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61화 (61/189)

60화

“나자예프!”

“잠깐, 잠깐! 나 괜찮아! 사비나, 위험하니까 비켜!”

마지막 순간에라도 사비나를 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기였는지, 아니면 저주를 되돌려 받으며 양심도 함께 되돌아온 건지, 나자예프는 긴 다리로 바르셀다의 턱을 걷어차서 밀어냈다.

바르셀다가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나자예프도 나자빠졌다.

“크헥!”

“아윽!”

바닥에 제대로 머리를 찧은 바르셀다와는 달리 나자예프는 옆으로 엎어져 뇌진탕으로 기절하는 사태만은 면했다.

그는 바르셀다의 공격에 다시 대비하기 위해 일어나려다, 다시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나자예프!”

“사비나, 거기 있어? 불이 꺼졌나 봐!”

나자예프가 허공에 손을 뻗고 사비나를 불렀다. 지하를 환하게 밝히는 황금빛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자예프가 그 빛을 볼 방법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의 두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자예프, 당신 눈이……!”

“응? 내 눈이 왜? 나 지금 눈이 먼 거야? 안 보이는데?”

청록색의 액체가 주르륵, 양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나자예프는 그제야 제 눈에서 뭔가 흘러내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손등으로 그것을 닦으려 했다.

“만지면 안 돼요, 나자예프! 저주를 내가 흡수할 테니까……!”

“아니, 눈 안 보이는 거 말고는 버틸 만한데? 나 괜찮…… 흡!”

죽을지도 모른다며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것과는 달리, 시각만 잃어버리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몸속의 내장이 전부 꼬이는 듯한 섬뜩함이 일더니 배 속에서 목구멍을 거쳐 울컥, 뜨거운 액체를 토해 냈다.

치이익. 나자예프가 토해 낸 검은 액체가 기화하는 것을 본 사비나는 달려들 듯이 나자예프를 끌어안았다.

“나자예프, 죽으면 안 돼요!”

“우웁……! 웩……!”

“왼팔, 아니, 왼쪽으로 기대요!”

상처투성이인 오른팔에서 흐르는 피가 혹 나자예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되었던 사비나는, 오른팔을 등 뒤로 숨기고 왼팔로 나자예프의 머리를 힘껏 끌어당겼다.

“괜찮아요, 나한테 다 토해 내도 괜찮으니까…… 의식을 잃으면 안 돼요!”

“쿨럭! 커헉……!”

사비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뒷덜미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자예프가 저주를 토해 내느라 계속 머리를 움직인 탓에 옷자락이 흘러내렸으나 사비나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향긋하고 보드라운 살덩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아마도 나자예프에게 이성이 남아 있었더라면 쾌재를 불렀을 법한 상황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욱…… 나 죽어…….”

빛이 보이지 않는 데다 이명이 귀를 때려서 나자예프는 제가 토해 내는 게 저주인지, 피인지, 아니면 내장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사비나가 뭔가 외치는 소리에만 집중했다.

“나자예프. 잠들면 안 돼요!”

“사비……나…….”

이것이 그녀의 능력일까?

저주를 흡수한다기에 뭔가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들 줄 알았는데,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던 내장들이 천천히 몸 안에 자리 잡는 느낌이 드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나자예프는 커헉, 마지막 저주를 토해 내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이봐, 아가씨! 아직 멀었어? 바르셀다 녀석, 벌써 꿈지럭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고!”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주세요, 오딜!”

“이런 젠장. 말이 쉽지!”

오딜이 발에 채는 벽돌을 들어 올려 바르셀다의 이마에 퍽,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바르셀다의 비명이 한층 높아졌으나 사비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자예프…….”

“우우…….”

내장들의 위치가 바뀌기라도 한 건지, 머리에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장만 꼬인 게 아니라 팔다리도 녹아내렸다가 다시 재조립된 것처럼 어디가 제 팔이고 어디가 제 다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짐승이 포식자를 피해 굴에 머리를 처박고 피했다고 안심하듯, 어둠 속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 주니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아, 하아…….”

