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기겁하는 오딜과 자기가 방금 헛소리를 들었나 싶은 표정의 나자예프와는 달리, 네나뷔스테의 말을 듣는 순간 사비나는 심장에 뭔가 쿡 날아와 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네나뷔스테의 눈은 사비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핏 보면 과장스럽게 비웃는 표정인데, 사비나의 눈에는 꼭 절규하는 얼굴로 보였다.
“로스카옌은 마을에서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하는 거라고! 그놈은 이 마을에서 못 벗어나. 평생 그 교회에서 늙어 죽을 운명이야!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간 거지. 그러니까 저 여자를 불러들인 거야. 저주를 깨서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면, 그때는 자기가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굳어 있는 사비나 대신 에르잔이 나섰다. 네나뷔스테를 상처 입힌 그로서는 마주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으나,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과 그녀가 잘못된 편견으로 로스카옌을 모함하고 제 주인에게 날을 세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에르잔이 앞으로 나서자 네나뷔스테는 주춤거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났지만, 피하거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역시 너희들, 로스카옌과 한패였구나?”
“뭐라고요?”
“정말로 처음 만난 사이라면, 이렇게 로스카옌을 두둔할 리가 없잖아? 우리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세월을 견뎌 냈는지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로스카옌 편을 드는데?”
“당신들을 제외한 마을의 생존자들은 로스카옌 신부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로스카옌을 의심하는 사람은 다 죽었거든. 아니, 죽였거든.”
“여기 있는 오딜은 물론이고 저 불한당까지 돌봐주시는 분을 근거 없이 모함하는 건 당신 아닙니까?”
에르잔의 물음에 네나뷔스테가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불한당이 아니라 하다못해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나자예프의 항의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먹혀 버렸다.
네나뷔스테는 눈을 감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 위를 손톱으로 할퀴면서, 마치 더러운 것을 떼어 내듯 진저리쳤다.
“근거? 당연히 있지. 저 여자랑 똑같으니까.”
네나뷔스테가 사비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저주를 흡수해서 마을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네나뷔스테. 나는…….”
“너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를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네나뷔스테?”
“너,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거지?”
정곡을 찔린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어찔한 기분이 들었으나, 몸이 뻣뻣하게 굳었던 까닭에 넘어지거나 휘청거리진 않았다.
“너는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는지 몰라도, 나는 알아. 증오의 핵을 품어 봤으니까. 아마 바르셀다도 알걸?”
증오의 핵을 품고 있는 내내 네나뷔스테는 온 신경이 예민해져서,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등 뒤에 누군가 숨죽이고 있다가 달려들 것 같고, 뛰어서 도망치면 발이 느린 제 동생들을 습격할 것 같아 미칠 것 같았다.
나무판자로 만든, 어린아이 한 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관을 짜고 쇠사슬로 칭칭 감은 뒤에 동생들의 안부를 물으며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질려서 외워 버릴 만큼 확인한 뒤에야 피곤에 절어 잠이 들었다.
몇 주. 아니, 몇 달일까.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칼을 겨누며 위협하자 겨우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네나뷔스테는 잠에서 깨어나면 남쪽 구역을 전부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누군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자신과 동생들을 노리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확인을 하고서도, 돌아서면 뒤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다시 뒤돌아봐 확인을 해야 했다.
네나뷔스테는 그 불안감이 지긋지긋했다. 그녀가 증오하는 건 어딘가에 숨어 있는 미지의 적도 아니고, 교회에 있는 로스카옌도 아니고, 손도끼를 휘두르면서 돌아다니는 불한당 나자예프도 아니다.
네나뷔스테가 가장 증오했던 것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 불안감이었다.
그런데 우물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을 때, 네나뷔스테는 처음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닫힌 창고의 문을 열고, 찌그러진 옷장의 문을 열고, 수풀 사이를 헤집고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뒤를 살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진짜 공포감이 엄습했다.
늘 그녀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뭔가 있을지도 몰라>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 있다>는 확신이었다.
우물이 시체로 빼곡하게 메워져, 뚜껑을 덮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 지 15년이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서는 안 되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그때 네나뷔스테가 느꼈던 공포감은, 15년 전 처음 불벼락을 맞았을 때와 견줄 만했다.
