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67화 (67/189)

67화

동이 터도 산속은 어둡다. 검은 사철나무로 뒤덮인 마을의 숲에서 나온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흔들거렸다. 저벅저벅. 네나뷔스테와 어린 동생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려 해도, 듬직한 남자의 뒤에서 비틀거리는 남자는 똑바로 걷지를 못하고 계속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오딜. 나 눈이 이상해. 자꾸 시큰거리면서 시린 느낌이 들어…….”

“눈이 없어서 시린가 보지. 으깬 감자라도 욱여넣어 줘?”

“아, 좀! 진지하게 들어 달라고! 난 환자란 말이야!”

“환자는 얼어 죽을. 나자예프, 네 녀석은 그냥 망나니야, 망나니.”

그렇게 빈정거리면서도, 오딜은 제 옷자락을 꽉 부여잡은 채 투덜거리며 따라오는 나자예프를 밀어내지 않았다.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던 시절은 이미 과거에 묻혀 버렸는데, 나자예프가 자신을 의지한다는 사실은 싫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말종이라고는 해도 누군가 자신을 의지한다는 사실이 오딜의 비어 버린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감정이 조금씩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딜. 공기가 아직 찬데…… 해 뜬 거 맞아?”

“나무 때문에 어두워서 그래. 한참은 더 내려가야겠군.”

“어둡다면서 어째 오딜은 길도 안 헤매고 잘 다니네…….”

“15년이나 지나다녔던 길을 못 외울 만큼 머저리는 아니니까.”

그냥 익숙한 길이라도 해도 좋은 것을 꼭 저렇게 비꼬듯이 말하는 것이 오딜의 버릇이었다.

말 좀 곱게 하라는 나자예프의 불평을 한 귀로 흘려버리면서도, 오딜은 앞이 보이지 않는 나자예프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길이 넓고 경사가 완만한 곳으로 돌아 내려왔다.

숲을 빠져나오자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아직 어둡지만 파랗게 빛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곧 찾아올 아침을 예고하는 듯했다.

오딜은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찌뿌드드한 등을 바로 한 뒤, 순찰을 시작했다.

아니, 순찰이 아니라 산책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까.

평소 오딜이 몰래 다니던 길은 네나뷔스테가 네 개의 관을 지키던 남쪽 광장을 지나 카밀라와 카이라트 남매가 사는 서쪽 구역까지였다. 올가가 죽은 북쪽은 차마 갈 용기가 나질 않고, 동쪽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애송이와 아가씨가 동쪽에 있으니까.’

동쪽에서 남쪽을 거쳐 서쪽 교회로, 가볍게 반 바퀴 돌아서 가기로 결정한 오딜은 반쯤 떨어져서 삐걱거리는 너저분한 울타리를 발로 탁, 차서 쓰러뜨렸다.

“나자예프. 밑에 울타리 쓰러졌으니까 밟지 마라.”

“응? 어디…… 우왓!”

주의를 주자마자 밟아 버렸는지 빠자작, 하고 널빤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나자예프는 갑자기 발에 채는 무언가에 당황해 휘청거렸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오딜! 이런 건 빨리 좀 말해!”

“말을 해 줘도 성질이야, 성질은…….”

“이거 그거…… 그거란 말이야!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학대라고, 학대!”

“진짜 학대가 뭔지 알고 싶어?”

오딜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지자 나자예프는 합 입을 다물고 얌전히 따라 걸었다. 사박사박. 메마른 흙길을 지나 잡초를 밟는 느낌이 들자 나자예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딜.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교회가 이렇게 가까웠나?”

“네 녀석 걷기 훈련을 시켜 주려면 두 시간은 주행을 해야지. 아침 운동시켜 주는 거 고맙게 생각하고 따라와, 나자예프.”

“뭐? 아침 운동? 귀찮은데…….”

구시렁거리면서도 옷깃을 붙든 채 졸졸 따라오는 나자예프의 모양새가 우스웠다. 평소 성질머리라면 금방이라도 화를 내며 제 갈 길을 휙 가 버렸겠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은 오딜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불평불만은 많아도 행동은 고분고분하다.

오딜은 이참에 나자예프의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리면 마을이 좀 평화로워져서 좋겠다는 섬뜩한 생각을 태연하게 하면서, 누런 잡초가 가득한 밭을 지나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 늘어선 장소로 향했다.

‘아가씨는 팔만 다친 것 같았고…… 애송이는 헛간에서 자나?’

사비나와 에르잔이 머무는 오두막에 다다른 오딜은 무심하게 창 너머로 방 안쪽을 쳐다보았다가, 움찔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바람에 나자예프의 발을 꽉 밟고 말았다.

“악! 오딜, 내 발 밟았어!”

“조용히 해, 멍청아!”

오딜은 팔꿈치로 나자예프의 명치를 쳐서 소리를 죽이게 하고는, 얼른 오두막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두 사람은 깊게 잠들었는지 나자예프가 엄살 피우는 소리를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니. 깊게 잠든 게 문제가 아니잖아!’

