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사비나가 먹을 아침 식사를 가져온 에르잔은 불청객이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으나, 사비나가 초대했다는 말을 듣고는 어색하게 수긍하며 테이블에 요리를 내려놓았다.
“많이도 가져왔네. 아가씨가 이걸 다 먹는단 말이야?”
“아니에요. 평소엔 에르잔과 함께 식사하니까…….”
“사비나 아가씨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몰라, 최대한 다양하게 마련했습니다.”
“이 얼간이가, 모신 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제 주인이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
오딜이 대뜸 트집을 잡자 사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나자예프도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딜은 에르잔의 상차림을 둘러보더니 하나하나 품평을 하기 시작했다.
“빵을 그냥 바구니에 담아 오면 어떻게 하나. 이러면 아래로 기름이 다 빠져서 맛이 없어. 아래 깨끗한 천을 깔고 기름종이를 받쳐야지!”
“그,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모르면 배워! 그리고 이 좀스러운 고기조각은 다 뭔가?”
“사비나 아가씨께서 한 번에 많이 드시질 못하셔서, 작게 잘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작게 자르면 가져오면서 다 식는 거 모르나? 들고 와서 먹기 직전에 잘라서 따로 담든가 해야지, 원!”
“하지만 덩이를 자르지 않으면 속까지 간이 배어들지 않습니다만…….”
“그럼 칼집을 내서 가져오든가!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나?”
사비나가 먹을 식사를 가져왔는데 왜 오딜이 트집을 잡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던지라 에르잔은 조용히 수긍했다. 사비나는 털털한 줄 알았던 오딜이 예상외로 까탈스럽다는 사실에 놀랐고, 나자예프는 자기가 지금 눈이 안 보여서 헛소리를 듣는가 싶은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애송이. 목욕은 언제 했어?”
“간밤에 했습니다.”
“오늘은 안 씻었단 소리야?”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손을…….”
“손 내밀어 봐. 두 손 다.”
에르잔은 오딜이 왜 이런 것을 묻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청결하다는 사실을 검사받는 것이 사비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아 시키는 대로 순순히 양손을 내밀었다.
오딜은 손바닥을 뒤집어 손등이 보이도록 하더니, 에르잔의 짧은 손톱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조금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톱을 짧게 깎았군. 이건 좀 괜찮네.”
“길면 검을 쥐는 데 방해가 되어…….”
“깎는다고 다가 아니야. 날카롭지 않게 다듬고 깨끗하게 관리해. 손가락 사이사이도 깨끗하게 닦았지? 냄새 배지 않게 먹으면 바로 이 닦고, 손은 틈나는 대로 씻고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아.”
“오딜. 미쳤어?”
나자예프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오딜이 누군가.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는 위생을 무시해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 달이나 씻지도 않고, 옷도 안 갈아입고, 기름에 떡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다니던 부랑자가 아닌가. 어찌나 오랫동안 냄새가 뱄는지, 목욕을 하고 난 지금도 가까이 가면 퀴퀴한 냄새가 날 정도였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위생이니 청결이니 하는 거야? 별꼴을 다 보겠네.”
나자예프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사비나는 아차, 하고 고개를 들더니 에르잔을 불렀다.
“자리에 앉아요, 에르잔.”
“기다려, 아가씨.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난 오딜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말했지, 에르잔을 괴롭혀도 좋다고 말한 적 없어요.”
“괴롭힌다고? 이봐, 아가씨. 나는 아가씨가 워낙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서 대신 조언을…….”
“오딜이야말로 나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뭐?”
“에르잔은 오딜의 부하가 아니라 내 호위기사에요. 내가 바라는 일만 해도 충분하다고요. 그러니 할 말이 있거든 나한테 하고, 에르잔을 괴롭히지 마세요.”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얼른 앉아서 식사해요.”
사비나가 재촉하자 에르잔은 머뭇거리다가 자리에 앉았다. 오딜은 못마땅한 듯이 에르잔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쯧, 혀를 차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오딜. 안 먹어요?”
“나는 아침 먹고 왔어. 아가씨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서 초대에 응한 거야. 난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 둘 다.”
오딜의 반응에 사비나와 에르잔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르잔은 사비나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작게 자른 고기를 그녀의 접시에 덜어 주었고, 오딜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침대에 주저앉아 있던 나자예프는 말소리가 끊어지고 음식 냄새와 씹는 소리만이 들리자 다시 심심해졌는지 침대에 도로 드러누웠다.
“와…… 전에는 로스카옌이 화를 내더니, 이번엔 오딜이 잔소리를 다 하네. 다들 갈 때가 됐나?”
사비나의 침대라 그런지, 나자예프는 평소보다 얌전하게 누워 이불만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흘긋 본 오딜이 에르잔에게 손짓했다.
“이봐, 애송이. 이따가 저 이불이랑 시트 싹 갈아 치워. 베개까지.”
“예.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아주 싹 벗겨다 불에 태워 버려. 나자예프 저놈이 아가씨 이불에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저기, 나 다 듣고 있거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이 망나니야!”
식사를 하는 건지, 벌을 받는 건지, 싸움 구경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비나와 에르잔은 식사를 마쳤다. 원래 사비나는 음식 맛만 보고 남은 음식 처리는 에르잔의 몫이었으나, 사비나가 음식을 남긴 것을 본 오딜이 에르잔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기에, 에르잔은 영문도 모르고 배가 고픈 채로 식사를 중단해야 했다.
“에르잔. 더 안 먹어요?”
