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56화 (56/189)

56화

12. 가장 확실한 것

사비나에게 익숙한 것은 세 가지 있다.

어둠.

차가움.

그리고 고요함.

아버지인 콘바야젠 백작은 사비나가 탈출할 것을 우려해 그녀를 창문이 없는 돌방에 가두었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에서는 열 수 없는 문을 혹 망가뜨릴까 염려되어, 그녀에게는 옷도 입히지 않았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차가운 방. 그곳에서 사비나는 늘 알몸으로 잠들었다.

돌방의 문이 열리는 것은 그녀가 죽일 사람의 초상화를 들고 감시인이 찾아올 때. 그리고 이따금 아버지가 방문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릴 때뿐.

「사비나.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제발 날 죽여 주세요…….」

두 사람의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사비나는 늘 죽여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왕족, 귀족, 사제, 상인.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에게 거역하는 이들은 모두 죽어 나갔다.

각 가문의 주술사들은 제 주인에게 죽음의 저주가 걸려 있다는 것을 예지해도 손을 쓰지 못했다. 그 어떤 주술보다도 강력한 죽음의 저주는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돌방에 갇혀, 찬 바닥에서 알몸으로 잠들며,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에게 매도당하고 모욕당하던 사비나는 오로지 죽음만을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죽고 싶어 할수록 그녀의 피와 살에 깃든 저주의 기운은 짙어졌다.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가 간절히 열망하는 죽음은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늪과도 같았다.

「내가, 내가 또 사람을 죽게 했어…….」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비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손톱이 다 벗겨지도록 벽을 할퀴고,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어도 고통은 그때뿐이었다.

사비나의 온몸을 지배한 저주의 기운은 그녀 자신만은 삼키지 못했다.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영원히 잠들고 싶어……」

부디 눈을 감으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사비나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미쳐 버릴 듯한 적막함 속에서 그녀를 꺼내준 것은 죽음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

새벽에 동쪽 첨탑에서 바르셀다를 제압하려면 낮에 자 두어야 하는 까닭에, 기도실은 오딜과 에르잔이 차지하고 로스카옌의 방에는 카밀라와 사비나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원래는 나자예프도 기도실에 있어야 했으나, 남자끼리 한 공간에 있는 건 끔찍하다면서 고해실로 도망쳤다.

물론 고해실로 들어간 나자예프가 자다 깨다 심심해서 종을 울려도 로스카옌이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밀라는 침대에 누워서, 고개만 휙 쳐들어 바닥에 앉아 있는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사비나, 괜찮아? 너 어제도 밤새웠잖아.”

“오늘은 별달리 일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휴식을 취하면 잠은 굳이 자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밀라는 사비나가 잠도 자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를 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했다. 보통은 심심해서 하품을 하든가, 눈이라도 깜박일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이 얌전히 있는 사비나를 볼 때마다 숨은 쉬는가 싶어 자꾸 말을 걸었다.

“사비나. 네가 침대에 누워. 난 너희들 나가고 나서 자면 돼.”

“정말로 괜찮아요. 카밀라야말로 더 안정을 취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카이라트와 언쟁을 벌이다가 제 분을 못 이겨 실신한 것을 보면 카밀라도 보통 성미는 아니다. 그런 그녀를 안정시키는 방법을 사비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카밀라 역시 에르잔과 마찬가지로, 사비나가 ‘괜찮다’는 말을 할수록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앉아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카밀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도 나지만 너도 너야. 은근히 사비나도 고집이 세다니까.”

“미안해요.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귀족은 다 그렇게 사나? 외롭겠다. 사비나, 이제는 외로워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카밀라의 말에 사비나는 쓰게 웃었다.

어지간하면 카밀라와 밀착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나, 카밀라를 피하려 들면 그녀가 더욱 걱정할 것 같아 사비나는 적당히 어울려 주기로 했다.

‘에르잔을 이용하고, 카밀라를 속이고…… 이런 짓을 하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했다니, 내가 바보 같았어.’

