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62화 (62/189)

61화

사비나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오른팔에 상처가 가득하기는 했으나 그녀의 회복이 빠르다는 사실은 로스카옌도 알고 있었다.

로스카옌은 우선 가장 급한 환자인 바르셀다를 자신의 방에 눕히고, 오갈 곳이 없는 나자예프를 기도실에 처박았다.

환자를 한 방에 몰아넣어 봐야 치료만 힘들고, 시끄러운 나자예프가 바르셀다를 깨우면 어떤 소동이 일지 몰랐으므로 두 형제는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그래서 에르잔은 기절한 사비나의 응급처치만을 받고 동쪽 오두막으로 돌아갔고, 카밀라는 사비나를 걱정해서 따라갔다가, 그녀가 편안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제집으로 돌아갔다.

오딜은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며 돌아갔다가, 이따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교회에 들러 로스카옌을 찾았다.

저주의 핵을 빼앗긴 충격이 컸는지, 바르셀다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다 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뼈가 다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었으니 차라리 깨어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며, 로스카옌은 바르셀다의 몸을 성수로 깨끗이 닦아 주고는 방에서 나왔다.

문제는 방에서 나와 미사실에 들어온 후부터 생겨났다.

“로스카예엔!”

불경하게도 단상의 제단 바로 앞에 대자로 뻗어 버린 나자예프가 소리쳤다.

“또 무슨 일인가?”

“나, 의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눈은 뇌하고 연결이 되어 있어서, 안구가 적출된 상태를 방치하면 뇌가 아래로 밀려 내려온다고 하던데.”

“……그런 이상한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나?”

“카이라트가 눈이 멀었을 때, 어차피 멀어 버린 거 눈알도 빼 버리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알려 주더라고.”

“허어…….”

저주로 맹인이 된 환자한테 가서 한다는 소리가 <어차피 안 보이는 눈 빼는 게 낫지 않겠냐>라니, 카이라트의 몸이 성했으면 아마도 화병을 던져서 머리통을 깨 버렸을 것이다. 로스카옌은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는 나자예프에게 잔소리를 해야 할지, 어차피 갱생 불가능한 쓰레기니 그냥 무시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어쩌지? 로스카옌, 나 급해. 의안 빨리 만들어 줘.”

“나는 의사도 기술자도 아닌데 무슨 수로 의안을 만들겠나?”

“아, 좀! 사제니까 가능하잖아. 성수로 어쩌고 신성력으로 저쩌고! 뭐 그렇게 안 돼?”

“그런 요술을 부릴 수 있었으면 내 얼굴부터 젊게 만들었겠지.”

“아, 그럼 어쩌지? 나 눈이 없어서, 뇌가 흘러내리면 어떻게 해? 천천히 죽어 가면 어떻게 하냐고!”

나자예프가 팔다리를 구르며 언성을 높였다. 어린애나 할 법한 떼쓰는 광경에 로스카옌은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나자예프의 왼쪽 손을 꾸욱 발로 밟았다.

“아파! 무슨 짓이야, 로스카옌!”

“감각신경은 정상이로군.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나는 지금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 초조해 죽겠는데, 지금이 농담이나 할 때야?”

“그럴 때라네.”

로스카옌이 발로 툭툭 나자예프의 관자놀이를 차자 그가 성을 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로스카옌이 있는 방향을 향해 휙, 주먹을 휘둘렀으나 보이지 않는 까닭에 주먹은 허공만 맴돌다가 바닥에 쿵 내려왔다.

“로스카옌! 좀 진지하게……!”

“입 다물어, 나자예프!”

교회 문을 쾅, 발로 열고 들어온 오딜이 진저리 치며 철퍽, 사냥감인 노루의 몸을 바닥에 팽개쳤다.

죽은 짐승의 피가 바닥과 의자에 튄 것을 보고 로스카옌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오딜에게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사내자식이 여태 동생한테 아픈 거 다 떠넘기고 칠렐레팔렐레 돌아다니더니만, 앞 좀 안 보인다고 더럽게 징징거리네!”

오딜이 사냥을 나가기 전, 꼭두새벽부터 나자예프는 죽는소리를 하며 제단 앞의 단상에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아무리 답이 없는 인간쓰레기라지만 설마 해가 넘어가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일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오딜이 느꼈을 짜증과 한심함과 환자고 뭐고 한 대 치고 싶은 분노에 깊이 공감한 로스카옌은 말없이 다가와 죽은 짐승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나 잡아 왔나? 너무 많은데.”

“안 많아. 한 마리는 네나뷔스테한테 가져다줄 거니까.”

“아, 그렇군.”

바르셀다와 나자예프는 교회에, 사비나는 에르잔과 함께 원래 머물던 동쪽 거처에, 카밀라는 제집으로 돌아갔지만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은 아직 오딜이 돌보는 상태였다. 다섯 사람 몫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일 터.

로스카옌은 가볍게 수긍하고는 돌아섰다.

“주방 솥이 그리 크지 않으나 해체해서 삶아야 할 게야. 나도 돕도록 하지.”

“그럼 고맙지. 돕는 김에 빵도 좀 나눠 줘. 애들은 단 것을 좋아하잖아? 자네가 굽는 빵은 맛이 달거든.”

“로스카옌, 나도 빵! 나도 고기!”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는 닥치고 있어!”

“쓰레기라니 말이 심하네, 오딜! 나 온종일 굶은 거 알아?”

“온종일 굶은 놈이 무슨 목소리가 그렇게 커?”

시간이 멈춘 이 마을에서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아사하는 일은 없지만, 배고픔은 느낀다.