“전부, 전부 나한테 흘려보내세요. 괜찮으니까, 남김없이…….”

뭘 흘려보내라는 걸까. 이미 제 피에 눈물에 침까지 줄줄 흘러내린 것 같은데.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는 착잡함이 들었다가, 그래도 쪽팔리다는 생각을 할 정도면 아직 이성이 남아있기는 하다는 생각에 나자예프는 후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육체적인 괴로움이 가라앉은 자리에 수치심이 차오르니 정신적으로 괴롭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살아 있어야 이미지 회복도 하지 않겠나.

“아냐. 기다리면 기회는 또 올 거야…….”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나자예프는 다음 기회에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가 올 거라는 의도로 말한 것이었으나, 사비나는 그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지금 완전히 그의 저주를 흡수해서 끝내 버리겠다고 받아쳤다.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 품속의 나자예프가 움찔, 몸을 굳히는 것 같았으나 그게 통증으로 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비나는 제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자예프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녹아내린 눈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듯했지만, 그의 입에서 더 이상 검은 저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딜! 나자예프를 부탁해요!”

“이것 참, 손바닥만 한 아가씨가 부탁할 것도 많네! 돈이나 주고 부려먹든가!”

오딜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재빨리 몸을 굴려 황금빛 불길 사이를 빠져나와 나자에프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꽥!”

“오딜, 나자예프는 아직 안정이 필요해요!”

“다들 목숨 걸고 있는데 혼자서 늘어져 있는 녀석이 뭐 예쁘다고. 죽을 팔자였으면 아가씨가 수습하기도 전에 죽었겠지.”

짐짝을 둘러메듯 휙, 나자예프를 둘러업은 오딜이 계단 위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직 동이 트지는 않았으니, 빠져나갈 기회는 지금뿐이다.

“아가씨, 일단 지금은 뒤로 빠졌다가 재정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뇨. 지금밖에 없어요.”

황금빛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태워 없애야 할 저주를 거의 다 태워 버린 까닭이다. 불길이 사그라지는 것을 바르셀다도 눈치챘는지, 짐승처럼 네 발로 일어나 푸르르, 몸을 털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 털이 후드득 흘러 떨어지고, 근육으로 꽉 짜인 남자의 몸이 드러났다.

“죽……인다……!”

털투성이 상태를 벗어난 바르셀다의 얼굴 생김새는 나자예프와 전혀 달랐다. 형제간에 소원하다더니만, 설마 친형제가 아닌 걸까. 바르셀다의 붉은 눈동자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에르잔. 오딜. 오딜의 등에 업힌 나자예프. 그리고 사비나.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 본능만이 남은 분노의 핵이 질주할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오딜, 뛰어요!”

“젠장, 이 쓰레기 자식은 도움도 안 되는데 무겁기까지 하네!”

오딜이 욕설을 퍼부으며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사비나는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려 거친 돌벽 위에 제 살갗을 문질렀다.

베인 상처 위에 돌벽에 긁힌 상처까지 더해져, 그녀의 팔과 돌벽에 묻어난 붉은 피는 곧 진득한 검은 액체로 변해 버렸다.

치익. 바닥에 떨어진 액체가 기화하는 소리를 듣기 무섭게, 바르셀다는 사비나의 오른팔을 물어뜯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사비나 아가씨!”

“오지 마세요, 에르잔! 당신이 바르셀다를 붙잡으면……!”

퍼억!

단단한 돌기둥이 바르셀다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

“하아…… 괜찮, 으십니까?”

직접 손을 댈 수는 없고, 검으로 공격하다가 사지가 잘려 나가기라도 하면 안 되니 무너져 내린 석벽의 기둥을 뜯어내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오딜은 바르셀다의 힘이 상상 초월이라고 말했지만 사비나로서는 에르잔이 기둥을 뜯어내 휘두른다는 사실이 더 믿기 힘들었다.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사비나는 기둥에 맞아 널브러진 바르셀다가 끄윽, 하고 앓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바르셀다의 핵을 흡수할게요. 에르잔, 당신은 물러나요!”

