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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51화 (51/189)

51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사비나는 목의 상흔과 키스마크를 가리기 위해 위에 케이프를 걸친 상태였다. 머리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까닭에 후드를 쓰지 않아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올가?”

“네?”

자기가 말해 놓고도 흠칫 놀랐는지, 오딜은 고개를 털고는 흉터 가득한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올가라니, 말도 안 된다.

제 여동생은 이미 15년 전에 죽었거늘.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남자의 반응에 사비나는 검은 눈을 또르르 굴렸다.

‘나자예프도 내가 올가라는 사람을 닮았다고 했는데…… 많이 비슷한가?’

고개를 갸웃하던 사비나의 시선은 단상에 주저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로부터 에르잔에게로 향했다.

에르잔이 무사히 검을 회수하고 돌아온 것을 본 사비나는 휴우, 안도했다. 침착함을 되찾은 사비나는 다시 중년의 남자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비나 에이다나 콘바야젠입니다.”

“…….”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가를 문지르던 오딜은 사비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보더니, 눈을 몇 번 더 깜박깜박 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콘바야젠…… 콘바야젠이면 귀족인가? 여긴 귀족 아가씨가 걸음을 할 만한 곳이 아닌데.”

확실히 그랬다. 사비나가 평범한 귀족이라면, 절대로 이런 마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았거든요.”

“봉사활동이라면 다른 장소를 찾아보는 게 낫지 않나?”

“마을의 저주를 풀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이봐, 아가씨.”

오딜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흉터 가득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카밀라는 혹여 오딜의 머리에서 이라도 튀어나올까 끔찍하다는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이 마을은 15년이나 저주가 쌓인 지옥이야. 살아남은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수가 수십 배는 더 많지. 이런 원한 가득한 곳에서 봉사해 봤자 보람도 없을걸?”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걱정?”

“저도 저주에 잠식된 몸이라, 어떤 저주를 흡수해도 죽지 않으니까, 안심하셔도 된다고요.”

사비나의 대답에 오딜의 입이 허, 벌어졌다.

오딜의 빈정거리는 말을, 사비나는 그녀에 대한 ‘걱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안심하라’고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대답인데도, 사비나의 말을 듣는 순간 오딜은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제 뒷머리를 잡아끄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양손으로 단상을 짚고 뒤로 기댔다.

“아가씨. 나는 오늘 처음 아가씨를 봤어. 생판 모르는 여자 걱정이나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사비나. 신경 쓰지 마. 오딜 아저씨는 원래 저래.”

누가 보면 시비를 건다고 생각해도 모를 말을 태연하게 뽑아내는 오딜 때문에 혹여 사비나가 마음에 상처라도 입지 않을까, 카밀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비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도리어 느슨하게 풀어졌다.

“만난 건 처음이죠.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알아요.”

“나를 안다고?”

“카밀라가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으니까요. 얼굴은 지금 보았고요.”

“…….”

“원래는 당신이 이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다고,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이 마을에 호위대장 같은 건 애당초 없었어. 아니, 내가 죽였지.”

마을을 수호한다고 혼자 착각하고 있던 미련한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그 착각은 15년 전에 깨졌다.

“이 마을은 위험해. 신변 보호를 하겠답시고 저 애송이를 호위기사로 데려온 모양인데, 저놈은 자기 몸 하나도 간수 못 할 얼뜨기니까 몸 성할 때 함께 돌아가는 게 좋아.”

사비나가 에르잔을 바라보자, 그는 민망한 듯이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실전 경험이 부족합니다. 오딜의 검술 실력은 저보다 뛰어납니다.”

“그렇군요.”

“내가 뛰어난 게 아니라 네가 허술한 거야, 애송이.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썩 사라져.”

“에르잔은 믿음직한 호위예요.”

오딜의 말을 부정하며 사비나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데도 사비나는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속이 뒤집히는 끔찍한 저주의 냄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에르잔은 강해요. 하지만 저주의 핵을 상대하는 데는 부적합하죠. 오딜, 당신이 도와줄 수 있나요?”

“내가 잠적하던 사이에 아주 단체로들 미친 건가? 아니면 사실은 내가 미친 거라서 지금 이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는 건가?”

오딜의 커다란 손이 단상을 쿵, 내리쳤다가 부릅뜬 눈으로 사비나를 노려보았다. 맹수와도 같은 흉흉한 눈빛에도 사비나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도리어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 태연했다. 오히려 사비나로서는 저런 경계의 시선을 받는 쪽이 마음이 더 편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오딜의 표정은 꼭 못 볼 것은 본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내가 잠깐 헛것을 봤나 보군. 올가와는 전혀 안 닮았는데.’

올가였다면, 오딜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을 테니까.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자란 오딜에게 여섯 살 어린 동생인 올가는 제가 지켜야 할 유일한 가족이었다.