카밀라는 사비나가 죽음의 화신인 것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 그녀의 손에 닿으면 몸이 썩어 들어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카밀라에게 사비나는 저를 괴롭히던 저주를 흡수해 준 신기하고 고마운 존재. 그래서 카밀라는 사비나에게 닿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비나는 그런 카밀라의 행동이 곤란하고, 그녀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진실을 밝힐 자신은 없었다. 에둘러 거절하려 해도 누군가와 심도 있는 대화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비나는 자연스럽게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고, 카밀라로부터 ‘낯가림이 심하다’는 평만 들었다.

“내가 보기에 사비나는 굉장히 용감한데, 이상한 구석에서 용기가 없는 것 같아.”

“그런가요?”

“응.”

카밀라가 침대 위에서 빙글, 몸을 뒤집어 사비나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사비나는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면 카밀라가 싫어하기에 눈만 내리까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은 저주받은 존재를 보면 무서워하거나 끔찍하게 여기면서 도망치잖아. 아니면 욕을 하거나 돌을 던지거나. 그런데 사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다가와서, 굉장히 놀랐어.”

“저주에는…… 익숙하니까요.”

“익숙하다고 해도 저주는 불길한 거잖아. 난 그런 상태로 다니면서도 네나뷔스테가 있는 남쪽이나, 체념한 사람들이 있는 북쪽에는 가지 않았거든. 내가 받은 저주도 힘겨운데 다른 사람 저주까지 옮겨붙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잘 생각한 거예요. 덕분에 카밀라의 저주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던 거니까.”

“나한테는 그렇게 용감하게 다가와 놓고서.”

이불 속에서 몸을 꾸물거리던 카밀라는 손가락으로 사비나의 뺨을 쿡, 찔렀다.

“에르잔한테는 왜 당당하게 고백을 못 해?”

“……네?”

“이상하잖아. 그렇고 그런 짓까지 해 놓고선 사귀는 게 아니라니. 에르잔이 나자예프같은 인간말종도 아닌데, 사비나가 제대로 고백하면 받아들여 줄걸?”

“카밀라. 그날 일은…….”

“사비나가 외모가 부족해, 심성이 부족해? 내가 보기엔 에르잔도 사비나를 엄청 아끼는 것 같던데. 아마 에르잔이 사비나를 밀어내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건 사비나가 싫어서가 아니라, 신분 차이 때문일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귀족 아가씨와 호위기사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

마땅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한 사비나가 어물거리는 사이, 카밀라는 혼자서 망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서쪽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카밀라의 대화 상대는 카이라트와 로스카옌이 전부였다. 대화라고 해 봐야 거의 카밀라 혼자서 떠들어대는 격이었으니, 상대가 호응해 주지 않는 것은 익숙했다.

“난 사비나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착한 사람은 행복해져야 해. 사회적 논리로 정의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고 누가 그랬거든.”

그렇게 따진다면 사비나야말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쪽이다. 사비나는 쓸쓸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카밀라.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날 구해 줬잖아. 사비나는 착해.”

“착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걱정이 돼. 올가 언니도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거절을 못 해서 그 사달이 났거든.”

카밀라의 입에서 올가의 이름이 나오자 사비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카밀라와 눈이 마주쳤다.

“올가 언니는 되게 조용한 사람이었어. 그렇다고 무심한 건 아니고, 조용한데 상냥한 사람? 누구랑 싸우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오빠인 오딜 아저씨가 올가 언니한테 추근거리는 남자들을 쥐잡듯이 잡아 대지 않았으면 분명 치정 싸움에 피바람이 불었을 거야.”

오딜은 아저씨인데 왜 올가는 언니일까. 사비나는 궁금했으나 굳이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제가 그분을 많이 닮았나요?”

“음…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기억하는 올가 언니는 미인이긴 하지만 사비나처럼 고고한 이미지는 아니었거든. 그런데 나자예프나 오딜 아저씨 반응을 보니까 닮았나? 하는 정도지.”

“그렇군요.”

“그냥 남자들이 미인을 밝히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왜, 그 시대에 선호하는 미인상은 비슷비슷하다잖아?”

카밀라의 말에 사비나는 작게 실소했다.

