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72화 (72/189)

72화

“지금 그거……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사비나가 오딜을 올려다보자, 그는 의외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한 눈으로 사비나를 마주했다.

예전처럼 경계하는 눈빛은 아니다. 그렇다고 신뢰하는 눈빛도 아니고.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오딜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 그리고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보며 여동생인 올가를 떠올리는 걸까? 오딜의 눈빛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읽어 내기에, 사비나는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마을이 이렇게 되면서, 네나뷔스테는 아무도 못 믿게 되었어. 의지할 어른 없이 동생들까지 지켜야 하는 상황이니 많이 궁지에 몰려 있을 거야.”

“오딜이 돌보고 있잖아요.”

“그거야 지금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고. 나는 원래 누구 돌보는 일은 영 젬병이야. 애들은 특히나 더.”

오딜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갈라진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에르잔 앞에서는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잔소리를 해 댔으면서, 사비나 앞에서는 나름대로 말을 고르고 골라 하는 건지,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오딜?”

“그, 아무래도 나이도 비슷하고, 여자끼리니까 대화가 좀 통하지 않겠나?”

“네?”

“다른 녀석들이야 별 교류는 없어도 로스카옌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네나뷔스테는 로스카옌을 믿지 않거든. 아가씨가 잘 달래서…… 마음을 좀 풀어 주면 좋겠어.”

겉보기는 그럴지 몰라도 시간이 멈춰 있던 15년을 계산하면 네나뷔스테는 사비나보다 꽤 나이가 많다. 게다가 카밀라라면 모를까, 사비나는 또래 친구는 물론이고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해 본 경험부터가 손에 꼽혔다.

그런 사비나가 네나뷔스테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수상한 외지인이라며 보자마자 칼을 겨누고, 몸싸움까지 벌인 사이인데.

“저보다는 카밀라 쪽이 낫지 않을까요?”

“카밀라는 시끄러워서 안 돼. 네나뷔스테는 저래 보여도 낯가림이 심하거든. 그리고…….”

오딜은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가, 뒷목을 쓸었다가 말을 고민하는 것 같더니, 조금 한탄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아가씨가 우리 마을의 저주를 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오해받고 미움받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

“…….”

“아니, 나도 아직 아가씨 말을 다 믿는 건 아닌데…… 그래도 어쨌든 한번 사선을 같이 넘어 보니까, 좀 와닿는 게 있더라고.”

“그게 어떤 건데요?”

“……그, 아무튼 나머지는 가면서 이야기하지. 애들도 슬슬 다 깨어났을 거야.”

외지인인 사비나에게 속내를 내보인 게 민망했는지, 오딜은 서둘러 몸을 돌려 숲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딜은 키가 크진 않아도 몸이 단단해서 가만히 서 있어도 제법 위압감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의 뒷모습이 왠지 작아 보였다. 아니, 처량해 보인다고 할까.

‘오딜도 나와 같구나.’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고 선의를 베푸는 것은 죄를 회개해서가 아니다. 죄책감을 잊기 위한 발버둥에 가깝다. 저주로 괴로워하는 다른 이들을 구원할 때 사비나는 아주 잠시 동안, 제가 학살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아마 오딜도 그렇겠지.’

네나뷔스테와 동생들을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여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어 내려 하지만, 가슴 깊숙이 뿌리내린 죄책감은 얄팍한 위선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오딜도 알 것이다.

이 마을의 저주가 풀린 뒤에, 오딜은 무엇을 할까. 종적을 감출까.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그때 네나뷔스테가 여전히 마을 사람들과 소원한 관계라면 마음에 걸려서 죽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네나뷔스테가 사비나와 화해하고, 로스카옌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살아 있는 다른 이들과 다시 예전처럼 교류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고 싶은 것이리라.

“아가씨, 안 따라올 거야? 길도 모르잖아.”

“아, 잠깐만요. 에르잔, 청소는 다 끝났나요?”

“예. 사비나 아가씨. 바로 가겠습니다.”

“저기, 누가 나 좀 데려가 줘! 나 앞이 안 보여!”

허우적거리는 나자예프의 멱살을 쥐고 에르잔이 성큼 오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딜은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몸을 돌려 숲으로 들어갔다. 사비나는 숲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반대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페티트가 있는 서쪽과 사비나가 있는 동쪽 하늘은 분명 이어져 있음에도 미묘하게 색이 달랐다.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아페티트가 얼마나 강한 저주의 화신인지는 몰라도, 그의 <욕망의 핵>을 반드시 흡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머지 세 개의 핵을 확실히 흡수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비나는 나자예프가 질질 끌려가느라 흙이 파인 길을 따라가면서, 네나뷔스테에게 무슨 인사를 건네면 좋을지 고민했다.

***

“저리 꺼져!”

던질 것이 없으니 우도 대신 신발이 날아왔다. 에르잔이 도중에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사비나의 얼굴에 직격했을 것이다.

네나뷔스테는 씩씩거리며 제 동생들을 등 뒤로 숨겼다. 줄디즈는 사비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피하며 네나뷔스테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숨었다. 머리만 구멍에 들이밀고 숨었다고 생각하는 짐승처럼, 네나뷔스테의 백금발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줄디즈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꼭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붙잡았다.

“꺼져! 당장 꺼지라니까!”

네나뷔스테가 사비나와 에르잔을 경계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반발이 거세, 오딜은 두 사람을 감싸듯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네나뷔스테, 성질 그만 부려. 너희들한테 사과하라고 데려온 거야.”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어. 여기서 빨리 나가!”

“여기는 내 집인데. 내가 데려온 손님을 네가 내쫓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럼 내가 나갈게.”

