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단단히 결심을 다진 나자예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카밀라가 사비나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섰다.
“뭘 믿고 너한테 맡겨? 사비나, 믿지 마. 저 자식, 저렇게 말하면서 시간 끌어 놓고 튈 놈이야!”
“카밀라, 너 너무하는 거 아냐?”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우리 마을에 나자예프, 너보다 너무한 망나니는 없어!”
“네가 나의 뭘 안다고 그래!”
“너의 무엇 하나도 알 가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지!”
마을에서 제일 시끄러운 카밀라와 마을에서 제일 막 나가는 망나니의 말싸움을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을 만큼 그들은 한가하지 않았다. 오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자예프의 배를 발로 퍽, 걷어찼다.
“끄악!”
“망나니는 일단 진정시키는 게 답이고, 카밀라 너도 좀 조용히 해 봐. 난 이 정신 나간 아가씨가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이는지 들어야겠으니까.”
“나 보면서 말하지 마! 입 냄새 난단 말이야!”
몇 달을 목욕을 안 했으니 입 냄새도 보통이 아닌지, 카밀라가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막으며 물러났다. 겨우 상황을 정리한 오딜은 사비나에게 물었다.
“이봐, 아가씨.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해서 뭘 어쩌려고?”
“분노, 증오, 욕망, 체념. 네 개의 저주의 핵을 심어 주술을 거는 바람에 이 마을의 시간이 멈추었죠. 억지로 저주를 해주하겠다고 균형을 무너뜨리면 마을의 모두가 위험해지잖아요? 그래서 제가 전부 흡수할 셈이에요. 그럼 제 안에서 균형을 이루고, 제가 마을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마을의 멈춰 있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할 테니까.”
“아니,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요?”
오딜은 사비나의 얼굴과 손을 가리켰다.
볕에서 일을 한 경험이 없는 사비나는 피부 하얗고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굳은살 하나 없고, 카밀라가 빌려준 평범한 루바하를 입고 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고고한 분위기가 흘렀다.
귀족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어느 교회의 사제나 수도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이지. 귀족 아가씨가 무슨 헛바람이 들었기에 이런 연고도 없는 위험천만한 마을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헛소리를 하는 건지.”
“연고가 없는 건 아니에요. 저를 이곳으로 보낸 건…… 콘바야젠 백작이니까.”
아버지를 「콘바야젠 백작」이라고 부르려니 좀 낯설었지만, 어차피 살가운 부녀관계는 아니었다.
오딜의 황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저주를 흡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주를 흡수해도 죽지 않고…….”
“일부러 이 마을로 보냈다면, 아가씨가 이 마을의 저주를 흡수해야 하는 목적이 따로 있다는 소리 아닌가?”
“……네?”
“그렇잖아? 어느 한가한 귀족 나리가 갑자기 미쳐 돌아서 「저 마을에 저주가 깃들었으니 저주를 흡수하는 사람을 보내 구해 주어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겠어? 산 아래로만 내려가도 이 마을의 존재조차 제대로 모르는 놈들이 한가득인데, 일부러 이곳에 젊은 아가씨와 호위기사 하나만 달랑 보냈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지.”
오딜의 말에 사비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는 분명 사비나에게 「요양을 하고 오라」며 이곳으로 보냈다. 아마도 이 마을에 깃든 저주의 기운이 그녀에게 깃든 죽음의 저주를 더욱 강하게 만들 거라는 계산이 있어 보낸 것이리라.
하지만 만약, 아버지의 목적이 그것뿐만이 아니라면?
“아가씨. 이 징글맞은 저주를 완성하는 데에 몇 명의 목숨이 들어갔는지 알고 있나?”
“연못과 우물에 있던…… 시신을 봤어요.”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알고?”
“15년 전에, 군인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왔다고…….”
“군인들이 움직였다는 건 상부에서 명령을 받았다는 뜻이지.”
카이라트가 연구하던 불로불사의 주술. 그는 누군가 그의 연구 자료를 훔쳐 달아났다고 말했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방문하기 전에는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이 전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짜일지 아닐지도 모를 불로불사의 주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만큼의 힘을 가진 자는 분명 귀족이다.
그만한 짓을 저지르고도, 이 일이 알려지지 않도록 입막음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위와 권력을 가진.
“카밀라나 로스카옌은 아가씨를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아가씨가 수상쩍기 짝이 없거든.”
“……저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그 말을 믿게 할 근거는?”
“근거는…… 없어요.”
그렇다. 근거는 없다.
사비나의 목적은 이 마을의 저주를 흡수해서 마을의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던 죽음의 화신으로서,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알량한 자기 위안을 거듭할 뿐이다.
저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했다는 보람.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자신에게 거짓된 면죄부를 주기 위한 이기심으로 실행한 일이다.
오딜의 지적이 정확했다.
사비나가 하려는 일은 자원봉사나 희생 따위가 결코 아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지만 제게는 필요한 일이에요.”
