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57화 (57/189)

57화

본래 이 마을의 교회는 동쪽에 있었다고 카림은 말했다. 교회가 서쪽으로 옮겨 가면서, 언제부터인가 동쪽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처음 산책을 하면서 이 건물을 보았을 때는 꼭 교회에서 첨탑만을 따로 떼어 놓은 듯한 모양이라고 생각했건만, 카림의 말로 유추해 보건대 첨탑 이외의 나머지는 허물어 버린 듯했다.

사비나는 그것이 이상했다.

어차피 바르셀다가 갇혀 있는 곳은 첨탑의 지하인데, 교회를 왜 허물 필요가 있었을까.

본래 미사실이 있었을 자리에는 잡초만이 무성했다. 사비나는 서쪽 교회의 규모를 떠올리며 공터에 발을 디뎠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보다 확실히 저주의 기운은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사비나는 고요한 새벽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

꿀럭.

바람 소리보다도 한층 더 무거운 그것은 마치 물을 마실 때 목이 울리는 소리를 닮았다.

“……나자예프.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사비나를 향해 뛰는 내 심장 소리. 두근두근 쿵쿵?”

“농담하지 말고요.”

“아니, 진짠데…….”

나자예프는 아쉬운 듯이 말하며 장갑을 벗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새벽이라고는 해도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두운데, 그의 엄지와 중지를 감싼 금색의 반지가 이른 태양빛을 머금은 듯 반짝, 빛을 냈다.

“주술도구는 제물과 가까워지면 반응하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 오거든.”

“신호요?”

“작은 저주가 더 큰 저주에 이끌린다는 거 알아?”

사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도구도 비슷해. 반동을 피하는 자와 제물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

“서로를 끌어당긴다고요?”

주술이 술자의 각인을 새긴 핵에 엉겨 붙는다는 것은 알지만, 사비나는 제물을 둬 본 경험도, 그럴 필요도 없었으므로 제물과 술자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까워지면 공명한다고 해야 하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빛이 보이기도 한대.”

사비나의 귓전에 반복해서 들려오는 물을 꿀꺽, 삼키는 듯한 소리를 나자예프는 듣지 못하는 걸까? 나자예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랑 닮았다고 들었는데, 사비나가 듣기엔 아닌가 봐?”

“……뭔가를 삼키는 소리…… 아니, 반대일지도 모르겠네요. 울컥하면서 목을 넘어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래?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가 보네. 냄새가 아닌 게 다행이려나.”

“나자예프에게는 안 들리나요?”

“사비나의 목소리만 들리면 충분하지. 기왕이면 신음 소리도 들리면 더 좋고.”

진지한 질문에도 농담처럼 답하는 나자예프의 목소리는 무척 가벼웠다. 지금은 농담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한 사비나는 나자예프의 입꼬리가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나자예프는 떨고 있었다.

아니,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을 가장한다고 해야 할까. 농담인 듯 가벼운 어조임에도 그 음성은 평소처럼 진득한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위태로웠다.

“……나자예프. 두려운가요?”

“음, 저기. 사비나? 이럴 때는 모른 척해 주는 게 예의 아닐까.”

“이 망나니가 어디다 대고 예의란 단어를 입에 올려? 양심도 바르셀다한테 넘겨줬냐?”

“아, 오딜!”

언제 도착했는지, 오딜의 커다란 손이 나자예프의 등을 철썩! 때렸다. 키는 나자예프 쪽이 크지만 비교적 늘씬한 편인 나자에프와는 달리 오딜의 체구는 건장했고 손도 커다랬다. 나자예프는 오딜에게 맞아 화끈거리는 등짝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우리 마을 호위대장이 폭력배가 다 됐네…… 말로 해도 되는 걸 꼭 이렇게 폭력적으로 해결해야 해?”

“나자예프, 네 녀석한테는 그래도 돼.”

오딜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품에서 꺼낸 단검을 사비나에게 건넸다.

“받아, 아가씨.”

“단검을요? 왜…….”

“나자예프 녀석이 결정적인 순간에 쫄려서 튀려고 하면, 이걸 바로 이 녀석 목에다 찔러 버려.”

“네에?”

“아. 키 차이 때문에 좀 힘들려나? 그러면 사타구니에 박아 넣어도 되고. 움직임을 멈추기엔 그편이 제일 적당하겠군.”

“오딜!”

네나뷔스테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는지, 나자예프가 창백하게 질려 소리쳤다.

혹여 나자예프의 외침에 바르셀다가 깨지 않을까, 사비나는 쉿, 하고 입가에 집게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전 나자예프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말랑말랑한 소리를 해도 웃으면서 들어 주는 건 마을이 평화롭고 어른이 보호자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때야. 이곳은 평화롭지도 않고, 나는 아가씨 보호자도 아니거든.”

“……오딜에게 제 신변 보호를 부탁한 적 없어요.”

“보호자가 아니라고 했잖아?”

오딜이 목을 돌리고 어깨를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풀더니 칼날 쪽을 잡고 자루를 사비나에게 들이댔다. 오딜은 손이 거칠고 단검은 이가 빠져 무딘 편이었기에 가볍게 잡은 정도로는 손이 베이지 않았다.

“나도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서 아가씨에게 협상을 제안하는 거야.”

“협상……요?”

“나자예프 녀석이 튀면 튀는 대로 골치지만, 반지를 빼고 나서 사고가 일어나면 여기 있는 사람은 전부 죽어. 이 망나니 하나 살리자고 아가씨와 충견과 기껏 도와주러 온 나까지 줄줄이 죽게 하지는 말아 달라는 뜻이지.”

