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68화 (68/189)

68화

더 이상 신의 사자가 아니게 되었어도 로스카옌의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아침 기도를 올린 뒤 자고 있는 바르셀다를 찾아가 상태를 진찰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다 아물었고…… 뼈가 붙기는 했는데, 잘못하다간 도로 부러지겠구먼.’

아직은 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할 테지만, 상처가 회복되는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저주를 견뎌 낸 마을 사람들은 비교적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나 바르셀다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다만 몸의 회복과는 달리 정신의 회복에는 시간이 걸리는지,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면 통증을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기에 로스카옌은 바르셀다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조용히 복도를 나와 미사실로 들어갔다.

“일찍 왔구먼, 오딜.”

“어…… 아침 산책을 하려다가, 그냥 귀찮아져서 바로 왔어.”

“그런가. 나자예프는?”

“배고프다기에 부엌에 처박아 뒀지. 먹을 만큼 먹고 나면 알아서 엉금엉금 기어 나올 거야.”

“그런가…….”

부엌에 찾아올 때야 냄새로 찾았다지만 과연 눈이 안 보이는 상태로 교회를 찾아올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나자예프에 대한 걱정은 해 봐야 쓸모가 없으므로 로스카옌은 단상 위에 깨끗한 천을 펼치고 약초를 늘어놓았다.

바르셀다가 깨면 통증을 줄이는 약을 먹이고 다시 재울 요량으로 수면 성분이 든 하얀 꽃잎을 잘게 부수는 로스카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딜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봐, 로스카옌. 그 아가씨 말이야…….”

“사비나 아가씨가 왜?”

“아무래도 그 애송이…… 아니, 호위기사라는 녀석하고 깊은 관계 같던데.”

약초를 말리고 있던 로스카옌이 고개를 들어 오딜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인데, 오딜은 문득 로스카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는 건가?”

“로스카옌. 콘바야젠이면 귀족 가문 아닌가. 게다가 그 아가씨, 젊고 미인이고…….”

“올가를 닮았지. 그래서 또 팔불출 병이 도졌나?”

로스카옌의 정확한 지적에 오딜은 펄떡 뛰며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귀족 아가씨가 호위기사 하나만 데리고 이런 마을에 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않나. 분명 집안에서 반대를 해서 둘이 도피 중인 게 아닐까 하고…….”

“콘바야젠 백작으로부터 가문에서 비호하던 아가씨 하나를 호위기사를 대동해서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네. 도피 여행 같은 것은 아니야.”

“아…… 그, 그런가? 그럼 설마 여기 와서 정분이 난 건가?”

오딜의 표정이 의문에서 추측으로, 다시 불안으로 바뀌더니만 더 큰일이라는 듯이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로스카옌. 이대로 두고 볼 건가?”

“대체 뭐를 말하는 게야?”

“말이 폐쇄적인 마을이지, 이 마을이 보통 상태는 아니지 않나. 가뜩이나 그 아가씨, 곱게 자라서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던데, 이런 외지에서 남들에게 이유 없는 적대를 받으니 불안한 마음에 호위기사한테 의지하다가 그게 사랑인 줄 착각하는 것도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닌가.”

“자네답지 않게 말을 빙빙 돌려 하는군, 오딜.”

오딜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딜은 지금 사비나와 에르잔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것을 알고 무척 충격을 받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무척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다.

그런데 제삼자인 자신이 끼어들 명분도 없고, 당사자에게 말할 재간은 더욱 없으니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어 로스카옌을 찾아와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다.

카밀라나 나자예프가 그를 찾아와 고해성사라는 이름의 하소연을 했던 것처럼.

“나는 자네가 사비나 아가씨를 꺼려 하는 줄 알았네만.”

“아니, 꺼리고 말고와는 관계없는 이야기 아닌가? 귀족 아가씨면 이다음에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해야 할 텐데 호위기사와 저런 관계라는 게 알려지면 그…… 나중에 흠이 될 테니까…….”

“그걸 왜 자네가 걱정하나?”

로스카옌의 질문에 오딜은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사비나가 에르잔과 사귀는 것이 진심이건 아니건, 그 사실이 밝혀지건 안 밝혀지건, 스캔들이 나서 귀족 간의 정략혼을 치르는데 장애가 생기건 말건 오딜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런데도 오딜은 어째서인지 걱정이 되었다.

이 마음이 ‘걱정’인지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로스카옌의 눈빛이 차츰 흐려지더니 이내 고개가 푹 수그러들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착각하지 말게, 오딜. 올가를 닮았으니 사비나 아가씨가 무슨 자네 딸이라도 되는 거 같은가?”

