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마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음성에 잠시 사비나가 주저하던 사이, 아래쪽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바르셀다의 비명이었다.
“나자예프! 바르셀다도 새벽에는 잠든다면서요?”
사비나의 질문에 당황하기는 나자예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보통 이 시간에 자는 거 맞거든? 저건 분명 지금 깬 목소리야!”
“에르잔과 오딜이 벌써 지하로 내려갔다는 거예요? 아래가 꽤 깊었…….”
거기까지 말하고, 사비나는 흠칫 몸을 경직시켰다.
어찌나 비좁은지 이렇게 가까이서 몸을 부대끼는데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나자예프의 오른쪽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의 빛은 보인다.
빛이 아니라 주술이기에 볼 수 있는 걸까.
주술상으로 동쪽이 의미하는 바는 아침.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 바르셀다를 깨운 것은 분노의 핵으로 인한 괴로움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나자예프, 나한테서 떨어져요!”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능해? 나도 최대한 버티고 있는 거라고!”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도 빠듯한 공간에 두 남녀가 들어갔으니 필연적으로 몸이 맞닿을 수밖에 없다. 나자예프는 사비나를 압박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뒤로 몸을 빼려 했으나 등 뒤로 느껴지는 닫힌 문은 잠금쇠를 단단히 채운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내 저주가 바르셀다를 깨웠다고요!”
사비나와 몸이 닿으면 저주에 물든다. 저주에 익숙한 카밀라나 로스카옌, 오딜이라면 가벼운 접촉은 문제가 없겠지만, 나자예프는 다르다.
그는 주술도구인 반지를 통해 모든 저주의 반동을 동생인 바르셀다에게 넘겨주고 있는 상황.
나자예프가 사비나와 몸이 맞닿아도 멀쩡한 것은 그가 저주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가 받아야 한 저주의 고통을 바르셀다가 대신 받아 주고 있기 때문.
‘내 죽음의 저주는 바르셀다의 분노의 저주와 상성이 맞지 않아. 상처를 냈을 때도 서로 교환하는 형태였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면 멀쩡할 리가 없어.’
바르셀다를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사비나는 어둠 속에서 벽면을 더듬었다. 다행히 이 창고인지 사물함인지는 강철이 아니라 나무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자예프. 힘으로 부술 수 있겠어요?”
“뭐를? 이 벽을? 내가 에르잔도 아니고…….”
“오딜이 준 단검을 써야겠네요.”
“사, 사비나, 잠깐만! 나 아직 도망 안 쳤어!”
사비나의 말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나자예프가 기겁했다. 좁은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게 때려, 사비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 오딜은 이가 빠져 무딘 단검을 단상의 널빤지에 콱 박아 넣었다. 날이 무뎌졌을 뿐 경도가 떨어진 것은 아니니, 벽면에 단검을 꽂아 넣어 판자를 뜯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다만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사비나의 힘으로는 벽에 검을 박아 넣기 힘들었다.
“나자예프. 당신이 박아 봐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으, 응? 어디에 뭐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 이 손 치워요!”
“악! 사비나, 그거 손 아니야!”
은근슬쩍 다리 사이를 더듬으며 파고드는 나자예프의 손을 꼬집자 그가 꽥 비명을 질렀다. 반응을 보니 그녀가 꼬집은 게 정말로 손등이 아닌 모양이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사비나는 난감해졌다. 나자예프에게 단검을 쥐여 주려 했으나, 팔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만큼 비좁은 데다 보이는 것 하나 없는데 감만으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나자예프.”
“너무 그러지 마. 이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
“입 다물고,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지금 이 자세 그대로 있어요.”
“뭐?”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요. 당신 동생이 죽을지도 모르니까.”
사비나는 쥐고 있던 단검을 거꾸로 쥐고, 제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세로로 그어 버렸다. 타는 듯한 아픔과 함께 그녀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고통은 익숙했다. 어둠 속에서 있는 것도 익숙했다. 그러나 나자예프에게 피가 튀지 않도록,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사비나는 자세를 바꿔 나자예프의 몸을 한쪽 벽으로 밀어 버리고, 반대쪽 벽면에 제 팔을 문질렀다. 치이익. 연기와 함께 벽면의 나무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에도, 통하는구나…….’
에르잔이 저주가 깃든 검은 꽃을 불태워 버린 것을 보고 시도해 본 것인데, 효과가 있었다.
나자예프와 사비나 두 사람을 가두고 있던 비좁은 사물함의 한 면이 썩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돌에는 효과가 미미하고, 철은 부식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테지만 널빤지 하나가 썩어 무너지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삐걱거리며 판자 하나가 떨어져 나가자 밖의 공기가 들어왔다.
사비나는 떨어진 널빤지 사이로 팔을 내밀었다. 아직 피가 멈추지 않은 팔을 벽에 대고 비비듯이 문지르자 나머지 널빤지도 빠른 속도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덜커덩.