“오딜, 좀! 내가 도망칠 거였다면 진작 도망쳤지. 사비나 앞에서 너무하는 거 아니야?”

“목숨이 걸린 상황인데, 이만하면 좋게 말해 주는 편 아닌가? 아니면 내가 직접 사타구니에 꽂아 줘?”

“하, 하지 마!”

나자예프가 혼비백산하면서 멀어졌다. 사비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오딜이 건네준 단검을 받았다. 칼날이 무디긴 하지만 힘주어 그으면 사람의 피부 정도는 벨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놈이 죽든가, 넷이 몰살당하든가. 아가씨도 바보는 아닐 테니 내 말은 알아들으리라 믿어.”

“그럼 오딜도 바보가 아니니 저와 에르잔이 했던 말도 기억하겠네요.”

“뭐?”

“나자예프도 바르셀다도 죽지 않고, 에르잔과 오딜 당신도 무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사비나는 단검을 쥐고 슥, 제 손바닥을 베었다. 하얗던 손에 새까만 실선이 그어지더니, 그것이 점점 벌어지며 진득한 약체가 흘러내렸다. 무딘 칼날 탓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으나 베이는 범위가 제법 넓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뚝. 떨어진 피가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치이익. 소리를 내며 연기처럼 퍼졌다. 사비나는 주먹을 꽉 쥐어, 바닥에 뚝뚝 피를 떨구며 첨탑으로 향했다.

“이봐, 아가씨. 뭐 하자는 거야?”

“어지간한 저주는 내 피로 흡수할 수 있어요. 첨탑으로 내려갈 때 작은 저주들이 기어 나오는 걸 봤거든요.”

나자예프의 말대로 분노의 핵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가 아침이라면, 새벽인 지금은 그 작은 저주들도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사비나가 그 꾸물거리는 검은 저주를 <뱀 같다>고 인지한 순간, 형체를 가지고 그녀의 발목을 옭아매 지하로 끌어들였으니까.

“이렇게 하면 혹 자잘한 저주가 기어 나오더라도, 방해받지 않고 바르셀다에게 접근할 수 있을 거예요.”

“……아가씨는 주술사인가?”

오딜의 말에 사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저주에 익숙한 인간이고, 저주를 흡수할 수 있음을 알린 이상 주술사라고 추측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딜의 황금빛 눈에 서린 칼날 같은 경계심을 마주하고도 사비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피가 묻은 단검을 반대로 쥐었다.

“에르잔과 비슷해요. 체질이라는 거죠.”

“체질?”

“제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에요.”

그랬다. 사비나의 피에는 죽음의 저주가 깃들어 있었으나, 그녀는 피를 내고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칼날로 피부를 그어도 상처가 나지 않도록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나마 에르잔의 정화의 힘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니라지만, 사비나의 피는 언제 어디서든 위협적이었다. 가벼운 접촉이나 이름을 부르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녀의 피라면 이 마을의 저주를 감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죽음에 이르게 할지 모른다.

“나자예프.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할게요.”

“사비나?”

“저주의 반동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다면, 바로 나에게 토해 내면 돼요. 내가 흡수할 테니까. 하지만 만약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면, 조금만 참아 줄 수 있나요?”

“조금만 참는다니? 뭘 하려고…….”

저주가 더 큰 저주에 이끌리는 법이라면, 저주의 반동에서 벗어난 바르셀다가 난동을 부릴 때 제일 먼저 달려들 대상은 나자예프도, 오딜도 에르잔도 아닌 바로 사비나일 것이다.

나자예프의 저주를 모두 흡수할 때까지 에르잔과 오딜이 시간을 벌어 준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닐 때에는 사비나가 바르셀다의 힘을 감당해 내야 한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저주는 일종의 미끼인 셈이다.

“오딜. 만약 바르셀다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에르잔과 함께 바로 이곳을 벗어나세요.”

“아가씨는 어쩌고?”

“일을 벌였으니 뒷수습을 해야죠.”

바르셀다는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사람의 몸을 종이처럼 찢어 버린다고 했지만, 사비나의 피가 튀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걸신들린 사람처럼 그 피를 탐하려 달려들 것이다. 손발이 날아갈지, 내장이 파일지는 모르겠지만 바르셀다의 주의를 돌리기에는 충분할 터.

'의식만 잃지 않는다면 잡아먹히든 몸이 뜯겨나가든,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하는 게 가능해.'

사비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뒤, 첨탑의 문을 열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의 앞에 낯익은 인영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구와 반듯한 자세. 에르잔이었다.

“에르잔. 늦어서 미안해요. 먼저 왔다기에 지하로 내려간 줄 알고 걱정했거든요.”

“내려가 보았습니다만, 다시 올라왔습니다.”

“왜요? 바르셀다의 상태에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새벽에는 잠든다고 나자예프가 분명히 말했는데. 역시 나자예프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을까?

사비나가 가까이 다가가자, 에르잔은 사비나의 손목을 잡아끌어 벽으로 밀쳤다.

아니, 그곳은 벽이 아니었다. 문이 빙글, 돌아가며 사비나는 어딘가에 갇혀버렸다.

“에르잔? 에르잔…… 꺄아!”

“우왓!”

몸을 일으키려는데 꽥 소리와 함께 나자예프가 사비나의 위로 엎어졌다. 창고인지 사물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에르잔이 비좁은 창고에 사비나와 나자예프를 밀어 넣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르셀다를 죽게 하지 않고, 제압하겠습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나자예프의 저주를 흡수하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에르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바르셀다를……!”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에르잔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거운 음성이었다.

마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음성에 잠시 사비나가 주저하던 사이, 아래쪽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다음화 보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