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리 오세요.”
“……예?”
그렇게 밀어냈으니 꼴도 보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사비나가 부르자 에르잔은 당황했는지 바짝 긴장했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둠에 익숙한 까닭에 사비나는 에르잔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에르잔. 더 가까이.”
“저어, 사비나 아가씨. 식사를…….”
“나는 안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그리고.”
입안에 음식이 들어오는 것보다, 에르잔의 혀가 들어오는 것이 더욱 기분 좋아요.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서, 사비나는 입가를 매만졌다.
“에르잔.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많이 했어요.”
“사비나 아가씨…….”
“지금도 당신을 속이고 있고.”
사비나의 말에 에르잔은 입을 다물었다. 우직하게 일자로 다문 입술을 보자 문득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사비나는 시선을 피했다.
“당신을 속이는 사람을, 주군으로 섬기면 안 돼요.”
“호위기사가 주군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에르잔은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호위기사는 호위 임무에 필요한 것만 알면 충분했다. 호위할 상대에 대한 사적인 정보는 알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싶습니다.”
“……네?”
“말을 번복해서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야말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의 사적인 부분을 몰라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저는…… 아가씨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에르잔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주제넘은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에르잔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사비나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에르잔의 뺨은 차가웠다.
<사비나는 되게 용감한데, 이상한 구석에서 용기가 없는 것 같아.>
문득 카밀라의 말이 떠올라 사비나는 쓰게 웃었다. 앞부분은 몰라도 뒷부분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사비나는 용기가 없었다. 정확히는 겁이 많다고 할까.
“에르잔. 만약에, 당신이 늪에 빠지게 된다면요…….”
“늪에, 말입니까?”
사비나는 작게 수긍하며 말을 이어 갔다.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아무리 외쳐도 누구도 보러 와 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정말로 가라앉아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다고 가정해 봐요.”
“……예.”
“당신이라면, 그 밧줄을 붙잡을 건가요?”
에르잔은 사비나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늪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구원의 밧줄이 내려온다면 잡고 탈출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에르잔은 사비나가 한 말에 뭔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트릭이 있나 되짚어 보았지만, 이상한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늪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잡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 붙잡고 매달릴 겁니다. 그래야 늪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에르잔은 역시, 강한 사람이네요.”
“사비나 아가씨?”
“나라면 그 밧줄을 잡지 않을 거예요.”
사비나의 대답에 에르잔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그녀가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비나의 대답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간이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병으로 괴로워하거나, 일생 불구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며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어왔다.
하지만 사비나가 밧줄을 붙잡지 않는 이유가 <죽고 싶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왜 붙잡지 않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 밧줄이 가짜일까 봐, 무서워서요.”
“예?”
“늪에 잠겨가는 상황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절망이 찾아오는 상황에서. 내게 드리워진 희망이, 사실은 희망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면 어떻게 해요?”
“사비나 아가씨…….”
“붙잡지 않으면, 만지지 않으면, 그 밧줄이 진짜 나를 구원하러 내려온 거라고 희망을 품은 채로 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잡으려고 한다면…… 잡으려 했는데 잡히지 않는다면, 그러면 마지막 희망마저 깨져 버리는 거잖아요. 나는……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워요.”
제 몸속으로 파고드는 저주를 떼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외쳐 대도 아버지는 그녀에게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용기를 내기에, 희망을 가지기에 15년 동안 이어진 절망은 너무나도 깊었다.
그래서 체념하고 있었는데.
“에르잔을 만나, 이 마을에 온 이후로 나는 처음 <희망>을 봤어요.”
이런 체질이라서, 저주받은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저주의 핵을 흡수하고, 멈춰 버린 마을의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알아냈다.
이곳에서라면, 사비나는 죽음의 화신이 아니라 구원자의 가면을 쓰고 거짓된 행복에 취해 있을 수 있다.
그녀가 진실을 밝히지만 않는다면.