“이 마을의 저주를 흡수해서 뭘 하려고?”
“뭘 하려는 게 아니라, 흡수하는 일 자체가 제게는 목적이고…… 보람이에요.”
“보람?”
오딜의 질문에 사비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미사는 열리지 않는다고 한들 신을 모시는 성전이기 때문일까. 이곳에 고인 저주의 양은 많지 않았다. 카밀라에게 걸려 있던 저주는 사비나가 흡수했고, 나자예프는 애초에 제물을 따로 둬서 저주를 피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천천히 눈을 뜬 사비나는 오딜을 마주 보았다.
“나를 구속하고 짓누르는 이 무거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뭐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고요.”
“…….”
“당신도, 그렇죠?”
사비나의 질문에 오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냉큼 시선을 돌리며 괜히 뒷머리를 긁어 댔다.
이가 옮겨붙을까 기겁한 카밀라가 사비나를 끌고 한 걸음 멀어진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자신을 구속하고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
마을의 호위대장으로서,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오라비로서 동생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
행여 꿈에라도 다시 그 광경이 나올까 두려워 잠들지도 못하고 바위에 머리를 찧어 가며 자해하다가 기절한 것이 몇 번이었던가.
죄책감을 벗지 못한 오딜이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을 멀리서 지켜본 것은 일종의 자기 위안이었다. 자신은 동생을 지키지 못했으니, 네나뷔스테는 동생들을 지키길 바라서.
대리만족이라고 보기에도 낯부끄러울 만큼 염치없는 행동임을 오딜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엉킨 머리를 한 움큼 쥐어뜯고는 양손을 탁탁 털었다. 이번에는 에르잔도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하, 이것 참. 이 손바닥만 한 아가씨가 겁도 없이…….”
“사비나가 나보다는 큰데?”
“카밀라. 어른이 말하는 데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마을 사람들 다 죽어 갈 때 도망쳐 놓고 뒤늦게 기어들어 온 게 누구더라?”
카밀라의 지적에 오딜이 으득, 이를 악물었다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오딜 아저씨. 아저씨가 진짜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책임을 져.”
“무슨 책임?”
“나도, 카이라트도, 로스카옌 신부님도, 저기 있는 덜떨어진 나자예프까지 사비나에게 희망을 걸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뒤에서 자신은 덜떨어지지 않았다고 나자예프가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딜은 반쯤은 기가 차고 반쯤은 화가 나는데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만 털었다.
“바르셀다를 막는 건, 나 혼자서는 무리야.”
“그러니까 내가 바르셀다를 맡겠다고 말했잖아!”
나자예프가 벌떡 일어나 끼어들자 오딜은 진저리치며 그를 밀어냈다. 나자예프도 냄새나는 오딜에게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휙 떨어져서 에르잔 옆에 붙었다.
“나 대신 받고 있던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바르셀다가 제일 먼저 공격할 대상은 나일 테니까.”
“미끼가 되겠다고? 수틀리면 제일 먼저 도망칠 놈 말을 어떻게 믿어?”
“반지를 빼면 저주는 나한테 돌아와. 내 몸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도망칠 수 있는 상태는 아닐 테지.”
나자예프의 청록색 눈동자가 일순간 붉게 빛났다. 오딜은 나자예프의 진심을 알아챈 건지, 아니면 그저 더 이상 논쟁하는 것이 지겨워졌는지 양손을 허리에 짚고 고개를 털었다.
“알았어. 나자예프 네놈이 죽든지 말든지 나와는 관계없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르셀다만 제압하면 되는 거지?”
“죽이면 안 돼요. 제가 핵을 전부 흡수하기 전에 바르셀다가 죽으면 저주의 균형이 깨져 버리니까.”
“그럼 양팔과 발목부터 잘라 내야겠군. 난동 부리지 못하도록 움직임을 봉쇄하는 데는 그게 제일이니까.”
“무슨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어?”
기겁하는 나자예프를 무시하고 오딜이 에르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칼 좀 빌려줘, 애송이. 내 단도는 이가 다 빠져서 효과가 없어.”
“검은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봐. 나한테 도움을 요청한 건 네 주군이라는 저 아가씨야? 주군의 말은 잘 듣는 개 아니었나?”
“검만으로 제압하는 거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돌아보았다. 오딜의 위협적인 시선에도 놀라지 않았던 사비나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릴 만큼 이질감이 드는 시선이었다.
“사비나 아가씨. 나자예프를 죽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요?”
“네? 네…….”
“주술도구를 제거한 나자예프를 내버려 두고 바르셀다를 제압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면 나자예프가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에 있던 나자예프가 웬일로 내 걱정을 해 주냐는 듯이 올려다보았으나 에르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오로지 사비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나자예프가 저주를 받아들이는 순간, 죽지 않도록 사비나 아가씨께서 그의 저주를 흡수하십시오. 그동안 제가 바르셀다를 막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