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에르잔 무스코바예프.
황궁 근위대에 입단하였으나, 배속을 받지 못하고 줄곧 대기하다가 황제의 대리인인 콘바야젠 백작의 명령으로 사비나와 함께 이 마을로 온 호위기사.
그러나 이 마을에 도착한 이후, 에르잔은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기사도 아니고 사비나의 호위는 더욱 아니었다.
에르잔이 사비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녀의 방을 청소하거나, 그녀가 먹을 식사를 마련하거나, 옷을 가져오는 자질구레한 일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저주를 흡수한 이후 보이는 이상 증세를 가라앉히기 위해 몸을 섞는 일이었다.
'나는 사비나 아가씨께 필요한 존재가 맞을까.'
사비나는 에르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무척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녀가 보낸 신뢰의 눈빛과 미소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나뷔스테의 <증오의 핵>을 흡수하러 갈 때, 사비나는 나자예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바르셀다의 <분노의 핵>을 흡수하러 갈 때는 오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호위기사인 에르잔이 아니라.
사비나가 나자예프를 찾을 때마다, 오딜을 설득하는 목소리를 낼 때마다, 에르잔은 착잡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낙엽처럼 하나하나 쌓여 갔다. 스산한 바람에도 버석거리며 내며 바스러지는 소리만이 가슴 속을 어지럽혔다.
부서진 낙엽이 흩어지는 소리가 자신 안을 채워 가는 것이 에르잔은 고통스러웠다. 계절은 이제 여름에 접어들었는데 그의 마음은 이미 가을이 끝나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처럼 메말라 갔다.
더는 이대로 있고 싶지 않았다.
“사비나 아가씨. 제가 아가씨께 도움이 된다고 하셨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바르셀다를 제압하는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에르잔. 내가 오딜에게 부탁한 이유는…….”
“제 손에 바르셀다가 불타 죽어 버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지요?”
만약 에르잔에게 정화의 힘이 없었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그 정화의 힘이 체질이 아니라 능력이라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랬더라면 사비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
에르잔은 자신의 힘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비나가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제게 그런 힘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니까. 사비나는 에르잔이 대단하다며, 그와 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더는 귀족 가문에서 주술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에르잔은 그 말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주술에 대해 알지 못해도, 저주에 대해 알지 못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비나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에르잔도 이해할 수 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외경. 부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양 극단에 위치한 두 사람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으리라.
에르잔은 사비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호위기사라 자처하면서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고, 사비나가 저주의 핵을 흡수하는 일에 에르잔은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으며, 그가 나서면 도리어 민간인이 피해를 입고 저주의 균형이 무너져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다.
사실 이제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게 아닐까.
그저 사비나가 다정하기에, 거절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해서, 처음 보는 사람을 선뜻 도와줄 만큼 인정이 많아, 쓸모없고 방해만 되는 에르잔을 여전히 곁에 두는 것이 아닐까.
에르잔은 불안했다.
제 역할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오딜에게 검을 건네주지 않았다.
바르셀다의 핵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또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 목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비나를 목도했을 때 에르잔은 충격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팔다리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제가 모르는 곳에서 사비나가 위험에 처한다면.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네나뷔스테 때와 똑같은 실수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에르잔. 이번에는 정말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몰라요. 그러니까…….”
“주군이 위험에 처해있을 때 혼자서 도망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대신 주군의 안위를 맡겨야 할 만큼 제가 형편없는 놈입니까?”
에르잔의 푸른 눈이 불꽃처럼 빛났다.
사비나는 말문이 막혔다.
에르잔의 눈빛에서 드러난 분노와 불쾌함을 읽어 낸 까닭이었다.
‘에르잔이……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에르잔의 분노의 방향이 스스로를 향하고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 하는 사비나는, 당연히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한 거라고 오해했다.
‘바보 같아. 죗값을 치른다고 다가 아니었는데.’
에르잔은 올곧고 착실한 기사다.
약자에게 다정하고, 적을 대할 때는 물러섬이 없다.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평생 마주할 일 없었을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분명 자신의 기사도를 관철하여 명예로운 일생을 살았을 사람이다.
그런 에르잔의 인생을 자신이 뒤틀어 버렸다.