미인이라. 사비나는 제 외모를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미추를 판단한 줄 몰라서는 아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나 뽀얀 피부를 미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것쯤은 사비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화신인 자신의 외모가 아름다울수록, 그녀에게 홀려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수만 늘어날 뿐이다. 사비나는 차라리 제 모습이 아주 흉측했더라면, 적어도 죽는 사람의 수는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르셀다도 이성이 돌아오면 사비나한테 반할지도 몰라.”

“네?”

“그 형제들은 취향이 똑같거든. 사실 올가 언니를 임신시킨 게 나자예프네 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

형이라. 그러고 보니 나자예프가 형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주술도구를 통해 나자예프의 저주를 바르셀다에게 옮기는 실험을 했다고.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나자예프는 동생인 바르셀다는 자주 언급하면서, 형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 말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어째서일까.

“나자예프의 형……이라는 분은, 돌아가셨나요?”

“그럴 거야. 본 적이 없거든.”

“본 적이 없다고요?”

“15년 전 군인들 손에 죽고, 저주로 인해 죽고. 저주를 받고도 살아난 사람은 이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해. 15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죽었다고 봐야겠지.”

“그렇군요…….”

“아, 그때 일은 떠올리기도 싫어.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카밀라는 자기가 이야기를 꺼내 놓고 혼자서 진저리치며 대화를 끊었다. 막역한 사이라고 해도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사비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슬슬 달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사비나는 침대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네. 그럼 카밀라는 그만 쉬세요.”

“사비나. 벌써 가려는 거야?”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면 더 큰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미안해, 사비나. 우리 마을 일인데, 사비나한테만 맡겨 놓고 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어서. 하다못해 보답할 뭐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카밀라가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카밀라의 건강해진 모습을 본 것만으로 사비나는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내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그들을 속이는 또 다른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카밀라가 쾌활하게 웃는 잠시 동안은 진실을 감추고 행복한 거짓에 취해있을 수 있으니까.

‘가능하면, 카밀라는 진짜 내 모습을 몰랐으면 좋겠어.’

카이라트가 저지른 짓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오열하는 카밀라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녀가 입을 상처를 걱정해서라기보다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을 마주하기 두려워서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다녀올게요, 카밀라.”

“사비나. 조심해야 해. 다치지 마.”

“……네.”

이곳에 오면서 에르잔을 끌어들였고, 네나뷔스테를 상대할 때는 나자예프를 끌어들였으며, 바르셀다를 상대하는 지금은 오딜까지 끌어들이고 말았다. 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일에 무고한 이들이 상처 입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비나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사비나는 카밀라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왔다. 복도가 썰렁했다. 복도 끝 문이 열려 있어 바람이 들어온 까닭이다.

오딜과 나자예프가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늦어, 아가씨. 신사는 숙녀는 기다리는 법이라지만 나는 신사가 아니라서 참을성이 없거든.”

“괜찮아, 사비나. 난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어. 네가 찾아와 준다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오딜. 에르잔은요?”

나자예프는 괜찮다고 말했으므로 아주 자연스럽게 사과를 생략하며 사비나는 에르잔의 행방을 물었다. 오딜은 광장 너머 멀리 보이는 동쪽 첨탑을 가리켰다.

“그 애송이는 벌써 갔어. 실수하면 안 되니까 연습이 필요하다나?”

“에르잔이 혼자서 갔다고요? 오딜, 어째서 말리지 않았어요?”

“내 개도 아닌데 왜? 아가씨가 주인이니 잘 간수를 했어야지. 뭐, 그래도 동쪽 첨탑에 있는 건 바르셀다뿐이니 개한테 물려서 봉변당하는 사람은 없겠군.”

“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가요!”

당황한 사비나는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도 잊고 후다닥 광장을 향해 뛰어갔다. 나자예프는 사비나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고, 오딜은 우뚝 서서 교회 반대편의 낡은 창고를 노려보았다.

“……그래, 끝까지 가 보자고.”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사비나와 나자예프가 손가락보다 작아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오딜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쉭. 바람을 가르는 듯한 서늘한 소리가 세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