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나자예프는 말했다. 군인들의 손에 죽어 간 사람들 외에도, 마을의 시간이 멈춘 후에 수많은 이들이 저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고. 즉사할지,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다 죽을지, 아니면 카밀라나 카림처럼 저주를 품고 살아남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자예프는 자신이 죽을 거라고 예상하는 듯했다.
“나자예프가 주술도구를 벗고 저주의 반동을 받는 순간에 사비나 아가씨께서 바로 저주를 흡수하신다면 설령 저주의 힘이 그가 감당해 내지 못할 만큼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바르셀다는요?”
“저와 오딜이 막고 있겠습니다. 나자예프의 저주를 전부 흡수하신 다음에, 바르셀다가 품고 있는 <분노의 핵>을 흡수하신다면 두 사람 다 살 수 있습니다.”
“나자예프와 바르셀다가 죽는지 사는지는 모르겠고, 애송이랑 내 목숨이 끝장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군.”
에르잔이 낸 의견을 단칼에 잘라 버리며 오딜이 품 안에서 이가 빠진 단검을 꺼냈다.
“이봐, 애송이. 난 분명히 말했어. 나 혼자서는 바르셀다를 제압할 수 없다고.”
“제가 돕겠습니다.”
“아니, 자네가 도와도 안 돼. 자네 뒤에 있는 망나니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도 성공할까 말까인데.”
오딜이 단검을 단상에 푹, 박아 넣자 깊이 파였다. 분명 이가 다 빠져 무뎌진 칼이었는데,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이 단상의 널빤지 하나가 반으로 쩍, 갈라졌다.
“오딜. 교회를 부수지 말게나.”
“뭐 어때, 로스카옌. 이젠 미사도 안 올리면서.”
로스카옌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넘기며 오딜은 다시 단검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에르잔의 뒤에 있는 나자예프에게 겨누었다.
“바르셀다가 얌전한 건 말이야, 전적으로 저 망나니의 저주를 대신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놈한테 갈 저주를 대신 받고 괴로워하느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야. 저주가 풀려서 날뛰기 시작하면 동쪽 첨탑에 발을 들인 사람은 전부 놈의 손톱에 조각이 나 버릴걸?”
사비나는 문득 카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을 연못에 잠긴 이들의 뼈를 동쪽 탑에 빼앗기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을. 사비나는 그것이 바르셀다가 뼛조각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바르셀다는 동쪽 첨탑 지하에 갇혀 있는 상태가 아닌가. 출입금지 팻말이 걸린 밖으로는 나갈 수도 없는.
“나자예프의 저주를 대신 받고 있는 지금이…… 약해진 상태라는 건가요?”
“아가씨는 이해가 좀 빠르군.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니까 그런 곳에 처박아 둘 수 있는 거야.”
“그럼 나자예프의 저주를 해주하면 날뛰기 시작할 거라는 뜻인가요?”
“아가씨도 네나뷔스테를 봤으니 알 거 아니야?”
증오의 핵을 지닌 네나뷔스테는 자신과 제 동생들이 있는 곳에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칼로 위협해 쫓아내려 했다.
“증오한다는 건 말이야. 뭔가를 미워한다는 이성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이거든.”
그랬다. 네나뷔스테는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지 마라>, <내버려 두라>는 말을 외쳐 댔다. 사비나가 하는 말을 듣기 싫다, 믿지 않는다며 부정했으나 분명 타인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정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비나가 처음 동쪽 첨탑에서 바르셀다를 마주했을 때, 그는 몇 가지 단어만을 더듬더듬 말했을 뿐,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눈이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이성이 없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네나뷔스테는 상대를 봐 가면서 공격을 했어. 침입자가 없으면 한숨 돌리며 휴식도 취했지. 그런데 바르셀다는 그게 안 되거든.”
증오가 화르륵 번져 나가는 불길과 같다면, 분노는 용솟음치는 활화산과도 같다. 불길이 번지는 방향은 유추가 가능하니 반대로 달아날 수라도 있으나 폭발이 일어나면 그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우선 바르셀다를 제압한 다음에 나자예프의 목을 쳐. 그 즉시 저주의 핵을 흡수하면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지.”
“오딜!”
나자예프가 펄쩍 뛰며 항변했다.
“아까부터 계속 목을 치네 어쩌네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그게 호위대장이 할 소리야?”