꼭 누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는 얼른 달려가서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누가 있다는 확신이 드니, 두려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네나뷔스테는 우물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가까이 가는 순간 뚜껑이 열리고 튀어나온 무언가가 자신을 잡고 그 아래로 끌어들일 것 같았다. 그래서 긴 장대로 도르래에 감긴 두레박을 끌어당겼다.
끼기긱. 끼익.
바깥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방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어지간한 적은 포기하고 돌아갈 테니까.
그런데 우물 벽을 타고 오르던 소름 끼치는 인기척은 그녀가 아무리 도르래의 끈이 끊어지도록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도 멈추는 일 없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만 했다.
그리고 밖에서 치우지 않는 한 결코 들려서는 안 되는 우물의 뚜껑이 열리고, 악마가 튀어나왔다.
아니. 악마?
그런 상상 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우물에서 걸어 나온 여인을 보는 순간 네나뷔스테가 품고 있던 <증오의 핵>이 크게 날뛰었다.
증오의 핵은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저것은 적이 아니다.
귀신이나 유령도 아니다.
물론 사람도 아니다.
저것은 <죽음>이다.
네나뷔스테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손톱자국이 가득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증오의 핵은 이미 그녀로부터 빠져나갔는데도, 공포감은 가시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다.
15년 전 그날의 사건은 곧 다시 일어날 거라고.
저 여자에 의해서.
“저 여자는 로스카옌이랑 똑같아.”
“네나뷔스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로스카옌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은 평화로웠잖아? 그런데 오고 나서부터 마을이 소란해졌지. 이상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그런데도 마을을 망치는 원인이 로스카옌이라는 걸 몰랐어.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그러니까 그 군인들은 로스카옌이 부른 게 아니라는데도!”
“오딜 아저씨는 도망쳤으니까, 그 광경을 못 봤으니까 믿을 수 있는 거야. 나는 똑똑히 봤어.”
“뭐를?”
“군인들을 데려온 그 남자가 로스카옌을 끌고 교회로 들어갔거든. 그리고 나올 때는 혼자였어.”
네나뷔스테는 그 남자가 로스카옌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에서 군인들이 로스카옌을 해치고, 그 시체를 갈가리 찢거나 제단에 피를 뿌리는 등 성전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증오의 핵을 품은 네나뷔스테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들 수도 없었다.
물론 죽을 수도 없었다.
동생들이 숨어 있는 수풀 쪽도 살피지 못하고, 네나뷔스테는 남쪽을 가르는 울타리 너머에 엎어져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하고 교회의 문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아야 했다.
군인들이 로스카옌을 죽이고 나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고.
그래야 적어도 제 동생들만이라도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군인들은 나오지 않았다.
교회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을을 불태우던 붉은 화염이 꺼지고, 저주가 엉겨 붙은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괴로움에 흐느낄 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난 후에야 교회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걸어 나온 것은 온몸에 피를 묻힌 군인들이 아니라, 깨끗한 법복을 차려입고 법모를 쓴 로스카옌이었다.
“군인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갔는데, 그 남자 말고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나올 때는 로스카옌 혼자였어. 그 안에서 군인들이 사라졌어.”
네나뷔스테는 사흘 밤 사흘 낮을 잠도 자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교회의 문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들어갔던 군인들은 사라지고, 군인들에 의해 죽었어야 할 로스카옌은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나와, 저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데려와 치료하기 시작했다.
네나뷔스테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한패가 아니라면, 그게 가능하겠어?”
“네나뷔스테. 너무 긴장해서 깜박 기절했던 거 아냐? 아니면 저주 때문에 헛것을 보았거나…….”
“그때까지는 움직일 수가 없었어.”
“뭐?”
“저주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며 로스카옌이 다가오는 순간, 몸이 움직여서 일어날 수 있었지.”
그때 네나뷔스테는 확신했다.
로스카옌이 네 개의 핵을 묶어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마을에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라고.
“저주를 없앨 수 있다면 없앴겠지. 균형을 맞추거나, 흡수하는 게 아니라.”
“…….”
“너는 흡수한 저주로 이번에는 또 누구를 저주할 셈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 셈이냐고!”
네나뷔스테의 질문에 사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의 화신이면서 네 개의 핵을 한 몸에 품은 그녀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까.
‘아버지가…… 이것을 노리고, 나를 보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