“기다리십시오. 놈이 아가씨를 공격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쿵!

에르잔이 다시 돌기둥을 휘둘러 바르셀다의 어깨를 내리쳤다. 우드득,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르셀다의 팔이 거꾸로 돌아갔다.

“에르잔, 그만!”

사비나는 바닥에 엎어진 바르셀다를 감싸듯 그의 위에 엎드렸다. 말만 사지를 자르지 않는다는 것이지, 기둥으로 뼈를 완전히 으스러뜨릴 기세였던 에르잔의 손이 멈추었다.

“사비나 아가씨!”

“방해하지 마세요! 명령이에요!!”

사비나는 한 번도 자신이 에르잔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으나, 다급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외치려니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명령.

그 단어에 섞여 든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사비나의 외침을 들은 에르잔은 주춤거리더니 쿵, 기둥을 놓쳐 버렸다. 사비나는 얼른 바르셀다의 위에 엎드려, 그의 저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크악! 아, 파……!”

“얌전히 있어요, 바르셀다!”

“아파, 너무 아파……! 아파……!”

한쪽 어깨가 완전히 돌아간 데다 나머지 팔다리도 정상과는 거리가 먼 탓에, 바르셀다는 벌레처럼 배로 기어 사비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바르셀다가 그녀를 깨물려 하자, 사비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입에 반쯤 부서진 벽돌을 처넣었다.

우드득! 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르셀다의 눈이 뒤집어졌다. 사비나는 바르셀다의 목에 팔을 걸고, 후읍,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그의 미간에 입을 맞췄다.

“그르륵…….”

하얗게 뒤집어졌던 눈이 돌아가 빨간 눈동자가 얼핏 비치더니, 이번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곧이어 피가 흐르는 바르셀다의 입에서 꾸물꾸물, 실지렁이 같은 것이 한두 마리씩 기어 나오더니 사비나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꾸물.

꾸물.

처음엔 몇 마리였던 검은 실지렁이는 이내 수십, 수백 마리로 늘어나더니, 바르셀다의 입에 물려 있던 벽돌을 밀어내고 쏟아져 나왔다. 바르셀다와 사비나의 양팔에 가득 달라붙은 새까만 저주의 핵을 목도한 에르잔이 소리쳤다.

“사비나 아가씨……!”

“방해하지, 말…… 아!”

스멀거리는 저주의 기운이 옷 속으로 기어들어 오더니 피부를 지나 입과 콧속으로, 귓구멍 속으로까지 파고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사비나는 거부하지 않고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벌레가 아니야. 더 큰 뱀이나…… 그래. 구렁이……!’

보기 징그러울 만큼 꾸물거리며 매달려 있던 검은 실지렁이가 차츰 하나로 뭉치더니, 이내 남자의 허벅지만 한 몸통을 길게 뻗었다가 후르륵 휘감았다.

'분노의 핵은 뱀 모양이라고 나자예프가 그러더니만, 정말이었네.'

저를 노려보는 커다란 뱀을 마주하고도 사비나는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저주의 핵이 아니라 진짜 구렁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그 어떤 저주도, 그 어떤 맹수도, 벌레도, 청천벽력과 같은 재난마저도.

원치 않는 살인을 반복해야 하는 삶만큼 끔찍하지는 않으니까.

“이걸 원하나요?”

사비나가 아직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검은 뱀은 크게 몸부림치더니 커다란 입을 벌려 그녀의 팔을 삼키듯이 물었다.

“사비나 아가씨!”

이번에야말로 걱정은 무의미했다. 금방이라도 사비나의 팔과 함께 몸통까지 삼켜 버릴 것 같았던 커다란 뱀은, 그녀의 피가 닿는 부위에서부터 녹아들듯이 형태가 무너지더니 긴 상흔과 엉망으로 난 생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었다.

“후우. 이번에는 확실하게 성공했네요.”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바르셀다가 많이 다쳤어요. 이 사람을 교회로 옮겨야…….”

거기까지 말하고, 사비나는 의식을 잃었다. 에르잔이 그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사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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