“아니, 아니라니까! 올가를 닮아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젊은 혈기에 실수라도 할까 봐, 이다음에 그걸 후회할까 봐 걱정이 돼서……!”

“사비나 아가씨가 좋다는 대로 하게 좀 놔두게!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거라면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아니, 나는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을…….”

“정작 애비는 아무 불만 없는데 왜 자네가 나서서 잔소리야, 잔소리는!”

로스카엔이 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자 오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스카옌은 아차 싶어 큼, 헛기침을 하고는 약초를 말리던 천을 후르륵 감아 일어섰다.

“아무래도 바깥 그늘에서 말려야겠어. 실내에서 말리다간 나쁜 공기가 들러붙겠군.”

“이봐, 로스카옌. 방금 그게 무슨 뜻인가?”

“……에르잔에게 사비나 아가씨의 호위를 맡긴 게 콘바야젠 백작일세. 당연히 이런 산중에서 둘만 있다 보면 감정이 싹틀 수도 있다는 걸 알았겠지. 모르고 보냈겠나?”

“그 아가씨가 콘바야젠 백작의 딸이었어?”

콘바야젠이라는 성을 쓰고 있지만, 사비나는 ‘콘바야젠 가문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라고만 말했다. 그래서 오딜은 사비나가 귀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백작의 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어디 먼 친척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더 큰일이 아닌가. 아니, 어떻게 귀족이 자기 딸을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 보내?”

“그러니까 그건 자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설마 사생아인가? 어쩐지 그 아가씨, 내가 눈빛으로 위협을 해도 꿈쩍도 안 하는 게 보통이 아니다 싶더니만…….”

“나자예프! 그만 일어나서 오딜이랑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와!”

오딜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로스카옌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할 일이 없어 드러누워 있었을 뿐 심심해서 좀이 쑤셨던 나자예프는 얼른 일어나 오딜을 부르며 뛰어오다가 문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꽥 소리를 지르며 엎어진 나자예프를 일으켜 주고 나니 이미 로스카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딜은 로스카옌이 왜 저렇게 대놓고 불쾌해하며 대화를 거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옆에서 보채는 나자예프를 기절시키고 따라 나가 봐야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단념했다.

“허, 참. 살다 보니 로스카옌이 화내는 모습도 다 보는군…….”

“아. 로스카엔이 화를 냈어? 놀랍지? 나도 전에 화내는 거 보고 놀랐어.”

“로스카옌이 전에도 화를 낸 적이 있었나?”

“어. 네나뷔스테의 증오의 핵을 흡수하려고 몸싸움을 하던 도중에 사비나가 목을 베였거든. 로스카옌이 아주 노발대발하면서 에르잔을 쫓아냈어.”

“쫓아냈다고? 왜?”

“사비나가 그렇게 다쳤는데 호위라는 녀석은 멀쩡하니까 그렇지. 가뜩이나 사비나는 피부가 창백한데, 목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걸 보니까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어서 나까지 무서워졌다니까.”

그렇다고 화를 내나?

로스카옌은 결코 화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다.

군인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오딜에게조차 격려하며 손을 잡아 주었던 게 로스카옌이었다. 오딜은 차마 로스카옌과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면이 서지 않아 그 손을 뿌리치고 숲으로 들어가 숨었지만, 아무 소식도 없이 죽은 듯이 살다가 15년 만에 훌쩍 나타났음에도 로스카옌은 오딜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때 오딜은 내심 감격했다. 과연 사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그의 인품에 탄복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에 정색하고 진저리치며 대화를 끊어 버리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마을에 저주를 건 범인이라고 모함을 받고 온갖 욕을 혼자서 들을 때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이던 로스카옌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유를 짐작조차 못 하는 오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늙어서 변했나……?”

“갈 때가 된 거지. 그래도 치매가 와서 여러 사람 곤란하게 하는 것보단 깔끔하게 죽는 게 낫지 않겠어?”

“나자예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오딜은 나자예프의 등짝을 짝! 후려갈기고는 그의 멱살을 휙 잡아챘다.

로스카옌의 반응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이 저주받은 마을에서 보낸 시간이 15년이다. 특히나 혼자서 세월을 남들의 두 배로 견뎌 내야 하는 로스카옌이라면 속으로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 쌓인 것이 아닐 터. 제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한들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을 것이다.

오딜은 더는 로스카옌이 피곤해하는 화제를 올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그래도 신기하단 말이야. 그 아가씨가 누구한테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걱정하지 마, 오딜.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거든. 사비나가 마음의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는 걸 단념하지 않을 거야.”

“아니, 너는 좀 단념해라.”

나자예프에게는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오딜은 고개를 흔들고는 나자에프의 목깃을 잡고는 교회 밖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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