
에르잔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얼굴에 흉터가 난 커다란 남자가 이따금 고아원을 찾아왔다가, 원장 부부의 매몰찬 대응을 받고는 혀를 차며 나가던 것을. 분명 기사를 양성하는 훈련소의 교관이라고 했던가.
훈련소에는 본래 열다섯 이상의 소년들만 입소할 수 있었으나 5년 전에 기이한 전염병이 돌아 기사들은 물론이고 훈련소의 교관과 종자들까지 대부분 떼죽음을 당한 뒤로는 나이 제한을 없애버렸다.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나이 제한을 없앨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으니 규율은 당연히 엉망인데, 상부에서는 빨리 쓸 만한 기사를 배출해 내라고 닦달을 해 댔다.
과정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우선 결과물부터 내놓으라는 말도 안 되는 지령이 계속 내려오자 스트레스를 받은 교관들은 훈련생들에게 그 화풀이를 했고, 기사의 꿈을 안고 입소한 훈련생들은 상급자들의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훈련소를 나가버렸다.
훈련소의 교관이 고아원까지 찾아와 훈련생을 모집하는 것은 부족한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된 훈련과 모욕을 견디기 힘들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반 훈련생과는 달리, 고아원 출신은 아무리 힘들어도 돌아갈 곳이 없어 훈련소에 남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계산으로 고아원을 방문했다.
그런 속셈을 원장 부부가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매번 내쫓았으나, 에르잔은 고아원 밖 담장에 발길질을 하면서 욕을 해 대는 교관을 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저곳이라면 자신이 몸을 의탁해도 부담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