오딜은 뒷목이 싸해지면서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와, 눈을 깜박이고는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방금 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워 버리려는 듯이.

그러나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박인다고 이미 본 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

오딜은 허어, 기가 찬 한숨을 뱉고는 사비나와 에르잔이 머무는 오두막을 노려보았다.

오딜이 창을 통해 본 광경은, 알몸의 남녀가 달라붙은 채 침대에서 함께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허, 참……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뭐가?”

두 사람이 눕기엔 다소 비좁은 침대였으나, 에르잔의 가슴에 고개를 폭 파묻고 잠든 사비나는 꼭 어미에게 매달린 새끼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고 잠든 에르잔의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꼭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알몸의 남녀가 한 침대에서 서로 끌어안고 잠든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딜은 모르지 않았다.

단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탓에 골이 띵해졌을 뿐.

“그래. 이상해. 이상하다 싶었어. 귀족 아가씨가 겁도 없이 이런 마을에 호위 하나만 달랑 데리고 오는 게.”

오딜이 말하는 ‘귀족 아가씨’란 사비나를 뜻한다. 사비나의 이름만 듣고도 기운이 충만해진 나자예프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 미인이 혼자 돌아다니기에 이 마을은 위험하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사비나를 지켜 주려고 했는데, 에르잔이 계속 방해하는 탓에 기회가 없었지 뭐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다음에 오딜이 에르잔을 좀 막아 줘. 나랑 사비나랑 느긋하게 산책 좀 하게.”

“아니…… 그래도 아가씨가 너무 아까운데.”

“평이 박하네, 오딜. 내가 얼굴이 부족해, 키가 부족해? 솔직히 겉보기만 따지자면 내가 형이나 바르셀다보다 잘생기지 않았어?”

“아까워. 아가씨 쪽이 아깝단 말이야…….”

오딜은 에르잔이 마음에 들었다. 반듯한 자세에 맑은 눈빛. 몸도 재빠르고 감도 남달랐다. 애송이니 얼간이니 하는 말로 후려치기는 했지만, 오딜은 세상의 더러움을 모르는 에르잔의 순수한 표정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고, 교회에 함께 가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사비나의 첫인상은 반대였다. 올가를 닮았다고 착각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음침하면서도 고고해서,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불쾌했다. 카밀라와 로스카옌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처음 보는 기분 나쁜 여자의 요청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똑같은 외부인이라도, 오딜에게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 사비나보다는 에르잔 쪽이 반가이 맞이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런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귀족 아가씨면 훨씬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오딜. 나의 사랑은 신분 차이를 극복할 수 있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녀석이 얼굴이랑 몸 빼면 뭐 남는 게 있다고? 재산이 있기를 하나, 명예가 있기를 하나…….”

“그런 세속적인 기준으로 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마!”

나자예프가 무슨 오해를 하고 무슨 변명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오딜은 제가 보았던 광경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이상했다. 사비나는 올가가 아닌데. 그저 첫인상만이 제 죽은 여동생과 닮았을 뿐, 전혀 다른 타인인데.

에르잔과 사비나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괜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나자예프가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오딜은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호통을 쳐서 둘을 깨웠을지도 모른다.

“아냐. 아냐. 내가 미쳤지. 내 동생도 아닌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가씨가 누굴 만나서 뭘 하든 그건 아가씨의 자유지.”

“그래. 이제 알겠어? 나와 사비나는 끈끈한 사랑으로 맺어져…….”

“그래도 너무 아깝지 않나? 아가씨 정도면 더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사랑은 용기 있는 자가 쟁취하는 거랬어!”

“시끄러워, 나자예프! 머리 복잡하니까 네 녀석은 좀 떨어져서 걸어!”

오딜은 나자예프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섰다. 순찰은 중지다. 이런 기분으로는 산책이고 순찰이고 다 무리였다. 오딜이 교회 쪽을 향해 성큼 발길을 돌리는 걸 감지했는지, 나자예프가 허우적거리며 오딜을 따라왔다.

“오딜, 오딜! 기다려! 나 두고 가지 마……!”

“하, 내가 미쳤지. 올가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뭘 잘했다고…….”

올가를 구속했던 것을, 그녀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을 지난 15년 내내 후회해 놓고,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해진 것 같다.

사비나가 에르잔과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방으로 쳐들어가서 “이 연애, 나는 허락 못 한다!”라고 외칠 뻔했다.

사비나는 그저 첫인상이 올가를 닮았을 뿐인, 완전한 타인인데.

누가 보면 딸을 도둑맞은 아버지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미쳤네, 미쳤어. 염치를 알아야지…….”

“오딜. 내 욕 그만해!”

오딜이 무엇 때문에 자학을 하는지 짐작도 못 하는 나자예프는, 괜히 아침부터 사랑을 부정당하고 뜬금없이 욕을 먹어 원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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