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70화 (70/189)

70화

14. 나는 죽음입니다

멈춰 버린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사비나의 시간도 멈춰 버린다는 뜻일까? 이 마을 사람들처럼.

사비나는 허리를 굽혀 줄디즈와 눈높이를 맞추고, 아이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줄디즈는 어깨를 움찔거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줄디즈. 너는 주술사니?”

“그게 뭔데요?”

“음……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미래를 읽는 자. 본래 그것이 주술사의 정의였다.

사비나에게는 미래를 읽는 힘이 없었으나, 아버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다. 콘바야젠 가문에 필요한 것은 미래를 예지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잡는 데 방해가 되는 정적을 모두 죽여 버릴 수 있는 강력한 죽음의 화신이었으므로.

사비나는 한 번도 주술사를 마주한 적이 없다. 그들의 예지능력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앞의 아이가 하는 말이 꿈을 꾸고 나서 하는 헛소리나 꾸며낸 거짓말이 아닌, 진짜 미래를 아는 자의 ‘경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디즈. 내가 이 마을에 있으면 내 시간도 멈춰 버리고, 사람들이 죽게 될 거라고 그랬지?”

줄디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에르잔과 함께 도망치면,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게 돼.”

사비나의 말에 줄디즈는 입을 꼭 다물고 두 손을 뒤로 숨겼다.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줄디즈의 눈동자는 사비나를 피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숨기고 싶은 것을 들켰을 때의 반응에 가까웠다.

“시작한 이상,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어.”

네나뷔스테가 품고 있던 증오의 핵과 바르셀다가 품고 있던 분노의 핵. 사비나는 벌써 두 개의 핵을 흡수했다. 로스카옌 사제가 말한 대로 네 개의 핵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라면, 두 개의 핵을 보유한 사비나가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나머지 두 핵의 보유자는 물론이고, 균형이 무너져 어그러진 저주의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마저 죽어 버릴 것이다.

“내가 이 마을에 오래 머무는 게 너희들에게 달갑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나머지…… 서쪽과 북쪽의 ‘핵’을 흡수하기 전에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도망치면 너희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아이가 자신의 말을 다 이해할까. 줄디즈는 카림보다도 체격이 작았다. 한 7, 8살쯤 되었을까. 사비나로서는 어린아이의 성장 속도도 이해 능력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줄디즈가 정말로 ‘미래를 보는 자’라면 두 개의 핵을 품은 사비나가 도망쳤을 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비나가 도망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텐데, 왜 도망치라고 하는 걸까.

“……언니랑, 오빠들이랑, 마지막까지 함께 있고 싶어요.”

“응?”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가는 건 너무 무서워. 더는 싫어…….”

줄디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이제 그만 우리를 놓아주세요.”

어린아이의 눈빛에, 일생 고된 삶은 살아온 자들의 절망과 한탄이 스쳐 지나갔다. 사비나가 위화감을 감지하기도 전에 줄디즈는 몸을 돌려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타박타박. 작은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 주인을 뒤따르듯 작아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하나씩 사라지는 게 무섭다고?’

사비나는 줄디즈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부서진 관 속에서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아이의 모습이 보였을 때, 줄디즈는 울고 있었다.

<언니. 무서워.>

줄디즈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을의 시간이 멈춘 지 15년이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비좁은 관 속에 갇혀 줄디즈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폐소공포증이나 스트레스로 환각을 본 것일 수도 있어. 주술사는 아닐지도 몰라.’

줄디즈가 경고한 것이 진짜 미래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줄디즈는 사비나가 저주의 핵을 흡수하면서 찾아올 미래, 누군가가 또 죽고 누군가가 그녀를 미워하며 분쟁이 일어나는 미래보다는, 차라리 저주의 균형이 무너져 모두 함께 죽어 버리는 쪽이 ‘덜 무섭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분노와 증오와 욕망과 체념이 소용돌이치는 고통을 평생 감내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혼자만 죽거나 다른 가족을 떠나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제 형제들과 함께 잠드는 마지막을 원했다.

