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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65화 (65/189)

65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청년은 제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때로는 거센 파도처럼 굽이쳐 부딪히고, 때로는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 뜨겁게 끓어오르고, 때로는 구멍이 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처럼 한계를 모르는 그것은 에르잔의 마음속 세계를 뒤흔드는 재앙과도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며 비바람에 모든 것이 쓸려나가는 세계에 사비나의 손길이 드리워지는 순간, 천지가 개벽하고 하늘이 갈라지며 빛줄기가 쏟아진다.

아마도 그녀가 말한, <늪에 빠져 죽어 가는 순간 드리워진 구원의 밧줄>의 의미가 이것이 아닐까. 에르잔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에르잔은 필사적으로 구원의 밧줄을 붙들었다. 그것이 허상인지 아닌지 따위를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아가씨, 제발…….”

가뜩이나 말주변이 없는 에르잔에게 저 자신도 모르는 감정을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르잔은 그녀를 속박하듯 끌어안았다. 밀어낼까. 화를 낼까. 사비나가 에르잔의 완력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르잔은 그녀가 자신을 거부할까 봐 품 안에 가두듯 끌어들였다.

만약 제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낸 자리에 그녀를 가둘 수 있다면 기꺼이 심장을 바치련만.

사비나는 저항하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대로 가만히 에르잔에게 몸을 기댔다. 주저앉은 상태에서 상체만이 앞으로 이끌린 터라 불편한 자세였으나 불편과 고통에 익숙한 사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비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음식 냄새가 나는 테이블로부터 고개를 돌려 에르잔의 목깃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비나가 먹을 저녁 식사를 급하게 만들어 오느라 뛰어왔는지, 에르잔에게서 약하게 땀 냄새가 났다.

그러나 사비나는 에르잔의 냄새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보았던 햇살 같은 미소나 청량한 향기보다, 이렇게 땀을 흘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자신을 옥죄듯 끌어안아 오는 에르잔의 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픈 것이 아니라 현실감이 살아났다.

그의 맥박이, 체취가, 체온이, 울컥 넘어가는 목울대가,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과 피부가, 에르잔이 환상이 아니라 이곳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사비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것은 대체 무슨 감정일까.’

아버지는 늘 사비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비나는 사랑이 일방적이며 진득하게 자신을 옭아매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모르는 남자와 사랑을 오해하는 여자는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제 몸과 마음이 원하는 바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품에서 살짝 몸을 움직여,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에르잔.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요?”

“예? 아……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초를 켜겠습니다.”

“같이 먹어요.”

사비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일어나려는 에르잔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사비나가 매달렸다. 에르잔은 당황해서 도로 주저앉았다.

“그건 곤란합니다. 식기를 아가씨 몫밖에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식사를 몰래 가져다 놓고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스푼도 포크도 나이프도 하나밖에 가져오질 않았다. 에르잔은 엉거주춤하게 뒤로 앉느라 한참 밀려난 의자 다리를 살짝 끌어와 사비나를 그 위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에르잔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같이 먹어요.”

사비나는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며 에르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테이블의 식기를 집어 들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설마 먹여 달라는 걸까. 에르잔은 조금 주저하다가 스튜에서 건져 낸 감자를 작게 달라 스푼에 올려놓고는 그것을 사비나의 입가에 들이댔다.

사비나는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잘 익은 감자는 보드랍게 부서지면서도 간이 배어나 매큼하고 고소했다.

“에르잔도 먹어요.”

“예? 예…….”

사비나가 대체 왜 이런 지시를 내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여기서 거부한다면 정말로 그녀에게 내쳐질 것 같았다. 에르잔은 익은 감자를 반으로 갈라 씹어 먹었다. 뜨거운 김이 입안에 훅 퍼졌지만, 삼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비나는 에르잔이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제 입에 물려 줄 때는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작게 잘라서 스푼에 올려 주었는데, 에르잔은 주먹만 한 감자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에 에르잔의 커다란 입이 벌어져 감자를 삼키고, 우물거리며 그것을 씹어 목 너머로 넘기는 모습이 비쳤다. 목울대가 넘어간 뒤에는 입맛을 다시듯 벌어진 입가를 혀끝으로 가볍게 핥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에르잔은 정말 크네요.”

사비나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앞접시에 고깃덩이를 올려놓고 자르려던 에르잔의 손이 멈추었다. 사비나는 살짝 고개를 올려 에르잔의 입가를 핥고는, 나이프를 쥐고 있는 그의 손 위에 제 것을 겹쳤다.

“입도 크고, 손도 크고.”

“그, 그건 제 체격이 아가씨보다 크기 때문에…….”

“이것도 한 번에 삼킬 수 있어요?”

사비나가 접시 위의 고기를 가리키자, 에르잔은 조금 당황했다. 그녀에게 먹이려던 것인데.