차라리 애지중지하며 싸고돌았다면 그나마 나았으련만, 어질 철부지였던 오딜은 제 동생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올가에게 아주 강압적으로 굴었다. 온종일 무엇을 하는지 감시를 하고 교류를 차단했다. 만약 말리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네나뷔스테가 네 개의 관에 동생들을 가둔 것처럼, 자신도 올가를 가둬 두었을지도 모른다.

올가는 다정한 성품이었으나 오딜이 하도 그녀의 주위에 다가오는 인간에게 날을 세운 까닭에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연애도 못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덜컥,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가져 버렸다.

제 여동생을 임신시킨 놈을 죽여 버리겠다며 오딜이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올가는 더욱더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는 오딜을 피해 마을의 북쪽, 여자들만이 사는 장소로 도망쳤다.

오며 가며 언뜻 마주쳐도 금방 눈을 피하고, 말이라도 걸라치면 도망치고, 찾아가면 다른 여자들이 올가를 그만 괴롭히라며 밀어낸 까닭에 대화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를 몇 년.

딸을 낳고 혼자 키우며 숨죽이며 살던 올가가 죽는 순간까지, 오딜은 제 동생을 만나지 못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올가를 구속하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행복하게, 친구도 사귀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올가 정도로 미인이라면 이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좋은 혼처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제 여동생은 죽지 않았을 터였다.

올가의 죽음은 군인들에 의한 것일지언정, 올가의 불행은 온전히 오딜 자신의 탓이었다. 그래서 죄책감에 도망쳤다.

호위대장이라는 직책도 버리고, 죽어 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눈을 돌려 숲속에 틀어박혔다.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먹지도 않고 살면 금방 죽겠지, 싶었는데 기구하게도 오딜은 죽을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는, 저주를 견뎌 낸 사람은 자연사하지 않는다는 걸 안 것은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따금 마을로 나와 예전과는 전혀 달라져 버린 풍경을 마주하고는 그 안에 체념이 쌓여 갔다. 차마 로스카옌을 찾아갈 용기는 없어서, 동생들과 함께 있는 네나뷔스테가 위협을 당하지는 않나 가끔 살펴보는 게 전부였다.

몰래 상태만 보고 갈 셈이었는데, 어제는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양팔에서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네나뷔스테와 화상으로 끙끙 앓는 자니베크를 발견한 오딜은 아이들을 데려와 치료하고, 아이베크와 줄디즈를 재우고 상태를 지켜보느라 밤을 새웠다. 겨우 안정이 된 새벽에 나와 살펴보니 네 개의 관이 부서진 자리에 꽂혀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오딜은 칼자루를 쥐고 바닥에 꽂힌 검을 빼냈다. 스르렁. 엉성하게 감겨 있던 녹슨 쇠사슬이 떨어지며 은빛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의 무게감이 익숙했다.

마을의 호위대장이라며 허세를 부리던 시절엔, 그도 이런 무기를 들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 감상에 잠겨 있던 그를 현실로 불러낸 것이 에르잔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검을 손에서 놓았는데도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노화만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 감도 떨어지지 않는 건지, 오딜은 에르잔을 공격하면서 제 상태가 기가 막힐 정도로 멀쩡한 것을 깨닫고 자조했다.

동생도, 친구도, 이웃도 다 죽거나 저주로 불구가 된 이곳에서 저 혼자 이리도 멀쩡하다니 너무 한심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 싶어 에르잔을 따라 교회에 왔더니만, 웬 여자가 툭 튀어나와 한 귀로 들어도 정신 나간 소리를 진지하게 해 대는 바람에 오딜은 머리가 아파 왔다.

“아가씨. 로스카옌이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검술이 뛰어나다면서요?”

“그래서 뭐. 저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목이라도 친히 따 주라고?”

“바르셀다를 제압하려면 힘이 좋은 남자가 필요해요.”

“……바르셀다를?”

“저주의 핵을 흡수해야 하는데, 바르셀다가 난동을 부리면 저주를 흡수하기도 전에 얻어맞고 기절할 테니까요. 제가 저주의 핵을 흡수할 때까지, 누군가 그를 제압하고 있어야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비나는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에르잔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싶지만, 그러면 바르셀다가 크게 다칠 것이다.

오딜이 에르잔보다 뛰어난 실력자라면 바르셀다를 제압하기 한층 쉬울 터.

“네나뷔스테 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딜의 도움이 필요해요.”

“바르셀다를 건드리면 나자예프가 가만히 있지 않을걸?”

“설득해야죠.”

“그 망나니를 설득한다고? 아가씨. 역시 제정신이 아니로군.”

“사비나 앞에서 내 욕 하지 마, 오딜!”

안 어울리게 숨어서 듣고 있었는지, 저를 욕하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나자예프가 고해실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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