사비나는 자신에게 경고하던 줄디즈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어린아이의 얼굴 위로, 1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공포에만 질려 있었을 세월이 겹쳐지자 그 모습은 소름이 끼칠 만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제발 나를 죽여 주세요.>

15년 동안 한결같이 외쳐왔던 제 목소리가 다시금 귓전을 때렸다. 줄디즈의 모습에 제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아, 사비나는 얼른 고개를 털어 끔찍한 상상을 떨쳐 냈다.

‘아니야. 나와는 달라.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 아이는…… 이 마을 사람들은, 저주로부터 해방되면 삶을 되찾을 수 있어.’

사비나는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사철나무가 우거진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북쪽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들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걸까. 사비나는 최대한 희생을 피하고 싶었다.

오딜의 신임을 얻으면 협조하는 이가 늘어날 거라고 로스카옌이 말하지 않았던가. 성급하게 북쪽의 핵을 찾기보다는 우선 그들과 천천히 가까워지고, 자신이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외지인이지만 오딜은 이 마을 사람이니까. 그리고 카밀라나 카이라트도 나서준다면, 북쪽 사람들의 경계를 늦출 수 있을 거야.’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다시 몸을 돌려 교회가 있을 서쪽을 바라보았다. 아페티트와는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바르셀다나 네나뷔스테처럼, 저주에 억눌려 괴로워하는 상태는 아니다. 사비나와 닿으면 괴로워하던 바르셀다와는 달리, 반대로 그는 기쁜 듯이 사비나를 끌어안고 그녀의 저주를 빨아들였다.

아마 사비나의 예상이 맞다면, 그녀처럼 완전히 안정이 된 상태. 저주의 화신이 된 상태이리라.

‘가만. 아페티트도 저주의 화신이라면…… 나와 그 남자, 둘 중에 누가 더 강력한 거지?’

저주는 더 강한 저주에 이끌린다. 이제까지 사비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죽음의 저주가 가장 강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페티트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저주를 빼앗기고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빼앗긴 만큼 아페티트로부터도 무언가를 받은 것 같긴 했지만, 바르셀다 때와는 달리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저주를 흡수할 때면 반동으로 이성을 잃을 만큼 강하게 일어나던 성욕이 가라앉게 되었다고 할까. 아페티트에게 저주를 빼앗긴 뒤로, 사비나는 늘 의식이 있는 채로 에르잔과 몸을 겹쳤다.

만약 아페티트가 사비나보다 더 강력한 저주의 화신이라면, 저주의 핵을 전부 흡수함으로써 마을의 멈춘 시간을 되돌리는 계획은 수포로 되돌아간다. 사비나가 흡수한 핵마저 아페티트가 빼앗아 갈 테니까. 아페티트가 네 개의 저주의 핵을 흡수하면 어떻게 될까. 죽게 될까?

어쩌면 사비나 이상으로 강력한 죽음의 화신이 되어, 단지 그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재앙 덩어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어쩌지? 로스카옌 신부님께 여쭤보면 대답해 주실까?”

“사비나. 그놈의 할아버지는 그만 좀 찾아! 이 젊은 나를 놔두고!”

멀리서 들려온 나자예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떨떠름한 표정의 오딜과 그 뒤에서 엉거주춤하게 뒤따라오는 나자예프의 모습이 보였다.

“나자예프. 몸은 괜찮아요?”

만나자마자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사비나가 처음이었다. 나자예프는 순간 감격해서 오딜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사비나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괜찮아, 사비나. 앞이 보이지 않아도, 너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나는 영원을 살아갈 수 있어!”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오딜은 아침부터 순찰인가요?”

자연스럽게 나자예프의 팔을 피해 오딜 편으로 돌아가며 사비나가 물었다. 오딜은 새벽에 본 광경 탓에 아직 눈을 마주하는 게 껄끄러운지 큼, 헛기침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순찰은 무슨…… 그냥 아침 산책이야. 이런 곳에선 할 일이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

“할 일이 많다면서 새벽부터 날 깨워서 끌고 내려올 때는 언제고!”

“그나저나 애송이는 어딜 가고 아가씨 혼자인가?”

“에르잔은 아침 식사를 가지러 갔어요. 그보다 오딜…….”

