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아버지는 사비나를 이곳에 보내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말했다. 도착한 마을에 저주가 깃든 것을 보고, 사비나는 아버지가 그녀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이곳에 보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아버지가 다시 그녀를 찾을 때까지 에르잔과 마을 사람들을 피하고, 평범한 사람인 척 구석에 콕 틀어박혀 있다가(평범한 사람은 틀어박혀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비나는 몰랐다) 떠나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카림을 만나 연못을 덮은 죽음의 저주를 거두어들이고, 저주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비나는 처음으로 희망을 맛보았다.
이 마을에 깃든 저주를 전부 거두어들이면, 적어도 이 마을 사람들만은 행복해진다. 모든 저주를 흡수하고 그녀의 몸이 저주를 감당하지 못해 녹아내린다 한들 바라던 바고, 죽지 못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끌려가야 한다고 한들 자신이 사람들을 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요양>은 가치가 있었다.
에르잔이 저주 자체를 불태워 버리는 체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비나는 자신의 마지막을 에르잔에게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도 죽지 않는다면, 차라리 몸이 불에 타는 고통을 영원히 감내하며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버리면 그만이다.
정화의 불길에 타들어 가는 상태의 사비나는 아버지에게 쓸모가 없을 테니, 그러면 더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 테니까.
저주만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이 첫째.
에르잔의 정화의 힘에 사라지거나 <죽음의 화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 둘째.
사비나는 그 두 가지만을 생각하며 이제까지 달려왔다.
나자예프에게 위협을 받거나, 희롱하는 소리를 듣거나, 카밀라가 욕을 하며 도망치거나 네나뷔스테가 휘두른 우도에 베이는 것은 사소한 일이었다.
그 어떤 상처를 입어도, 그 어떤 모욕을 당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고통스럽지 않을 테니까.
사비나가 실수한 것은 딱 한 가지.
에르잔을 끌어들인 것.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자꾸만 기대고, 의지하고, 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맡기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 것.
자신의 실수는 그것뿐이라고 여겼다.
한 번 밀어낸 에르잔이 다시 돌아왔을 때, 사비나는 결심했다.
에르잔을 이용하고, 그를 이용한 죄를 나중에 갚겠노라고.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줄디즈가 찾아와 이상한 말을 건네면서, 사비나의 안에서 새로운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이제 그만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는 일이, 이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녀가 저주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또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이 저주의 균형이 깨져 모두 한꺼번에 죽어 버리는 것보다 남은 이들에게 더 괴로운 일이라면?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이미 두 개의 핵을 흡수한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게다가 줄디즈는 <괴로운 일을 겪느니 모두 함께 죽는 게 낫다>고 말했지만, 카밀라나 나자예프는 그래도 살고자 했다.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하러 갔을 때, 늘 여유롭고 장난스럽기만 했던 나자예프가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었는지 사비나는 보았다.
그때 나자예프는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을 쥐어 감추고, 턱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과장된 농담을 지껄였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서.
오히려 나자예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 더 홀가분해 보였다. 15년간 저주를 피해 온 반동이 시력을 잃는 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듯한 태도에 사비나도 걱정을 거두었다.
줄디즈처럼 모두 함께 죽기를 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카밀라나 나자에프처럼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멈출 이유는 없다.
줄디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설득하고, 희망을 보여 주고, 그들의 원망을 받아 내는 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사비나가 불러온 결과가 전혀 다른 것이라면?
‘처음부터 내가 이 마을의 저주를 흡수하고, 사람들을 구하러 뛰어다닐 걸 아버지가 예상하고 있었더라면…….’
그녀의 아버지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분명 예방책을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네 개의 저주의 핵을 모두 흡수한 뒤에도 사비나가 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아페티트에게로 저주가 옮겨가 말을 안 듣는 사비나 대신 길들이기 쉬운(아페티트의 어디가 길들이기 쉬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저주의 화신이 콘바야젠 가문의 새로운 주술사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차선, 아니, 차악의 결과였다.
그러나 최악의 결과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분노로 이성을 잃은 바르셀다처럼, 사비나의 이성이 날아가 버린다면.
겨우 삶을 되찾은 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이거나, 더욱 강력한 저주에 영원히 괴로워해야 하는 처지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스카옌 신부님이 우리에게 떠나라고 했던 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네나뷔스테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다.
사비나가 보기에, 로스카옌은 비록 저주에 익숙할지언정 저주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어쩌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죽음의 화신인 그녀는 인간의 살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네나뷔스테가 살인을 결심했을 때 눈빛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도 그래서였다.
로스카옌의 눈빛에는 살의가 없다. 그저 번민과 혼돈과 죄책감뿐이다.