“나는 무서워요. 그게 사라질까 봐 두려워요. 밧줄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는데 그게 잡히지 않게 될까 봐, 허상인 것을 알게 될까 봐, 겨우 가진 희망을 더 큰 절망이 덮어 버릴까 봐,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카밀라도 처음에는 사비나를 께름칙하게 여겼지만, 곧 마음을 열었다. 그녀가 사비나에게 도움을 받은 처지기 때문에, <저주를 흡수하는 수상한 존재>를 받아들였다. 친구라고 말해 주었다. 말을 걸고 이름을 부르며 웃어 주었다.
그런데 만약 사비나가 죽음의 화신인 것을 알게 된다면.
카밀라나 마을 사람들이 저주에 익숙한 몸이기에 남들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뿐, 평범한 사람은 그녀의 몸에 닿자마자 살이 썩어 들어가 죽어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자신을 친구로 생각할까.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할까.
끔찍하다며 피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자신을 속였다며 분노하지 않을까. 사비나와 함께 했던 시간을 <끔찍한 기억>으로 여기지 않을까.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저나, 다른 이들을 믿지 않으시는 거로군요.”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에르잔의 말을 부정하려다, 사비나는 입안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믿지 않는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했다.
사비나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라는 희망을 가지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여러 번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겪어 왔다.
단 한순간도 예외가 없었다.
이번만이 예외가 될 거라고 생각할 만큼의 용기도 의욕도 자신감도 없었다.
아닐지도 모른다.
받아줄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아도, 자신들을 속였어도, 이제 와서라도 솔직히 제 정체를 밝히면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르잔은, 이 마을 사람들은, 이제까지 사비나가 만나온 어떤 이들과도 달랐으니까.
그런데도.
“미안해요, 에르잔. 미안해요…….”
사비나는 에르잔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겁쟁이일 뿐만 아니라 비열하기까지 하다.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비나에게는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여 줄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그녀를 구원하려는 듯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마주했을 때.
사비나는 그 밧줄이 진짜인지 아닌지 만져서 확인하기보다, 저것이 분명 진짜이리라 믿고 희망을 품은 채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이, <만약>이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가정을 마주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에요. 에르잔이 주군으로 섬길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어떤 충의를 바쳐도 나는 당신에게 신뢰를 되돌려주지 못해요. 그러니까…….”
더는 주종관계에 얽매이지 말라고. 사비나를 신경 쓰지 말고, 에르잔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자신을 버려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에르잔의 몸이 불쑥 가까워졌다. 그가 다가온 것이 아니라 사비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제 등을 떨리는 손길로 쓰다듬는 커다란 손 덕분이었다.
“아가씨의 곁에 있겠습니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께 믿음을 드릴 수 없다면, 믿음을 얻을 때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더는 불안해하지 않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에르잔, 아니에요.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이건 내 문제…….”
“예. 이건 제 고집입니다. 그러니 명령을 하셔도 듣지 않겠습니다.”
기사가 주군에게 감히 해서는 안 될 소리를 힘주어 말하며, 에르잔은 사비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드러난 하얀 살결에 입을 맞추자 가느다란 어깨가 흠칫 떨리며 향긋한 옷자락이 흔들렸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더듬거리며 억지로 뽑아내던 목소리가 끊겼다. 목이 멘 듯 에르잔은 눈을 질끈 감고 젖은 한숨을 토해 냈다.
에르잔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지 못했다. 주군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기사의 철칙. 주군을 지키기 위해, 주군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용감하게 적과 맞서는 것이 기사도일 텐데.
에르잔은 사비나를 두고 적과 싸우러 나가기보다, 사비나와 함께 있고 싶었다. 제 몸을 껍데기로 만들어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감싸 주고 싶었다.
적과 싸우기보다, 주군의 명예를 드높이기보다, 사비나의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했다. 그녀 자신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원했다.
그래야 에르잔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들을 베어 없앨 수 있으니까.
“아가씨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