겨우 사물함의 한쪽 벽면을 부수고 나왔을 때는, 사비나의 한쪽 팔이 상처로 엉망이었다.
덤으로 나자예프의 영혼도 상처를 입은 상태였으나 그 사실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비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에르잔과 오딜이 내려갔을 지하로 향하려던 사비나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이게…… 뭐죠?”
“아으으…… 뭐야. 에르잔이 불이라도 지른 거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벽면을, 온통 황금색 불길이 감싸고 있었다.
***
사비나와 나자예프를 사물함에 욱여넣듯이 밀어 버린 에르잔이 문을 닫고 걸쇠를 채우자, 오딜이 황당하다는 듯이 에르잔을 불렀다.
“이봐, 애송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자예프가 도망치면 곤란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비나 아가씨께서 나자예프의 저주를 흡수하는 데 집중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드렸을 뿐입니다.”
“아니, 그 아가씨를 저렇게 가둬 두면 무슨 수로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해?”
“사비나 아가씨를 지키는 것은 제 임무니까요. 바르셀다를 완전히 제압하고 아가씨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 열어 드릴 생각입니다.”
“연습을 하겠다더니만 자살 시도 연습을 한 거야? 이 미친놈이 어쩌자고……!”
“오딜. 한 걸음 떨어져서 따라오십시오.”
에르잔은 오딜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제 망토를 벗어 움켜쥐었다.
‘내 힘은 저주의 주술과 대상을 나누지 않고 태워버린다고, 분명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에르잔이 꽃을 불태웠을 때, 바닥의 다른 잡초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네나뷔스테가 양팔에 화상을 입은 건 에르잔이 직접 붙잡았을 때뿐으로, 온몸에 가시가 돋친 자니베크의 등에 화상을 입혔을 때는 분명 네나뷔스테도 함께 자니베크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음에도 추가로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마을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에 가득하다는 말을 듣고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무슨 실험?”
“이렇게.”
에르잔이 움켜쥔 망토로 벽을 닦아 내듯 문지르자, 벽면의 벽화가 황금빛 불꽃으로 불타올랐다.
벽면에 붙어 꾸물거리던 실지렁이 형태의 저주들이 에르잔이 일으킨 황금빛 불꽃에 깡그리 재가 되어 버렸다.
“애송이. 지금 여길 다 태워 버릴 셈인가?”
“이 불은 오딜, 당신에게는 옮겨붙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몸에만 닿지 않도록 떨어져서 내려오십시오.”
에르잔의 발이 닿은 자리에서 황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벽과 계단, 계단의 손잡이까지 온통 황금색으로 불타오르는 광경은 방화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끔찍해야 마땅할 터인데, 오딜의 눈에는 마치 태양빛이 그림자를 지우는 것처럼 빛나게만 보였다.
“……개판이구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딜은 감탄했다.
실지렁이 같은 저주가, 곰팡이 같은 저주가, 벽면과 계단에 가득하던 기분 나쁜 저주가 불에 타 사라지는 모습은 차라리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러다가 바르셀다까지 태우면 어쩌려고?”
“바르셀다에게는 직접 손대지 않을 겁니다.”
오딜은 말했다. 증오의 핵을 품은 네나뷔스테에게는 약간의 이성이 남아 있었지만, 분노의 핵을 품은 바르셀다에게는 이성이 없이 오직 본능만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엄청나게 강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도리어 제압하는 방법은 더 단순하다는 것이다.
“지하의 벽과 바닥을 전부 불태우겠습니다. 오딜, 당신은 이 불꽃이 당신에게 옮겨붙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괜찮지만, 바르셀다라면 분명 자신의 몸에도 불이 옮겨붙을까 봐 불길을 피하려 들 겁니다.”
“그래서, 불을 질러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바르셀다를 구석에 처박아 놓고 칼로 푹푹 찔러 가며 관절이니 힘줄이니 다 아작을 내시겠다? 기사가 아니라 양아치나 할 법한 발상이로군.”
“아닙니다. 빈틈을 만들 겁니다.”
“빈틈?”
“본능만이 남은 상태라면, 함정이라는 걸 모르고 걸려들 테니까요.”
“무슨 함정을 팔 생각이야? 합이 맞아야 내가 자네를 돕지.”
“우선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지하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바르셀다의 비명이었다.
“이런. 벌써 깼나? 새벽에는 잔다고 나자예프가 그랬는데!”
“오딜. 바닥을 조심하십시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본래 어두웠으나 에르잔이 만든 황금빛 불꽃 덕분에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에르잔은 허리춤의 검을 뽑은 채로 계단을 한 번에 뛰어 내려가, 마치 경계선을 긋듯이 검으로 바닥을 갈라냈다.
“뒤로 물러나라, 바르셀다!”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바르셀다에게 고함과 함께, 에르잔은 벽과 천장에 똬리를 튼 검은 뱀의 머리를 잡아채듯이 불꽃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