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52화 (52/189)

52화

갑자기 뛰쳐나온 나자예프의 모습에 움찔 놀란 사비나나 에르잔과는 달리, 오딜과 카밀라는 태연했다. 로스카옌 사제는 처음부터 나자예프가 고해실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는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 들어가라는 뜻이다.

“잠깐만 기다려. 나한테도 항변할 기회를 줘!”

무슨 항변을 할 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의 누구도 나자예프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자예프. 너는 어차피 입 열면 헛소리밖에 안 하잖아.”

“네녀석은 나이가 몇인데 사내 녀석이 모양 빠지게 몰래 엿듣기나 하고…… 그나마 도끼는 이제 안 들고 있군.”

“교회에 들어올 때는 무기 소지를 금지했다네.”

나자예프가 손도끼를 들고 있지 않은 건 로스카옌의 말 때문이 아니라 에르잔이 깔끔하게 제 무기를 박살 내 버렸기 때문이지만, 어차피 지금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신랄한 말을 내뱉는 카밀라와 철부지 어린 조카를 보듯 혀를 끌끌 차는 오딜의 반응에 나자예프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로스카옌을 바라보았다.

“엿들은 거 아니야. 고해성사를 하려고 들어가 있었던 거라고!”

“고해성사를? 나자예프가?”

카밀라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나자예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딜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로스카옌은 침묵했다. 답답해진 나자예프는 가슴을 탁탁 내리치며 하소연을 했다.

“종을 울리면 들어주겠다고 해 놓고서 나를 마냥 기다리게 한 건 로스카옌이잖아!”

“지금은 예전처럼 한가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뭐?”

“카밀라와 에르잔의 이야기를 듣고, 사비나 아가씨를 보조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모자란데, 자네 하소연이나 듣는 데 낭비할 시간이 없지.”

어조는 담담했으나 말에 담긴 내용은 카밀라가 대놓고 하는 욕보다도 더 직설적이었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이 마을에 오기 전에는 로스카옌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가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가 열리지 않는 미사실에서 혼자서 초를 켜고, 다시 끄고, 일기를 쓰기를 반복했다.

무료한 일상도 15년이나 반복되면 아무런 의미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시간 감각마저 흐려지는 것 같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카밀라나 나자예프가 고해성사라는 핑계로 하소연을 하러 오면 그걸 들으면서 아직 자신이 미치지 않고 타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멈춘 이 마을에, 현재를 사는 이들이 들이닥쳤다. 모든 저주를 흡수하는 불사의 여인과 모든 저주를 황금빛으로 불태워버리는 남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의 존재가 이 마을에 희망을 가져다줄지 재앙이 될지는 로스카옌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는 좋았다.

하나는 드디어 무료하게 반복되던 일상이 종막을 맞이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가슴 속에 내내 얹힌 것처럼 머물던 안타까움과 죄책감, 때늦은 후회가 조금씩 가라앉고 서글프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한다는 것.

“그렇게 고해성사가 하고 싶으면 벽을 보고 하게나.”

“저기, 잠깐만? 로스카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사제면서 그런 말을 해도 돼?”

“자네에게는 그래도 된다네.”

“로스카옌!”

“듣자 하니 네나뷔스테를 제압할 때 나자예프, 자네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았다면서.”

누구에게 들은 걸까. 나자예프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물론 사비나도 에르잔도 나자예프가 네나뷔스테에게 어디를 얻어맞고 어떻게 뻗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자예프가 네나뷔스테를 제대로 제압했다면 사비나가 다칠 일도, 에르잔이 나서서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이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로스카옌은 에르잔에게는 화를 냈지만, 나자예프에게는 애초에 기대하는 바가 없었기에 화를 낼 가치조차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시했을 뿐이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신전에 모인 사람은 여섯 명. 하나는 사제, 둘은 외지인, 나머지 셋이 이 마을 출신일진대 나자예프는 오히려 자기 혼자만 동떨어진 차원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래. 최선을 다해도 그 정도니 자네는 그냥 고해실에서 벽 보고 고해성사나 하는 게 좋겠네.”

“바르셀다의 저주를 풀겠다면서, 나를 쏙 빼놓고 이야기할 셈이야?”

나자예프의 양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답답함이었다. 마을의 모두가 저주로 고통받아 미쳐갈 때, 혼자서 유유자적하게 손도끼나 휘두르며 돌아다니던 마을의 불한당은 지금 이 순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저어, 그러지 말고. 다들 나자예프의 이야기를 들어 봐요.”

“사비나, 너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역시 내가 반한 여자야!”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뛰어오려던 나자예프는 에르잔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가 가까스로 의자를 잡고 버텨섰다.

“뭐 하는 거야,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께 이 이상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에르잔이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나자예프는 조금 기가 죽어서 의자 옆에 몸을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오딜은 피식 웃었다.

“역시 자네는 아직 애송이로군. 나였으면 벌써 저놈 목 뒤를 칼집으로 쳐서 기절시켰어.”

“사비나 아가씨께서 나자예프의 말을 듣겠다고 하셨기에, 기절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명령은 잘 듣는군. 기사는 몰라도 개가 될 소질은 있어 보여.”

오딜이 빈정거리는 말에도 에르잔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사비나 아가씨. 나자예프에게 물어보실 것이 있으십니까?”

