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쳤다. 잠에서 깨어난 사비나는 제 몸을 안고 있는 팔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에르잔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같이 잤구나…….’
간밤의 일이 환상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려는 듯 사비나는 에르잔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두근. 두근. 가슴의 고동이 따스한 체온과 함께 전해져 온다. 그것이 문득 눈물이 날 만큼 기뻐서, 사비나는 무심코 에르잔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헉!”
쪽 하는 소리에 깨어났는지, 입술의 감촉에 깨어났는지, 그것도 아니면 품 안의 무언가가 꾸물거리는 감각에 깨어난 건지, 에르잔이 불현듯 눈을 뜨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사비나가 몸을 뒤로 당기자 두 사람의 몸을 덮고 있던 양모 이불이 흘러내려 날것의 육체를 드러냈다.
“이런, 제가 늦잠을……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사과하지 마세요, 에르잔. 나야말로 당신을 깨워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서둘러 부정하는 얼굴과 손짓과는 달리, 에르잔의 성기는 빳빳하게 곤두서 있었다.
‘어제 밤새 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걸까?’
사비나는 조금 신기한 듯이 물었다.
“에르잔, 이거…… 나 때문에 그런 건가요?”
사비나가 에르잔의 발기한 성기를 가리키며 묻자, 에르잔은 새빨개진 얼굴로 허겁지겁 이불로 하반신을 가렸다.
“아,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에르잔은 여자인 제 주군에게 남자의 아침 발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어디까지 설명해도 좋은지 알지 못해 쩔쩔매며 말을 더듬었다.
‘아가씨께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는커녕 이런……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기사는 본래 과묵하되 대답은 명료해야 하는 법. 에르잔은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언변이 화려한 것도 아니었으나 말 더듬는 버릇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비나 앞에서는 자꾸 말을 더듬게 된다. 에르잔은 당혹스러웠다.
“아침에는 원래…… 이, 이렇게 됩니다. 사, 사비나 아가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요?”
사비나와 몸이 닿는다고 바로 흥분하여 발정하는 짐승이 아니라 자연적인 생리현상임을 필사적으로 어필하려 했지만, 제 표정과 변명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사비나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좋을 때만 발기하는 게 아니구나. 그럼 에르잔이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하지?’
에르잔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사비나는 곤란해졌다. 에르잔이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말하고, 그녀의 손길에 느끼는 것을 확인했기에 안심하고 몸을 섞을 수 있었다. 주군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억지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에르잔도 사비나와의 섹스에서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좋아한다고 여겼기에 마음껏 그의 품에 안겨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제 손으로는 다 쥘 수도 없는 커다란 성기를 쓰다듬는 것도, 그것으로 아래가 얼얼할 만큼 범해지는 것도 그저 기쁘기만 했다.
에르잔을 구원하지는 못해도, 진실을 밝히지는 못해도, 믿음을 돌려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육체적인 쾌감과 만족만큼은 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간밤의 정사에서 사비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런데 성욕을 느끼지 않을 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면, 그걸 어떻게 구분하지?’
사비나의 표정이 왜 점점 실망스러워지는지 알지 못하는 에르잔은 제가 호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그런가 싶어 눈치도 없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분신을 억누르며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얼른 옷차림을 정돈하고 오겠습니다.”
“아…….”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 헛간으로 사라진 에르잔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비나는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만약 사비나가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인간관계를 쌓아 왔더라면, 제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붉어져 횡설수설하다가 얼른 자리를 비우는 에르잔을 보고 그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비나는 에르잔이 한 <사비나 때문에 흥분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라는 말에만 집중하여, 에르잔의 붉어진 얼굴이나, 더듬거리는 말투에서 그의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로 표현하지 않는 타인의 감정을 짐작하기에 사비나는 경험도 부족하고 여유도 없었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모자랐다. 희망을 가지기에 너무 피폐해져 있었던 탓에 사비나는 에르잔이 빠져나가 비어 버린 방을 보고는 우울해져 몸을 웅크렸다.
서로의 몸에 닿고 싶고, 서로 만지고 싶고, 서로의 체온과 체취를 알고 싶어서 몸을 섞은 거라고 생각했다.
에르잔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드는 것이 조금도 갑갑하지 않았던 것도, 제 몸에 두른 단단한 팔의 무게가 무겁지 않았던 것도, 아랫배에 와 닿는 육중한 성기의 감촉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던 것도, 그와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르잔이 사비나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몸을 비비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사비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좋아하지 않아도, 사비나를 안고 싶어서가 아니라도, 단순한 생리현상으로도 같은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면.