오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하려다, 사비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딜에게 계속 이런저런 요구만 했다. 사비나를 수상한 여자라고 경계하면서도 도와준 것은 카밀라와 로스카옌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지 그녀에게 어떤 호의적인 감정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작은 사고와 마찰이 있었으나 어쨌든 오딜의 도움 없이는 바르셀다의 저주의 핵을 흡수하지도, 부상을 입은 나자예프를 바로 교회로 돌려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비나는 먼저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어서 미안해요, 오딜. 그날 도와줘서 바르셀다를 구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 받으려고 한 일 아니니까 인사는 넣어둬. 간지럽게 무슨…….”

“혹시 식전이라면,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 않겠어요? 에르잔이 곧 올 거예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던 오딜이 사비나를 바라보며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녀로부터 이런 권유를 받을 줄 예상도 못 했기 때문이리라.

사비나도 누군가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권유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비나. 우린 벌써 아침을 먹고 왔는데 차라리 산책을…….”

“좋아. 이참에 애송이 요리 솜씨가 어떤지 확인 좀 해야겠군.”

귀족 아가씨인 사비나가 스스로 요리를 하지는 않을 테니 식사 준비는 호위기사인 에르잔의 몫이다. 요리에 재주도 관심도 없었던 오딜은 아무거나 주는 대로 잘 먹었으나 올가는 입맛이 까다로웠다. 그녀가 늘 음식을 남기는 것이 식사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맛이 없어서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이가 소원해진 뒤라, 오딜은 여동생에게 맛있는 한 끼를 대접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사비나의 몸을 봐서는 뭘 제대로 먹기는 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던지라, 오딜은 이참에 에르잔이 사비나를 잘 대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잘 대접하지 않으면 뭘 어쩌려는 건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방문을 열고 성큼 들어온 오딜은 의외로 안이 깨끗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감탄했다. 겉보기엔 완전히 폐가나 다름없었는데, 에르잔이 어찌나 반질반질 윤이 나게 청소를 해 놓았는지 썩어서 모양이 망가진 창틀마저 원래 이색적인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인 양 멋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마른 짚은 폭신하면서도 햇볕 냄새가 났고, 중앙의 원형 테이블에는 부드러운 천이 깔려 있어 옹이구멍이나 오래되어 결이 쩍쩍 갈라졌을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의자가 두 개뿐인데. 애송이는 서서 먹나?”

“아, 헛간에 의자가 하나 더 있거든요. 가져올게요.”

“아니, 내가 가져오지. 헛간 구조야 다 비슷비슷하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보면 알거든.”

“오딜. 내 의자도 가져다줘!”

아주 자연스럽게 오딜을 부려먹는 나자예프의 뻔뻔함에 오딜은 녀석의 정강이를 확 까 버릴까 하다가, 사비나가 보는 앞이라 그냥 머리를 밀어 버리는 것으로 타협했다.

“주방에 틀어박혀서 내내 처먹던 놈이 뭘 더 먹겠다고? 네 녀석까지 앉으면 비좁으니까 저리 꺼져, 나자예프.”

“아야야! 오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좋아. 그럼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지!”

나자예프는 더듬거리며 구석으로 기어가더니, 침대를 발견하고는 그 위에 냉큼 드러누웠다.

“여기다, 내 자리!”

“나자예프?”

“사비나. 여기 누워서 자는 거야? 좀 좁지만 푹신해서 좋네. 이게 사비나 냄새인가? 하아…….”

나자예프가 행복한 표정으로 이불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품에 꼭 안겨 잤으니 이불에 체취가 남아 있다면 아마도 에르잔의 것일 테지만, 사비나도 오딜도 나자예프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기에 나자예프는 조금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이불에 코를 비볐다.

“더 달콤한 향기가 날 줄 알았는데…… 하긴, 요즘 바빴으니까. 괜찮아. 나는 사비나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

베개까지 끌어와 꼭 붙들고 엎어진 나자예프를 바라보며, 사비나는 그 베개도 에르잔이 베던 것이고 자신은 그의 팔을 베고 잤다고 말해 줄 방도가 없어 난감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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