로스카옌은 식사를 할 때나마 조금이라도 근심을 잊게 만들기 위해 맛있는 빵을 구워 카밀라와 카이라트에게 가져다주었다.

남쪽 구역에는 갈 수가 없어 전해 주지 못했지만, 이참에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었던 로스카옌은 걸음을 빨리했다.

“오딜, 앞으로는 사냥감은 바로 부엌으로 가지고 오게. 교회 밖으로 도로 옮기는 건 번거롭잖나.”

“그러려고 했는데, 나자예프 녀석이 징징거리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리잖아. 확 짜증이 나서 들이닥쳤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정작 뼈가 다 으스러지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바르셀다는 조용한데…….”

“저기, 내 욕하는 거 다 들리거든? 도와줄 거 아니면 나가서 얘기해!”

나자예프가 화가 난 듯 단상을 쾅! 내려치더니, 손바닥이 아팠는지 주먹을 다시 감싸고 앓는 소리를 냈다.

로스카옌은 한심해서 더 말도 섞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엌으로 향했고, 오딜은 혀를 끌끌 차고서는 노루 두 마리를 다시 양어깨에 둘러메고 로스카옌의 뒤를 따랐다.

교회를 나오자마자 오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15년 동안 피하고 있던 저주를 되돌려 받은 것치고는 기가 막힐 정도로 멀쩡한데, 왜 저렇게 엄살이야? 나자예프는.”

“눈이 녹아내렸으니 뇌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의안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어제부터 계속 그 소리만 하더군.”

“녹아내리긴 뭘 녹아내려? 핏발이 서서 그렇지 두 눈 멀쩡하게 박혀 있던데.”

“그러게 말이야. 앞이 안 보인다는 걸 보니 아마 각막이 손상된 모양인데, 저 정도면 며칠이면 회복될 게야.”

“그럼 나자예프한테 사실대로 말해 주면 되잖아? 저 징징거리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느니…….”

“바르셀다가 고생한 게 몇 년인데, 저놈도 눈이 다 나을 때까지 동생의 고충을 일부나마 느껴 봐야지 않겠나.”

“아하, 그건 그렇군.”

<눈이 녹아내렸다>고 나자예프는 주장했으나, 실제로 흘러내린 것은 그의 눈에 깃든 보호의 각인이었다.

제물을 술자로 착각하게끔 만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눈동자의 색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 가운데 시각이 가장 큰 영향력을 차지하기 때문일까. 주술도구를 사용해 눈동자 색을 바꾸면 저주는 술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각인을 새긴 다른 제물에 엉겨 붙는다.

“나자예프 녀석 눈에서 청록색 진물이 뚝뚝 떨어지길래 나도 눈동자가 녹는 줄 알았는데.”

“보호막이 빠져나가면서 각막에 손상을 입힌 게지. 저 형제들 눈은 원래 붉은색이잖나.”

“아, 그랬지.”

15년이나 지나면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나자예프의 눈동자 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던 오딜은 로스카옌의 말에 그제야 수긍했다.

교회를 나와 멀찍이 떨어진 주방에 도착한 오딜은 짐승의 배를 갈라 뼈와 장기를 해체하고 고기 부분을 도려냈다.

그 사이에 로스카옌은 찬장에서 빵조각을 꺼내 오딜의 입에 물려 주었다.

우물우물. 빵을 꿀꺽 삼킨 오딜은 눈으로만 고맙다는 듯 인사했다.

“네나뷔스테와 동생들의 상태는 어떤가?”

“줄디즈는 원래 상처가 없었고, 아이베크는 탁 트인 공간에 나오니 덜 무서운지 좀 기운을 차렸어. 그런데 네나뷔스테의 양팔과 자니베크의 등에 남은 화상은 사라지지가 않더군. 진물이 나오는 건 멈췄는데, 아무래도 흉터가 남을 것 같아.”

“이런…… 두 아이가 에르잔을 원망하겠구먼.”

“어쩌겠나.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으니 다행이지.”

오딜은 가죽을 벗겨 낸 생고기를 솥에 넣은 후 물을 부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로스카옌이 맡았다. 솥의 고기가 익을 동안 오딜은 피가 줄줄 흐르는 생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오딜. 익혀 먹지 않고.”

“난 이거면 돼. 로스카옌, 소스 좀 만들어 줄 수 있나? 난 요리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네나뷔스테와 아이들이 먹을 음식이기에 신경 써서 익히는 것뿐, 오딜이 생고기를 뜯어먹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한 지는 오래되었다. 오딜은 입가와 옷깃에 붉은 피가 묻어나는 데도 개의치 않고 선 채로 식사를 했다. 로스카옌은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채소를 손질하여 솥에 넣고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보다 어린 나이인데, 아무리 봐도 제 아버지뻘로 보이는 로스카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딜은 입가에 묻은 노루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로스카옌. 이따가 함께 네나뷔스테를 보러 가겠어?”

“아닐세. 교회를 비울 수는 없지.”

“어차피 바르셀다와 나자예프밖에 없잖나. 바르셀다는 아직 자고 있고, 나자예프야 뭐…… 내버려 두는 게 정신 건강에 좋고.”

“네나뷔스테는 내가 이 마을에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게야.”

“하긴…… 아. 아니, 나도 자네가 피해자라는 건 알아.”

오딜은 가볍게 수긍했다가 얼른 고개를 털며 부정했다.

저주가 깃들지 않는 교회. 그 교회에서 홀로 타인의 두 배나 나이를 먹어가는 외부인 사제.

오딜도 한때, 로스카옌을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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