그러니 로스카옌이 군인들을 죽였다는 것은 네나뷔스테의 오해일 것이다. 착각했거나, 헛것을 보았거나, 혹은 증오를 발산하기 위해 없는 기억을 조작해 내거나.
다만 한 가지.
로스카옌이 카밀라나 나자에프처럼 ‘살고 싶어하는 자’가 아니라, 줄디즈처럼 ‘죽고 싶어하는 자’라면.
사비나와 에르잔에게 마을에서 도망치라던 것이, 그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한 말이었다면.
사비나가 다시 찾아와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담담하게 수긍한 것이 줄디즈처럼 ‘모두 함께 죽는 결말이 낫다’고 생각해서였다면.
사비나가 하는 일은 그들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일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안감이 시각을 망가뜨린 것처럼 시야가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진 풍경 안에서도 사비나를 쏘아보는 네나뷔스테의 자주색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다.
“네나뷔스테. 그럼 당신은 내가 어쩌길 바라는 거죠?”
“꺼지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는 이미 두 개의 핵을 품고 있어요. 네나뷔스테도 증오의 핵을 품어 봤으니 알죠? 지금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라는 거.”
사비나가 도망치면 균형은 반드시 무너진다.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저주를 해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화하는 것이다. 균형이 무너지면 최초로 저주를 건 술자마저 그 주술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사비나가 도망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그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의 결과가 무엇인가다.
사비나가 도망치지 않고 저주를 모두 흡수한 경우에도,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면.
그러면 사비나는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줄디즈가 경고한 것처럼, 사비나도 이 마을의 시간이 멈춘 일원으로서 영원히 종속되어 살게 될 것이다.
“당신이 로스카옌 신부님을 의심하는 건 알겠어요. 나나 에르잔을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고요.”
“네 이해 따위 바란 적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결정해 주세요. 내가 어쩌길 바라는지. 이대로 도망쳐서, 모두가 죽는 결과를 바라나요?”
“사비나. 그건 안 될 말이지!”
뒤에서 나자에프가 펄쩍 뛰었으나, 사비나의 일그러진 시야에는 네나뷔스테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은 죽음을 택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 동생과는 달리.”
네나뷔스테의 뒤에 있던 줄디즈는 움찔거리며 다시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숨었다.
증오의 핵을 품고 불안과 고통으로 미쳐 버린 상황에서도, 네나뷔스테는 동생들을 지키려 했다. 비록 비좁은 관에 감금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학대를 계속해 왔지만, 그건 당시의 네나뷔스테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생을 지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네나뷔스테는 동생들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도 죽어서는 안 된다.
지키고 싶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하거나 그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비나는 네나뷔스테가 로스카옌을 의심하는 것 또한 그런 사고의 연장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도망치면 당신들은 모두 죽어요. 그것만은 분명해요. 하지만 내가 네 개의 저주의 핵을 전부 흡수하면…….”
가능성은 두 가지.
저주가 풀리거나, 더욱 심해져 모두 죽거나.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가 계속 이 마을에 남아 있기를 바라나요?”
“그래 주면 고맙지, 사비나. 나는 완전 환영이야!”
뒤에서 나자예프가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사비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일그러진 시야에서 오로지 자주색 눈동자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해. 싫어.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럼…….”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아.”
그 말에 일그러졌던 시야가 천천히 되돌아왔다. 처음은 동그란 눈동자가, 그다음에는 선이 반듯한 얼굴이, 커다란 키가, 헝클어진 백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사비나보다 반 뼘이 큰 네나뷔스테는 제 동생들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사비나에게 말했다.
“아페티트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핵을 네가 흡수해.”
단, 이라고 조건을 붙이면서.
“오딜 아저씨를 끌어들이지 마. 네 힘만으로 해결해.”
“제힘만으로요?”
“나는 아직 너희들을 못 믿어. 이 마을 사람들을 방패로 내세우는 건 용서 못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할 거야.”
“…….”
“나자예프를 데려가는 건 허락해 줄게. 저건 쓰레기니까.”
선심 쓰듯 툭 내던진 한마디에 나자예프의 자존감이 반으로 쩍 갈라졌으나 그 자리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네나뷔스테. 서쪽은 위험해.”
“북쪽은 생존자가 많아. 이 여자의 뭘 믿고 그 사람들을 맡기겠다는 거야? 게다가 오딜 아저씨, 북쪽에는 안 갈 거잖아? 올가 언니가 죽은 곳이니까.”
네나뷔스테의 정확한 지적에 오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금 사비나와 에르잔을 가리켰다.
“너와 네 호위, 둘 중 하나가 악마가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