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60화 (60/189)

59화

에르잔이 일으킨 황금빛 불꽃은 저주를 태우는 정화의 힘. 실제 불길이 아니었으나 바르셀다는 본능적으로 불길을 피해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뱀의 몸이 타들어 가며 불길이 번지자 피할 곳은 곧 사라졌다. 벽에, 천장에, 바닥까지 뱀의 몸이 기어 다니던 자리를 따라 황금빛 불꽃이 따라 들어오자 바르셀다는 다급하게 검은 뱀의 허리를 잘라 냈다.

철퍼덕!

머리를 잃은 뱀의 몸뚱어리가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잘려 나간 뱀의 몸체가 바르셀다의 주위에 원형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바르셀다는 제 주위를 휩싼 불꽃을 보고 당혹스러운 듯이 붉은 눈을 굴리더니, 키엑, 하고 비명을 질렀다.

“불에 타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라, 바르셀다.”

“애송이. 저놈은 지금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야.”

“본능만 남아 있기에 전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바르셀다에게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벽과 바닥, 천장에까지 불길이 번졌는데 아무런 연기도 나지 않는 것과, 뱀의 몸체가 닿았던 자리 너머로는 불길이 번지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본능만이 남은 바르셀다는 <불에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존본능에 충실하게 불길에 닿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고. 그르렁거리며 눈을 굴려 달아날 장소를 찾는 일에 집중했다.

“일단 가둬 놓긴 했는데…… 애송이. 이게 끝인가? 이대로 아가씨가 내려올 때까지 버틸 셈이야?”

“아닙니다.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에르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르셀다를 가둘 기세로 타오르던 불꽃의 한 부분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바르셀다는 펄쩍 뛰어올라 불길이 없는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오딜과 에르잔이 있는 위치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지만, 저주를 남김없이 태우고 나면 이 불꽃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애송이. 어쩔 셈이야? 저거, 불꽃이 꺼지면 바로 달려들겠는데?”

“그래서 모아 왔습니다.”

“뭘 모아 와?”

에르잔은 망토를 펼치고는, 허리춤의 포켓을 열어 그 안에 있던 것을 전부 망토 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망토째로 크게 휘두르자, 검은 부스러기가 지하 곳곳에 흩어졌다.

“불씨를 꺼뜨려서는 안 되니까요!”

“허어?”

에르잔이 저주를 불태우는 힘을 지녔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 때나 발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기 상황에서는 저도 모르게 정화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으나, 처음 이 교회의 벽면을 만졌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비나가 정화를 해 보라며 쥐여 준 검은 꽃도, 에르잔이 더러운 것을 닦아 낸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그의 손 안에서도 무사했다.

그래서 에르잔은 첨탑 주위를 돌며 저주에 물든 꽃과 잎사귀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부서진 울타리의 파편이나 돌멩이까지 잊지 않고 챙겨 온 까닭에 몸이 꽤 무거웠으나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움직임에는 무리가 없었다.

“바르셀다, 왼쪽으로 피해!”

에르잔이 흩뿌린 낙엽과 먼지 더미에서 황금빛 불꽃이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바르셀다가 있는 지하의 벽 끝까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에르잔이 오른쪽 벽을 따라 불을 붙인 까닭에 바르셀다는 왼쪽으로 바짝 붙어 거미처럼 벽을 타고 빠져나왔고, 두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왔을 때 에르잔은 발밑의 낙엽을 걷어차 불꽃을 일으켰다.

“키에엑!”

오딜과 에르잔을 향해 달려들려던 바르셀다가 황급히 몸을 당겼다.

그러나 오른쪽 벽면은 온통 불꽃으로 가득하고, 자신과 두 남자의 사이도 불길이 가로막고 있다.

바르셀다는 몸을 움츠린 채로 씩씩거리며 도망칠 장소가 없는지 붉은 눈을 열심히 굴렸다.

그때였다.

“에르잔!”

위에서 뛰어 내려온 사비나와, 혹시라도 불이 옮겨붙을까 봐 불길이 꺼진 자리만 깡총거리며 내려오는 나자예프의 모습이 보였다.

“사비나 아가씨, 어떻게 나오신…… 나자예프의 저주는요?”

“바르셀다의 상태는요?”

서로 다급하게 질문을 건네고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에르잔은 나자예프의 오른손에 아직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고, 사비나는 황금빛 불길에 에워싸여 오도 가도 못하고 가쁜 숨을 내쉬는 바르셀다를 보고 숨을 삼켰다.

“에르잔,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사비나 아가씨께서 나자예프의 저주를 전부 흡수할 때까지, 제가 바르셀다를 제압하고 있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계획했던 건 이런 게 아니라고요!”

“제게도 계획이 있습니다!”

에르잔이 언성을 높이자 사비나는 흠칫 놀라 발을 뒤로 빼려다 계단에 걸려 휘청거렸다.

“사비나!”

나자예프가 얼른 사비나의 몸을 안아 일으키자, 바르셀다의 비명이 다시 높아졌다.

“나자예프, 손 치워요!”

“아니, 나는 너 넘어지는 거 잡아 준 건데…….”

“당신한테 가는 저주는 전부 바르셀다가 받는다면서요!”

나자예프가 사비나를 만지면, 그 반동은 자연히 바르셀다가 입게 된다. 사비나는 나자예프로부터 떨어져, 불길 너머의 바르셀다를 마주했다.

“크르르르…….”