“호위대장 같은 건 없다니까. 내가 죽였다고 했잖아.”
“그, 그렇다고 내 목을 노릴 이유는 없잖아!”
“저주의 반동을 받은 네놈이 어떻게 나설 줄 알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 대며 물귀신처럼 들러붙어서 우리를 훼방 놓기라도 하면 일이 다 틀어져. 깔끔하게 베어 줄 테니 그냥 편하게 죽어, 나자예프.”
“남 목숨이라고 진짜 쉽게 말하네!”
“이제까지 죽어 간 목숨이 몇 갠데, 너 하나쯤 더해진다고 별일이야 있겠어?”
“나자예프를 죽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에르잔의 대답에 오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군을 따라 정신이 나간 것도 모자라 상황마저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답답하다는 듯, 휘유 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고는 들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애송이. 나한테 도와 달라면서? 네가 바르셀다를 만지면 불타 버리니까 내가 제압해야 한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나자예프의 저주를 대신 받느라 약해진 상태일 때 제압하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저주의 핵을 흡수하려면, 주술도구를 제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나자예프가 깔끔하게 자살하는 순간에, 저 아가씨가 저주의 핵을 흡수하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지.”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나자예프를 죽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 아가씨가 나자예프의 저주를 흡수할 동안 우리 둘이서 바르셀다를 붙잡아 두고 있자고? 자네, 그놈 힘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바르셀다가 멀쩡한 상태면 무기가 있어도 10초를 버티기 힘들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걸까. 이성을 잃은 인간은 평소 이상의 힘을 내는 법이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인 여성인 네나뷔스테가 나자예프와 막상막하로 맞설 정도였으니, 체구가 큰 바르셀다는 아마도 에르잔과 오딜의 힘을 합친 것 이상으로 막강할지도 모른다.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뭐?”
“사지를 절단하면 바르셀다의 저항을 최대한 막을 수 있다고.”
“아. 그래서 사지를 썰어 버리겠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물어뜯기면 곤란하니 턱주가리도 같이 날려 버린다는 전제하에서라면 말이야.”
오딜이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가 비웃는 것은 에르잔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나자예프였다.
“15년 동안 동생을 제물로 삼아 나 몰라라 하던 놈 하나 살리자고, 첨탑에 갇혀서 내내 고통스러워하던 막냇동생만 불구가 되게 생겼네.”
“윽…….”
어느 한쪽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동생에게 모든 책임과 고통을 미뤄 놓은 나자예프가 죽는 쪽이 타당하다고, 오딜은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숨죽여 살던 제 여동생 올가는 죽고, 그녀의 인생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처박아 버린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이래서야 핵을 흡수해도 바르셀다가 다시 분노로 미쳐 버리겠는걸? 마을의 저주가 풀려 봤자 불구가 된 몸은 재생하는 게 아니잖아?”
“바르셀다가 불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지를 잘라 버린다며? 내가 몇 놈 목이 날아가는 걸 봐서 아는데, 아무리 시간이 멈춰 있어도 한 번 잘리면 다시 안 붙어.”
“자르지 않아도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바르셀다가 아무리 괴물 같은 힘을 낸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몸이 인간인 이상 관절이 꺾이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어깨와 발목의 근육에 상처를 내면 움직임이 둔해질 것이다.
“힘줄을 끊으면 사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잘라 내는 게 아니라 상처 입히는 것뿐이니 차츰 회복되겠지요. 이 마을 사람들은 회복이 빠르니.”
“허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더라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될 거라 봅니다.”
에르잔은 나자예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르잔에게 몇 번이나 후려 맞고 뻗어도 금방 회복해서 사비나에게 추근대지 않았던가. 시간이 멈춘 이 마을에서는 바르셀다가 다소 상처를 입더라도 금방 회복될 것이다.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불타지만 않는다면.
“애송이. 바르셀다는 지금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 있어. 팔다리야 대충 감으로 썰어 내면 되지만, 저주를 받으면서 몸체도 이상하게 늘어나서 보통 사람이랑은 구조가 다를걸? 어디가 관절인 줄 알고 꺾고, 어디가 힘줄인 줄 알고 끊어?”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르잔은 결연한 얼굴로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사비나 아가씨. 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지요?”
“에르잔…….”
“저는 아가씨의 호위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