에르잔이 그녀에게 닿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파악하면 좋을까.
사비나는 알 수 없었다.
“저어, 사비나 아가씨.”
문 너머에서 에르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안 좋으십니까?”
“네?”
“새 옷을 구해 오기엔 아직 시간이 이른지라…… 전에 입으신 옷을 세탁해 두었습니다. 그것을 가져올까요?”
사비나는 옷을 입지 않은 탓에 아직 알몸이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지 않는 이유가 움직이기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기 싫어 새 옷을 가져오길 기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에르잔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착의 시중을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옷을 입혀 주고 싶다는 뜻이다. 그 말에 뒤늦게 정신이 든 사비나는 재빨리 이불을 끌어와 몸을 가렸다.
“아니에요! 금방 입을게요!”
“아, 알겠습니다.”
명백한 거부의 말에 에르잔은 살짝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사비나는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치워 내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바보같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에르잔의 기사도에 답해 주지 못할 거라면, 최소한 남 보기 부끄러운 꼴로 있지는 말아야지.’
호위기사가 옷을 입혀 줄 때까지 헐벗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주인이라니,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자신이 싫어져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아침부터 울기나 하는 모자란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비나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가슴 끈을 여몄다.
“옷…… 다 입었어요. 들어오세요, 에르잔.”
“……예.”
에르잔이 문을 다시 열고 들어왔을 때는 사비나도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조용한 방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간밤에 서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관계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분위기가 무거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에르잔은 재빨리 눈을 굴렸다. 테이블 위에 어제 다 먹지 못한 저녁 식사가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에르잔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입을 열었다.
“사비나 아가씨. 아침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네? 저기 테이블에 요리가 있는데요.”
“따뜻하게 드셔야 더 맛있습니다.”
사비나에게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먹일 수는 없었다.
로스카옌을 찾아가 다시 아침 식사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에르잔은 테이블 가득 놓여 있던 그릇과 바구니를 정리하여 탑을 쌓듯이 한 팔로 안아 들고는, 꾸벅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그래서 사비나는 다시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
‘에르잔. 나하고 같이 있는 게 싫은 걸까?’
연애 경험은 없어도, 욕구란 본능적인 것이다. 아침에 한 침대에서 일어난 연인이 모닝키스를 주고받는 게 낭만적이라는 것은 몰라도, 에르잔과 가까이 달라붙어 체온을 느끼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다.
그러나 에르잔은 사비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얼른 자리를 벗어나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어색하다는 듯이 식사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사비나는 그것이 어딘가 모르게 서운했다.
‘에르잔은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억지로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아니면 보통 남녀 사이에는 이런 게 평범한 걸까?’
돌방에서 알몸으로 잠들던 사비나는 옷을 입는 것도, 해가 뜨면 일어나고 지면 잠드는 것도 어색했지만, 평범한 사람은 목욕할 때 외에는 반드시 옷을 입으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것이 평범한, <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사비나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에르잔과 맨몸을 비비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길 바라지만, 에르잔의 상식으로는 일어났으면 얼른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아침을 먹은 뒤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에르잔이 보기엔 내가 이상하고 몰상식하게 보일 거야. 실수하지 말아야지.’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했다가 좌절한 경험이 너무 많아서일까, 사비나는 에르잔은 물론이고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바라는 것은 그저 미움받지 않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뿐. 그 이상은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는 일에 익숙했던 사비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열었다. 여름이라도 산속이기 때문인지, 아침 바람이 서늘했다.
바사삭.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가자, 그것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파스스, 잎사귀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잎사귀가 잔뜩 엉겨 붙은 부스스한 백금발의 꼬마가 눈을 깜박이며 사비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수풀 사이로 쏙 숨었다.
“저기, 너는…… 네나뷔스테의 동생이지?”
수풀 사이에서 다시 꿈지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줄디즈.”
“……내 이름, 알아요?”
수풀 사이에서 들려온 대답에 사비나가 수긍하자, 아이가 다시 일어나 고개를 털었다. 머리카락과 옷에 붙은 잎사귀는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너는 다친 곳이 없어 보이네. 다행이야.”
“……도망치세요.”
“응?”
“언니가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사비나를 걱정하는 걸까? 구해 준 은인에게 하는 감사 인사라기엔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비나가 의아해하며 줄디즈에게 다가가자, 아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났다.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사람들이 언니를 미워할 거예요. 무서운 일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도망치세요.”
어린아이의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아이는 마치 미래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사비나에게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 오빠가 있을 때 도망치지 않으면, 언니도 멈춰 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