전에 마주쳤을 때는 더듬더듬 단어라도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 바르셀다는 인간의 언어를 아주 잊어버린 듯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않았다.

어두운 지하를 밝히는 황금빛 불꽃 아래서, 짐승처럼 검은 털로 뒤덮인 바르셀다의 몸은 한층 더 거대해 보였다. 그가 불을 피하려 몸을 웅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렇게 거대하고, 괴물 같은 존재인데. 황금빛 불꽃에 제 몸이 타들어 갈까 두려워 몸을 움츠리고 팔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제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계하는 모습은 흡사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인간의 이기심으로 놓은 덫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부짖기만 하는 커다란 짐승.

어쩌면 그것이 정확히 바르셀다의 처지를 의미하는 건지도 모른다.

“애송이의 작전이랑 아가씨의 작전이 충돌하는데, 어떻게 할까? 합이 안 맞으면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죽어. 어떤 방식을 택할지 빨리 결정해.”

오딜이 쯧, 혀를 차며 보채자 사비나는 눈을 가늘게 했다. 에르잔은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나자예프. 나한테서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요.”

“사비나?”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는 훅, 불길을 뚫고 들어갔다. 바르셀다가 왼쪽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던 까닭에, 사비나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그의 뒤로 갈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진 사다리꼴로 일어난 불길은 바르셀다가 있는 장소를 착실히 감싸고 있었다.

“나자예프. 여기서 반지를 빼면, 바르셀다가 누구를 공격할까요?”

“어? 그게…… 나, 나겠지?”

“그럼 제 뒤로 숨으세요.”

“뭐?”

사비나는 나자예프의 앞에 서서, 불길 너머의 바르셀다를 마주했다.

분노의 핵을 담고, 나자예프의 저주까지 대신 받는 처지에, 빛도 들지 않는 동쪽 첨탑의 지하에 갇혀 15년을 괴로워했다. 붙잡히면 사람의 몸도 종잇조각처럼 찢어 버릴 만큼 강한데도, 그저 지하에 갇혀 웅크리며 신음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통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사비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자예프. 바르셀다의 저주의 핵을 흡수하려면, 주술도구를 먼저 제거해야 해요.”

“아, 알아…….”

“이 불꽃이 꺼지기 전에 반지를 빼고, 내 손을 잡으세요.”

사비나는 나자예프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왼손을 뒤로 뻗었다.

“사비나. 네 손을 잡으라고?”

“왼쪽이에요. 오른쪽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바르셀다의 주의를 돌려야 하거든요.”

왼손으로는 나자예프의 저주를 흡수하고, 오른팔은 바르셀다에게 물어뜯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자예프가 아니라 자신을 향하도록 유인하겠다는 말이다.

미끼가 되는 일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사비나의 모습에, 에르잔은 창백해졌고 나자예프는 울상을 지었다.

“아냐. 젠장……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나자예프?”

“물러나, 사비나. 바르셀다를 다루는 법은 내가 잘 안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나자예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사비나의 말에 의하면 분명 천장과 벽면을 감싼 황금빛 불꽃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목 안에서 타는 듯이 메마른 열기가 올라왔다.

“……바르셀다.”

“크르르…….”

검은 털로 뒤덮인 붉은 눈의 짐승이 나자예프를 마주했다. 원래는 자신과 똑같아야 할 눈동자 색이 바뀐 것이 이상하다는 듯이, 눈꺼풀이 두어 번 내려왔다가 올라왔다.

분노가 깃든 붉은 눈동자에 경계와 의혹, 그리고 이상한 적개심이 섞여 들었다.

나자예프는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걸어 나와, 바르셀다를 달래기 시작했다.

“한심한 형이라서 미안하다. 이제 와서 사과……라고 해 봤자 어차피 늦었겠지만, 그래도 바르셀다. 너도 알고 있지? 여기서 날 찢어 죽여 봤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동생을 달래 주는가 했더니만 더 화를 돋우고 있다. 아니, 시비를 걸고 있다고 해야 하나. 나자예프가 죽어도 이 마을의 저주는 풀리지 않고, 바르셀다가 분노의 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건 가해자인 나자예프가 입에 담아서는 결코 안 될 말이다.

“나자예프.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요?”

“나는 사과 같은 거 해 본 적 없단 말이야! 어차피 형제라고 해도 남보다 못하다고 할 만큼 소원한 사이였고…….”

“키에에엑!”

바르셀다의 괴성이 급격히 높아졌다.

“이런 젠장, 저 망나니가!”

“사비나 아가씨!”

오딜과 에르잔이 말리러 뛰어들기도 전에, 바르셀다는 쿵, 발을 구르며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천장의 불길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뻗었다.

순간이었지만, 마치 팔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자예프!”

“으왓!”

검은 털에 피가 엉겨붙은 긴 손가락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바르셀다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듯 했다.

털로 뒤덮인 바르셀다의 손이 나자예프의 손과 가까워진 순간, 사비나의 귀에만 들리던 음침하게 꿀렁거리던 소리가 쨍, 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자석의 서로 다른 극이 끌어당기듯 바르셀다의 손과 나자예프의 오른손이 맞붙었다.

“으아아아악!”

손바닥이 맞닿고, 손가락이 맞물리며 반지가 맞닿은 순간, 저주를 피할 대상과 제물을 분리하던 주술도구는 칼날 같은 빛으로 나자예프의 두 눈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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