기사의 긍지를 땅에 처박아 버리고, 원치도 않는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만들었다.
사비나는 누군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에르잔이 상냥했던 것은 그녀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었고, 전날 밤 몸을 섞었던 것 또한 아무리 싫더라도 사적인 감정으로 임무를 내팽개치지 않는 책임감 있는 성품 때문이리라.
‘나도…… 나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구나.’
사비나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가슴께에 모은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어, 에르잔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요, 에르잔.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세요.”
“사비나 아가씨.”
“당신은 그래도 돼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에요. 나머지는 전부 내가 감당하면 되니까.”
사비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에르잔은 그녀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비나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평안을 되찾은 듯 고요했다.
마치 그녀에게는 이 상황이 더욱 친숙하다는 것처럼.
‘당연하지. 기사로서 명예도 긍지도 없는 이런 일에 끌려다니고, 억지로 명령을 따라야 하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자존심 상할지…….’
사비나는 기사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자신이 이제까지 에르잔에게 굉장히 미안한 일을 해 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자신이 그렇게나 미워하던 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싫다고 저항해도, 아버지는 그녀의 피를 사용하여 수많은 이들을 죽여 왔다. 몇 번이나 자해를 하고 자살 시도를 해도 죽을 수 없었다. 운명에 농락당하는 인형처럼 억지로 사람을 죽여 와야 했다.
그런 자신이 저주스럽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에르잔도 다르지 않겠지.'
아무리 정식 계약 관계가 아니라고 한들 사비나는 에르잔의 주군이었고, 충직한 기사인 그는 그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비나가 부탁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모욕적이고, 싫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에르잔의 성품을, 그가 처한 상황을 사비나는 뒤늦게 인지했다.
그리고 그를 이런 일에 끌어들이고도 용서받기를 기대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어요. 나자예프.”
“어, 어? 나?”
“바르셀다를 다루는 법을 안다고 했지요? 그는 평소 첨탑에 갇혀 있을 때, 무엇을 하나요?”
사비나의 질문에 나자예프는 조금 당황한 듯 턱 밑을 긁적이다가 눈동자를 굴렸다.
“으음…… 사실 별건 안 해. 뭘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끙끙 앓다가 피곤해지면 자고, 아프면 다시 깨고 그래.”
“자는 시각은 일정하지 않은가 보죠?”
“아니, 새벽에는 자.”
“새벽에요?”
“주술상으로 동쪽이 의미하는 바가 아침이라고 그랬거든.”
저주의 주술은 이지가 없을 뿐, 반드시 규칙대로 움직인다. 술자로부터 출발해 성과를 내고 되돌아오는 것도 그렇고, 나중에 건 저주를 해주해야 먼저 건 저주를 비로소 해주할 수 있는 것이 그러했다.
동쪽에 가둔 바르셀다가 품고 있는 저주의 핵은 분노.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침이라면, 저주의 핵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가 아침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침에 활동을 재개하기 직전, 새벽이 가장 고요한 시기라는 뜻.
“좋아요. 그럼 바르셀다가 잠든 새벽에 동쪽 첨탑에 잠입하는 것으로 하죠.”
“잘 때 덮치겠다고?”
“그게 가장 피해가 적지 않겠어요?”
사비나가 오딜을 돌아보자, 그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씩 웃었다.
“정신이 이상한 거지, 아가씨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네.”
“그럼 동의하는 거죠?”
오딜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비나는 그제야 코를 막으며 손가락으로 욕실 쪽을 가리켰다.
“오딜, 좀 씻고 오세요. 잠들었던 바르셀다가 당신 냄새에 깨겠어요.”
“…….”
내내 태연하던 사비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카밀라와 똑같은 소리를 한 까닭에, 오딜은 얼이 빠졌다.
“것 봐, 오딜 아저씨. 내가 씻으라고 했잖아.”
“카밀라. 어른 앞에서…… 아니, 됐다. 그래. 씻긴 씻어야겠군. 씻고 좀 자야 새벽에 움직일 수 있을 테니.”
오딜이 구시렁거리며 미사실을 빠져나가 욕실로 향하자, 사비나는 그를 향해 감사 인사라도 하듯 묵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