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오딜도 한때, 로스카옌을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15년이 흐르도록 로스카옌은 교회에서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저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돌볼 뿐,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로스카옌이 범인이라면 이토록 득도 없는 일에 홀로 늙어 가며 봉사할 이유가 없다.
외부인이지만 사제로서 로스카옌의 인품은 믿고 있던 오딜은 곧 오해를 풀었다.
“네나뷔스테와 아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되면, 한번 교회에 데리고 오겠어.”
“무리하지는 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
“무리고 자시고, 네나뷔스테도 이젠 현실을 인정해야지. 여기서 우리끼리 서로 의심하고 미워해 봐야 뭐가 남겠나. 다 같은 처지인 것을.”
오딜의 대답에 로스카옌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졌으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눈물을 흘릴 자격 따위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샘은 곧 말라 버렸다.
로스카옌은 눈을 깜박여 물기를 날려 버리고는, 다시 솥 앞으로 다가갔다.
“고기가 다 익은 모양이네. 뜨거울 테니 조심하게, 오딜.”
“괜찮아. 화상 좀 입어 봐야 금방 나으니까…… 아뜨뜨!”
“것 참, 사람 말을 듣지 않고.”
“그러니까 내가 요리 같은 걸 해 봤어야 말이지…….”
구시렁거리는 오딜을 밀어내고, 로스카옌은 솥에서 고기와 감자를 골라내 큰 그릇에 퍼 담은 뒤 고기가 식지 않을 정도로만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고기 위에 소스를 얹고 양념통의 후추와 허브까지 솔솔 뿌린 뒤 그릇에 딱 맞는 뚜껑까지 덮었을 때, 돌연 뒤에서 나자예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나도 먹을래!”
“나자예프. 자네는 눈도 안 보이면서 여긴 어떻게 찾아왔나?”
“냄새를 따라서 더듬더듬 걸어왔지. 오면서 몇 번 부딪혔어.”
“허어…….”
“로스카옌, 사제 된 자로서 병들고 불쌍한 나에게 스튜 한 그릇 정도는 대접해 주겠지?”
“양심적으로 자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난 양심 같은 거 없어!”
……지금 저걸 자랑이라고 하는 소린가.
불을 끄지 않아 아직 펄펄 끓는 상태의 솥을 나자예프에게 집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로스카옌은 생각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사제로서 도움을 청하는 자를 내치고 상처 입혀서는 안 된다는 계율 때문이 아니라, 단지 노화된 몸으로는 스튜가 든 솥을 통째로 들어 올릴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튜를 만든 건 오딜이니, 먹고 싶으면 오딜에게 부탁하게.”
“로스카옌, 왜 나한테 이 머저리를 떠넘겨?”
“바르셀다를 치료하러 갈 시간이네. 그동안 오딜, 자네가 나자에프 좀 데리고 다니게.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산책을 세 시간은 시켜야 조용해지겠어.”
“나를 개 취급하지 마!”
“어디다가 성질이야, 이 개만도 못한 자식이!”
항변하는 나자예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는, 오딜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나자예프는 켁켁거리면서도 오딜을 따라갔다.
“오딜, 오딜. 내 다리로 걸을게. 옷자락만 붙잡게 해 줘.”
나자예프는 뒤뚱거리며 몸을 앞으로 돌리더니, 오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어쩐 일로 순순히 날 따라오실까? 교회를 벗어나면 저주에 걸린다며 벌벌 떨던 겁쟁이 녀석이.”
“사비나도 카밀라도 돌아가 버려서 교회에 남자밖에 없잖아. 이러다간 답답해서 죽어 버리겠어.”
“……네나뷔스테한테 손댈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사비나 하나뿐이라니까! 난 그저 남자뿐인 공간이 소름 끼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뿐이야!”
“말이나 못 하면…….”
눈이 안 보이면 청각이 예민해져,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좋아하게 된다던 말은 역시 거짓이다. 카이라트와는 정반대로 나자예프는 도리어 말이 늘었다.
원래도 헛소리를 일삼는 녀석이었지만, 앞이 안 보여 행패를 부릴 수 없게 된 한을 말로 풀기라도 하려는 듯 혼잣말이 늘어났다.
나자예프의 말에는 관심도 없지만,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게 싫었던 오딜은 휴우, 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쿠. 아가씨가 저기 오는군.”
“뭐? 사비나가?”
앞이 안 보여서 걷기가 힘드네, 냄새는 나는데 먹지를 못하니 꼬르륵거려서 힘이 안 나네, 자기 말에 대답을 안 해 주니 세상에 버림받아 혼자가 된 기분에 서러워서 못 살겠네 어쩌네 떠들던 나자예프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넘겼다.