하지만 사비나는 에르잔이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에르잔은 고깃덩이를 포크로 푹 찍어 한입에 삼켜 버렸다. 우적우적.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넘기는 모습이 신기한지,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그가 씹어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비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기에, 에르잔은 최대한 허리를 뒤로 당기고 고개를 쳐들었다. 혹 음식 냄새가 나거나 침이 튀지 않을까 신경 쓰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에르잔이 허리를 뒤로 빼면 뺄수록, 사비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해 왔다. 음식 냄새가 나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자, 작은 혀가 그의 목에서부터 턱 끝까지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아, 아가씨? 아……!”

예상치 못한 사비나의 행동에 당황한 에르잔이 고개를 바로 하고 입을 벌린 순간, 사비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헉. 에르잔이 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사비나는 고기를 씹듯 에르잔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정도로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 건지, 아니면 너무 당황해서 아프다는 감각도 없는 건지, 에르잔의 푸른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자 혀 아래 고인 타액이 묻어났다.

에르잔의 맛이 났다.

“사비나 아가씨. 저, 음식 냄새가 날 겁니다. 이러시면…….”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면서요?”

“아니, 그건…….”

“어차피 혼자서는 다 못 먹어요. 그리고…….”

빵이나 감자나 고기보다, 다른 어떤 요리보다, 에르잔 쪽이 맛있었다.

아니, 맛있다기보다는 먹고 싶다고 할까. 먹히고 싶다고 할까.

저 커다란 입에 삼켜져 뜨끈한 혀 위를 구르고 점막에 몸을 비비면 어떤 느낌이 들까?

사비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에르잔의 입속에 있는 게, 더 맛있어 보여서요.”

“……흣!”

에르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희롱을 당했다는 자각이 있는 걸까. 에르잔은 사비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일자로 다물린 그 입술을 보자 다시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물린 입술을 혀끝으로 벌려, 입술을 깨물고 입안을 핥고 싶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성욕의 일종일까? 욕망을 숨기는 방법을 모르는 사비나는 에르잔의 귓가를 슬쩍 건드렸다. 두꺼운 귓불을 지나 빨개진 귓가를 더듬어 보니 다른 곳보다도 유달리 뜨거웠다. 양 귓가를 매만지며 사비나가 다시 얼굴을 가까이하자 그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사비나 아가씨, 식사를…….”

“맛만 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사비나는 다시 에르잔에게 키스했다. 에르잔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혀를 밀어 넣자, 잠시 주저하던 커다란 혀가 사비나의 혀를 감싸 왔다. 에르잔은 음식 냄새 때문에 사비나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사비나는 에르잔의 혀에서 색다른 맛이 나는 것이 좋았다.

마치 같은 고기라도 어떤 소스를 뿌리는가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에르잔의 혀는 부드럽고 따뜻할 뿐이었지만 음식을 삼킨 후의 혀에서는 감칠맛이 났다. 사비나는 그것이 신기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거구나.’

에르잔이 만들어 준 식사를 하면서 사비나는 다양한 요리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비나는 요리의 맛과 향보다 에르잔의 체취와 감촉이 더 좋았다.

어쩌면 사비나의 식욕은 너무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은 까닭에, 성욕을 느끼는 상대 앞에서만 발동하도록 변한 건지도 모른다.

“아가씨, 이제 그만 식사를…….”

“으응. 조금 더.”

사비나는 에르잔의 혀를 빨아당겨 제 입안으로 끌어들이고는, 요리를 맛보듯 음미하며 그의 뺨을 더듬었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나는 뺨을 타고 내려와 목깃을 벌리고 목선을 더듬자 에르잔의 목울대가 다시 움직였다.

사비나의 행동에 에르잔이 반응하고 있다. 어쩐지 그것이 재미있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사비나는 에르잔의 혀를 빨면서 그의 몸을 더듬었다. 코끝에 걸리는 숨이 점점 가빠지며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사비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진실을 고백할 용기가 없음에도, 사비나는 그 말에 기대어 에르잔에게 매달렸다. 그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타액이 끈적하게 뒤섞여 무슨 맛인지도 모르게 될 즘에야 겨우 겹쳐져 있던 두 입술의 사이가 벌어졌다. 에르잔의 입술도 양 뺨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햇살처럼 찬란한 금색. 눈동자는 낮의 하늘처럼 푸른색. 그리고 뺨과 입술은 붉은색.

무채색뿐인 자신과는 달리 에르잔의 색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비나는 에르잔의 옷깃을 가만히 쥐었다.

“에르잔. 만져도 되나요?”

“……예.”

이미 실컷 핥고 빨고 더듬어 놓고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에르잔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란 어쩌면 이리도 달콤하고 역겨운지.

사비나는 에르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믿음도 용기도 염치도 없는 인간은 짐승이 제 영역에 체취를 묻히듯 몸을 부대끼면서 날것의 피부를 가리는 옷자락을 쥐어뜯듯이 잡아당겼다.

“에르잔. 나도…… 만져 줘요…….”

사비나의 욕망에 호응하듯, 허공에 멈춰 있던 커다란 손이 한 줌만 한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그녀의 몸을 가볍게 흔들자 아래에 와 닿는 야만적인 감각에 흥분한 듯 가느다란 신음이 높아졌다.

밤의 어둠은 늪처럼 고요했으나, 두 남녀의 본능은 불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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