“물어볼 건 아니고, 나자예프의 동의를 구하고 싶어서요.”

사비나는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고리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것의 의미를 눈치챈 나자예프는 얼른 제 오른손을 감쌌다. 엄지와 검지에 끼고 있는 금색 반지. 나자예프에게 가는 저주를 바르셀다가 대신 받도록 만들어 주는, 주술도구.

“사비나. 이걸…… 빼 달라고?”

“아뇨. 나자예프 것을 빼려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당신이 저주를 받을 테니까.”

사비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바르셀다가 지니고 있는 반지를 제가 끼도록 할게요. 그러면 나자예프에게 가는 저주가 제게로 옮겨올 테니, 바르셀다의 <분노의 핵>을 흡수하는 데 더는 방해되는 게 없을 거예요.”

“뭐어?”

“사비나, 미쳤어?”

나자예프보다도 카밀라가 더 기겁하며 그녀의 등짝을 철썩 내리쳤다. 매서운 손길에 사비나는 저도 모르게 콜록, 기침을 하고는 카밀라를 돌아보았다.

“카밀라…….”

“아, 미안해. 아팠어? 내가 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서…… 야, 에르잔!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너 그러다가 사람 찌르겠다?”

사비나의 등짝을 갈긴 정도만으로 에르잔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나는 것을 본 카밀라는 얼른 사비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등을 슥슥 쓰다듬었다.

“방금은 미안했어. 하지만 사비나, 방금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자예프가 뭐라고 네가 그렇게까지 해야 해?”

“카밀라. 내 앞에서 나 욕하는 건 그만해 줄래?”

“아, 뭐래! 듣기 싫으면 네가 꺼져, 나자예프!”

“카밀라, 나자예프. 싸우지 마세요. 저는 바르셀다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바르셀다는 그 몸에 분노의 핵을 품은 다음에, 형인 나자예프의 저주를 대신 받는 제물이 되었다고 나자예프가 말하지 않았던가. 주술에는 순서가 있어서, 마치 위에 쌓인 벽돌을 치워야 아래 깔린 벽돌을 꺼낼 수 있는 것처럼 나중에 걸린 주술을 먼저 거두어야 앞서 걸린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

바르셀다의 <분노의 핵>을 흡수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나자예프의 반지를 빼서, 더 이상 주술도구로서 작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저주를 받은 나자예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카림이나 카밀라처럼 저주로 괴로워하는 상태라면 사비나가 흡수할 수 있지만, 만약 저주의 반동을 받는 즉시 몸이 녹거나 타들어 가서 죽어 버린다면 손을 쓸 수가 없게 된다.

나자예프는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비나는 나자예프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은 방법은 하나.

바르셀다가 대신 받고 있는 나자예프의 저주를 사비나의 몸으로 옮겨옴으로써, 그에게 걸린 저주가 온전히 <분노의 핵> 하나뿐인 상태로 만드는 것.

“나는 이 마을의 모든 저주를 흡수할 생각이에요. 주술을 해주할 생각이 없으니, 순서 같은 건 상관없죠.”

“사비나. 지금, 나 대신 네가 저주를 받겠다는 소리야?”

“나자예프에게 약속했잖아요. 네나뷔스테의 저주를 흡수하는 걸 도와주면, 당신이 죽지 않을 방법을 반드시 찾아보겠다고.”

나자예프의 저주를 대신 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차피 죽지 않는 저주의 화신. 사비나는 자신이 나자예프의 제물이 되는 것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바르셀다 대신 그녀가 제물이 되는 순간부터, 바르셀다가 품고 있는 <분노의 핵>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되니 더욱 효율적이다.

“그런데 바르셀다의 상태가…… 팔에 온통 검은 털이 나서, 반지를 어디에 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오딜에게 바르셀다를 제압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예요.”

“내가 그놈을 제압하면?”

“제일 먼저, 반지를 벗겨서 제가 대신 낄 거예요. 그다음에 저주의 핵을 흡수할 거고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는 언제라도 발생하는 법. 어쩌면 또다시 에르잔이 나서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자예프. 당신 동생이 조금…… 다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절대로 죽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뭘 안심하라는 거야.”

의자를 붙잡고 주저앉아 있던 나자예프가 몸을 일으키더니, 난폭한 손동작으로 묶은 머리를 풀고 제멋대로 헤집어 버렸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올린 나자예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랑이든 목숨이든, 어느 한쪽은 끝장나는 상황인데.”

“네?”

“……멋지게 죽는다는 거, 어떤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말이야.”

나자예프는 반쯤 뜯어진 검은 장갑을 벗어, 머리를 묶었던 끈과 함께 바닥에 내던졌다.

“반지를 뺏을 필요 없어. 나한테 와야 할 저주는 내가 감당할게. 사비나, 너는 핵을 흡수하는 일에만 집중해.”

“나자예프. 저주를 뒤집어쓸 셈이에요? 위험해요.”

“네가 뒤집어쓰는 건 안 위험하고?”

“…….”

“반한 여자에게 경멸당하는 건 그나마 짜릿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동정을 받으니까 정말 비참하네.”

쓰게 웃으며 나자예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바르셀다를 다루는 법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나한테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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