교회의 단상 위에서 생떼를 쓰느라 옷이 다 구겨졌다는 자각은 없는 건지, 나자예프는 이마에 손을 짚고 약하게 신음했다.
“사비나, 몸은 좀 괜찮아? 나는 눈이 안 보여서……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침대에 누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걷기 훈련을 하는 중이야. 오딜이 도와주고 있지.”
“…….”
“너무 걱정하지 마, 사비나. 네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건 슬프지만…… 보이지 않아도 네 얼굴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거든. 그것만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어.”
교회의 단상 위에서 패악을 부리고 눈도 안 보이는 몸으로 냄새를 쫓아 부엌까지 따라와 고기를 달라고 외쳐 대던 걸신 들린 부랑자는 어디로 간 걸까?
오딜은 기가 차서 나자예프의 꼴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비나. 왜 대답이 없어? 혹시 목을 다쳤어? 아니면 멀어서 내 목소리가 안 들리나? 오딜. 사비나는 어디쯤 있어?”
“아가씨는 여기 없어.”
“……뭐?”
“나뭇가지를 보고 착각한 모양이야. 로스카옌을 닮아서 나도 눈이 침침해진 모양이군.”
“오딜!!”
“……푸핫!”
뿔난 망아지처럼 소란을 피우던 나자예프가 사비나라는 이름 하나에 갑자기 상식인 행세를 하는 게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스워서, 오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딜! 지금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놀린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푸하하하! 네나뷔스테 앞에서도 한번 그렇게 해 봐. 우도 대신 뼛조각이 날아올 테니!”
“아오, 좀!”
이토록 소리 내서 웃어 보는 게 얼마 만일까. 오딜은 자신이 이렇게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왔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고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호위대장이랍시고 잔뜩 잘난 체를 하고는 위험할 때 마을 사람들도 구하지 못하고 도망친 비겁자인 자신이 이렇게 웃어도 좋을까.
그러나 그에게 웃을 자격이 없다며 힐난할 이들은 어차피 과거에 모두 잠들어 버렸다. 그래서 오딜은 더욱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석양이 지는 하늘을 가득 메우는 오딜의 웃음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꼭 울음소리 같았다.
***
“읏, 으…….”
사비나가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에르잔은 깨끗하게 빤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과 목 뒤를 닦아 주고는 자세를 바꿔 주었다. 벽에 긁혀 난 생채기는 아물었으나 칼로 그은 듯한 기다란 상흔은 아직 흉터가 남아 있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오른팔의 붕대를 새것으로 갈아 주고,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었다.
하지만 열이 없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닐 터.
바르셀다가 품고 있던 분노의 핵을 흡수하는 광경은 에르잔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것이었다. 새까만 실지렁이 수백, 수천 마리가 기어올라 구멍이란 구멍 속으로 다 들어가는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에르잔이 보기에도 끔찍한 것을, 사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 내며 저주의 핵을 구체화시켰다. 사람의 몸 정도는 간단하게 삼켜 버릴 수 있을 만한 커다란 뱀을 마주하고도 조금도 두려워 않고, 팔에 흐르는 피로 뱀을 유인한 뒤 분노의 핵을 빨아들였다.
‘이번에야말로 아가씨를 지키겠다고 해 놓고, 나는…….’
에르잔은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사비나의 옆머리를 정리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에르, 잔…….”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에르잔은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사비나는 아직 눈을 뜨는 것이 버거운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나를, 만져 줘요…….”
“……예?”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얼어붙은 것도 잠시, 에르잔은 다시 조심조심 사비나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정리해 주고 어깨를 안아 자세를 고쳐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비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에르잔,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제가 무엇이든…….”
“닿고, 싶어…….”
아직 몽롱한 상태인 걸까, 의미불명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사비나가 작게 입을 벌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움직이는 촉촉한 혀가 꼭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아, 아가씨…….”
이래도 괜찮을까. 사비나는 그저 잠꼬대를 한 것뿐인데, 자신이 그녀의 뜻을 곡해해서 무례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에르잔은 고민했으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그녀의 숨에 온기가 돌아오며 작은 혀가 커다란 혀를 간질였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더욱 깊이 입을 맞췄다. 처음엔 미지근했던 그녀의 입안이 차츰 따뜻해지더니, 질척이는 타액이 달게 느껴질 즘에는 목덜미에서 땀이 흐를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사비나 아가씨.”
“으응, 음…….”
제 입안을 가득 채우던 혀가 빠져나가는 것이 아쉽다는 듯, 사비나의 혀가 입술 밖까지 빠져나왔다가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입맛을 다시듯이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꺼풀에 덮여 있던 검은 눈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비나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에르잔…….”
사비나는 아직 몽롱한 상태인 듯,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헉,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에르잔!”
“예, 사비나 아가씨.”
“여기서 나가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