진정하고 대화를 나누라고 한 말이었는데, 네나뷔스테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일어나 동생들을 끌어안았다.

“아이베크, 자니베크, 줄디즈. 가자. 이제 오딜 아저씨도 믿으면 안 돼.”

“것 참, 네나뷔스테!”

오딜이 네나뷔스테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짚자, 뜻밖에도 그녀는 오딜을 뿌리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동생들을 안고 있는 네나뷔스테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창고에 숨으면 돼. 못질을 하고 동생들이랑 같이 틀어박혀 있을 거야. 어차피 안 먹어도 안 죽으니까.”

“오기 부리지 마.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이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잖아. 저 아가씨…… 사비나가 너희들을 구해 준 걸 아직도 모르겠어?”

오딜의 지적에 네나뷔스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하려면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을 텐데도, 네나뷔스테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품고 있던 <증오의 핵>은 분명히 사비나에게로 넘어갔다.

이제는 예전처럼 미칠 듯이 일어나는 증오심을 해소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일도, 네 개의 관을 뱅글뱅글 돌며 매번 쇠사슬을 점검하고 침입자의 흔적이 없는지 살필 일도 없다.

“나는 구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그럼 언제까지고 네 동생들을 그 관짝에 처넣어 둘 셈이었냐? 알마즈를 그렇게 잃어 놓고!”

막냇동생인 알마즈의 이름이 나오자 자니베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네나뷔스테는 얼른 자니베크를 치마폭으로 감싸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자니베크. 네 탓이 아니야.”

“누나…….”

“우리 잘못이 아니야. 전부…… 그 로스카옌이 저지른 거니까.”

“그러니까 로스카옌은 저주와 상관이 없다는데도!”

“오딜 아저씨는 몰라!”

네나뷔스테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는 알아. 로스카옌이 그 군인들이랑 작당하고 우리 마을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 그렇게 죽였는데도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저 여자를 데려와서 나머지까지 전부 죽이려고 하는 거야!”

“진짜로 죽일 셈이었으면 벌써 죽였지, 뭐 하러 저렇게 다쳐 가며 네 저주를 빨아들였겠어?”

“알 게 뭐야! 그것도 저주의 의식인가 보지!”

“하, 이게 진짜 고집은…….”

15년이나 증오를 품고 있었으니 쉬이 풀릴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네나뷔스테는 아직도 사비나와 로스카옌이 한패라고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로스카옌이 사비나를 도와주는 처지이긴 하지만, 네나뷔스테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로스카옌은 마을에 저주를 내리지도 않았고, 사비나 또한 마을 사람들을 죽이거나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로스카옌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15년 동안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살아남은 이들을 돌보는 것을 보면 누군가를 저주할 위인은 아니다.

누군가를 저주하고 죽이려 했다면 사비나와 에르잔에게 이 마을을 떠나라고 경고했을 리가 없다. 로스카옌은 분명 두 사람을 걱정해서 마을을 떠나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사비나 쪽이다. 이 마을에 깃든 저주를 빨아들여, 마을 사람들을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네나뷔스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들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그래. 네가 품고 있는 증오의 핵도 사비나가 거둬 갔으니까 알 거 아니야. 몸이 편해진 거.”

“닥쳐, 나자예프! 저주받아 본 적도 없는 자식이 뭘 알아?”

네나뷔스테의 일갈에 나자예프는 <나도 저주받았는데……> 하고 꿍얼거렸으나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사비나는 네나뷔스테의 모습을 살폈다.

팔에 입은 화상을 가리려는지 긴소매 옷을 입고 있었으나 손등의 피부가 우그러진 것이 눈에 띄었다. 움직임이 불편하지는 않은 걸 보니 부상도, 남아 있는 저주도 더는 없는 모양이었다.

‘증오의 핵은 전부 나한테 넘어왔구나. 다행이야.’

사비나는 가슴 속에서 간질거리는 이질적인 저주의 감각이 네나뷔스테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네나뷔스테의 자주색 눈동자에 여전히 두려움과 경멸이 깃든 것은 어떻게 지우면 좋을까.

아니, 외지인을 의심하고, 그녀와 동생을 다치게 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네나뷔스테가 사비나를 미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우물에서 나온 사비나를 보고 네나뷔스테가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네나뷔스테. 나와 로스카옌 신부님은 이 마을에서 처음 만났어요.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에요.”

“닥쳐! 안 속아!”

“나는 낯선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로스카옌 신부님은 계속 봐왔으니 알 거 아녜요. 왜 그렇게까지 로스카옌 신부님을 의심하는 거예요?”

“그놈 혼자만 나이를 배로 먹고 있으니까!”

“외지인은 이 마을의 멈춘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로스카옌 신부님이 나이를 먹는 건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라서가 아니라,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서예요.”

“그럼 왜 도망치지 않는데?”

“저주를 받고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헛소리 마!”

네나뷔스테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로스카옌은 도망치지 않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 못하는 거야! 이 마을에 저주를 내린 게 그놈이니까,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라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증오의 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네나뷔스테가 소매를 확 걷어, 화상을 입은 팔을 드러냈다. 에르잔이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으나 네나뷔스테는 도리어 자랑스러운 듯이 화상 자국을 쓰다듬었다.

“15년 전 그날 이후로, 우리는 죽지 않는 한 어떤 상처를 입든 금방 낫게 돼. 그런데 로스카옌이 데려온 저 녀석한테 입은 화상은 낫지를 않아.”

“네나뷔스테. 그건 에르잔의 체질이…….”

“네 개의 핵? 어디서 얄팍한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려고 들어? 진짜 저주의 핵은 우리가 아니라 로스카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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