“예.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야말로 더 안 먹나? 배 안 고파?”
“저는 많이 먹었어요. 더 먹으면 속이 거북해서…….”
“그러면 속이 안 거북한 음식을 달라고 해야지. 주군은 속이 거북해서 음식도 잘 못 넘기는데 호위기사라는 놈은 눈치도 없이 혼자서 잘 처먹네.”
오딜의 신랄한 지적에 에르잔은 꼭 꾸중을 받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오딜. 왜 자꾸 이래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말을 해요!”
오딜의 환심을 살 생각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어느 정도 그가 요구하는 것을 맞춰 줄 셈이었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차라리 그녀를 욕하거나 흉보는 거라면 모를까, 에르잔에게 자꾸 면박을 주니 사비나도 참기 힘들었다. 그녀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오딜은 속이 뜨끔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어. 식사 다했으면 일어나자고! 나자예프. 너도 빨리 일어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사비나. 앞으로 식사할 때 오딜은 부르지 마.”
“나자예프! 이리 썩 안 나와?”
오딜이 문밖에서 소리치자, 나자예프가 이불과 베개를 부둥켜안은 채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 데리고 다니는 게 귀찮다며? 버리고 가도 돼. 나는 사비나랑 같이 여기 있을 테니까.”
“저도 나가 봐야 하는데…… 나자예프. 눈이 불편하다고 하니 우리가 다녀올 동안 여기서 쉬어요.”
“응? 아니! 사비나가 나가면 나도 같이 가야지.”
이불과 베개를 냉큼 내던지고 일어난 나자예프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사비나에게 다가오자, 에르잔이 그의 목깃을 쥐어 들어 올리더니 쓰레기를 버리듯 문밖으로 휙 내던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자리를 정리하겠습니다.”
“에르잔. 청소는 다녀와서 해도…….”
“오딜의 말이 맞습니다. 위생의 중요성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계시는 공간을 청결히 유지하는 것은 제 의무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워낙 사비나가 원하는 바를 말하지 않은 까닭에, 에르잔은 무엇을 어쩌면 좋을지 몰라 내심 곤란했다. 그러던 차에 오딜이 할 일을 알려 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며 의욕이 되살아났다. 에르잔이 어째서 상쾌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는 사비나는 청소를 도울까 하다가, 오딜이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는 이제부터 어쩔 셈인가? 교회에 갈 텐가?”
“아뇨. 원래는 북쪽에 가 보려고 했는데요…….”
“북쪽에?”
“네. 북쪽에 생존자가 가장 많다고 들었는데, 저는 아무와도 만나지 못했거든요. 북쪽에도 분명 저주의 핵을 지닌 존재가 있을 텐데,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하니까.”
“북쪽이라…… 거긴 나도 좀 껄끄러운데.”
“로스카옌 신부님은 오딜, 당신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던데요.”
“아니, 내가 내키지가 않아서.”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사비나가 조금 풀이 죽은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오딜은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큼,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돌렸다.
“아가씨. 네나뷔스테하고는 그날 이후로 마주친 적 없지?”
“네? 네…….”
오늘 아침에 줄디즈를 만난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잠시 망설이던 차에 오딜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네나뷔스테를 보러 가는 게 어때? 그래도 생판 모르는 얼굴보다야 구면인 쪽이 한마디라도 건네기 쉬울 거 아닌가.”
네나뷔스테와 동생들의 근황이라면 사비나도 알고 싶었다. 다만 네나뷔스테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할까. 아침에 줄디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 사비나는 주저했다.
“우리가 찾아가면, 싫어하지 않을까요?”
“싸웠으면 화해를 해야지. 애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사비나는 이미 성인이고, 네나뷔스테도 시간이 멈춰 겉모습이 변하지 않았을 뿐 정신은 15살이나 나이를 먹었으니 애들이라는 말을 들을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오딜은 네나뷔스테가 어릴 때부터 보아 왔고, 사비나는 나이로만 따지면 오딜의 늦둥이 딸 내지는 조카뻘이다. 오딜이 나자예프와 에르잔까지 포함해서 전부 애 취급을 하는 걸 반박할 명분은 없었다. 사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찾아가는 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가고 싶어요. 안 그래도 네나뷔스테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거든요.”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나도 신경 쓰여서, 어제 시험 삼아 나자예프를 데려갔거든. 공중을 날아 이단옆차기를 하는 걸 보니까 상태가 꽤 호전된 것 같아서 제안하는 거야.”
“잠깐, 오딜! 그런 목적으로 나를 데려간 거야? 너무하네!”
뒤에서 하소연하는 나자예프를 무시하며 오딜은 사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북쪽보다 위험한 게 서쪽이야. 서쪽에 가기 전에 네나뷔스테와 꼭 화해하도록 해.”
사비나는 흠칫 놀라 오딜을 올려다보았다.
서쪽에 있는 욕망의 핵. 아페티트를 오딜도 알고 있는 걸까. 아니, 나자예프도 아페티트를 알고 있었으니 마을의 호위대장인 오딜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아페티트는 스스로 악마라고 칭했다.
욕망의 화신. 탐욕의 악마.
그리고 사비나를 그의 반쪽, ‘반려’라고 불렀다.
아페티트를 떠올리자 다시 소름이 끼쳐, 사비나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페티트의 핵을 흡수하려면…… 네나뷔스테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요?”
“아니.”
오딜은 가볍게 부정했다.
“내가 없어도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줘야 그 아이들도 살아갈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