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오딜. 본래 이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던 존재.
“역시 당신이었군요.”
“역시는 무슨 역시야. 나를 언제 보았다고.”
“로스카옌 신부님께 들었습니다. 이 마을의 호위대장이 오딜, 당신이라고요.”
“호위대장? 그런 놈은 없어. 아니, 죽었어.”
마을의 호위대장이면서, 마을을 지키지 못했다.
군인들에 의해 삶의 터전이 짓밟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제가 보물처럼 소중히 여겨 왔던 여동생마저 죽어 버렸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는데 호위는 무슨 호위란 말인가. 오딜은 자조했다.
“호위대장 오딜을 찾으러 왔다면 번지수 틀렸어, 애송이. 여기 있는 나는 그냥 비렁뱅이 거지인 오딜이거든.”
“검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확신이 들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아하니 그가 분명한데, 너무 깔끔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도리어 혼란스러워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오딜은 <호위대장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확신인지는 몰라도 예상이 비껴갔군. 아침 체조는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 봐.”
“기다리십시오.”
에르잔을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이 돌아서는 오딜의 목 바로 옆에, 서늘한 감촉이 와 닿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피부에 맞닿아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더라면 칼날이 오딜의 목을 그었을 것이다.
어차피 깊이 베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애송이가 아니라 팔푼이로군. 이 정도 간격이면 베여 봤자 지혈하면 그만이야. 훈련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딴 말랑말랑한 방법밖에 쓰질 못하지?”
“예. 당신이 베이는 것을 감안하고 도망쳤더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협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오딜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에르잔은 훈련소 시절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피를 보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으뜸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론과 실전은 차이가 있지.”
오딜이 빙글, 몸을 돌렸다. 칼날이 그의 목을 스쳐 붉은 실선을 그리자 에르잔은 순간적으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딜은 품속의 단검을 뽑아 에르잔의 턱 밑에 들이댔다.
“애송이. 아직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 없지? 눈빛에서 티가 나.”
“…….”
그 말대로였다. 에르잔은 칼자루에서 손을 놓지 않았으나 오딜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힘을 늦췄다.
턱 밑에 닿는 단검의 느낌은 서늘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뜨거웠다. 오딜이 진짜로 에르잔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벌써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오딜의 황금색 눈동자에 맹수와도 같은 살기가 어른거렸다. 묵직한 저음이 칼처럼 예리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런 폐쇄된 마을에서는 말이야, 외지인이 들어오면 수상하게 여기는 게 보통이지. 검을 들고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닌다면 뒤에서 칼침을 맞고 죽어도 변명할 거리가 없어.”
“저희는 이곳에 오기 전, 로스카옌 신부님께 먼저 연락을 드렸습니다. 무단 침입자 취급하지 마십시오.”
“네나뷔스테가 지키던 관을 부숴도 된다고, 로스카옌이 허락하던가?”
“그건…….”
“네나뷔스테와 자니베크가 다쳤어.”
사비나를 구하기 위해 에르잔이 뛰어든 순간, 네나뷔스테는 양팔이 불타올랐고 자니베크는 등의 가시가 뽑혀 나가며 화상을 입었다.
아무리 제 주군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민간인 아녀자와 어린아이를 다치게 한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에르잔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이베크도 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줄디즈는 무사하니 네 번째는 봐주는 걸로 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오딜은 에르잔의 턱 아래 겨누었던 단검을 거두었다. 닿았을 때의 감촉이 너무 섬뜩해서 날카로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단검은 이가 다 빠져 무딘 칼이었다. 오딜은 단검을 외투 안의 주머니에 적당히 갈무리하고는, 허리춤의 포켓에서 지저분한 천을 꺼내 피가 흐르는 부위를 억눌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오염된 천으로 지혈을 하면 상처 부위가……!”
“파상풍 같은 건 안 걸려. 여기서는 말이야.”
깊게 베인 것은 아니었는지, 오딜이 목깃 안에 천을 대충 욱여넣어 고정하자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그렇다고 공격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에르잔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쯧, 혀를 찼다.
“이봐, 얼뜨기.”
“예, 예?”
“사람을 멈춰 세웠으면 용건을 말해야지.”
“아…….”
오딜의 목에 검을 들이대어 위협하면서까지 멈춰 세운 이유. 에르잔은 오딜을 만나고 싶었다. 정확히는,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에르잔은 동쪽과 남쪽의 저주의 ‘핵’은 마주했지만, 서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북쪽에는 제법 많은 생존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폐쇄적인 마을. 저주로 인해 외지인인 자신들을 불신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오딜의 협조가 필요할 거라고, 로스카옌 사제는 말했다.
“저와 함께 교회에 가 주십시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혼자서 길을 못 찾아?”
“그게 아니라, 교회에 제 주군…… 사비나 아가씨가 계십니다.”
“그래서, 뭐?”
“사비나 아가씨께서 하시려는 일에 오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함께 가 주십시오.”
“사람 목에 칼을 들이대 놓고 하는 부탁이 그건가?”
에르잔의 눈동자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오딜은 에르잔을 수상하게 여겨 공격했고, 네나뷔스테와 동생들을 다치게 한 보복을 한 것이었으나 에르잔의 처지는 달랐다.
오딜에게는 에르잔이 사라져 주는 게 마음 편한 불청객이지만, 에르잔에게는 오딜이 필요했다.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사비나가 더 이상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무례도 아니고 사과할 것도 없어. 나야말로 그냥 죽여 버렸으면 찝찝해질 뻔했군.”
의아한 듯이 눈을 깜박이는 에르잔을 바라보며, 오딜이 피식 웃었다.
“교회에 함께 가자며? 발이 땅에 붙었나?”
아.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챈 에르잔은 얼른 검을 거두고 앞장섰다.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그렇게 빨리하는 게 아니야, 애송이. 나중에 후회한다.”
못마땅한 듯이 투덜거리면서도, 오딜은 순순히 에르잔의 뒤를 따라왔다.
***
“로스카옌 신부님.”
에르잔이 부르는 소리에 열린 문을 향한 로스카옌이 호오, 하고 작게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의 젊은 청년 뒤로, 흉터투성이에 꾀죄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원숙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카옌의 목소리에 때 아닌 반가움이 깃들었다.
“오딜. 자네가 오기를 기다렸네.”
“……기다리긴 뭘 기다려. 뭐 하고 있나 해서 잠깐 와 본 거야.”
오딜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척척 걸어가 단상 위에 철퍼덕 앉았다. 미사실의 의자 배치 간격이 좁은 게 불편해서, 라고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솔직하지 못한 오딜의 태도에 오히려 로스카옌은 안도했다.
피하지도 않고, 능숙하게 속마음을 감추지도 않고, 알아달라는 듯이 대놓고 빈정거리는 것이야말로 그가 겨우 근심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였으니.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스카옌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오딜은 쯧 혀를 차면서 손가락으로 에르잔을 가리켰다.
“저런 애송이를 데리고, 마을의 저주를 뭘 어쩌겠다고?”
“에르잔은 사비나 아가씨의 호위기사라네. 저주의 핵을 흡수하겠다고 나선 건 사비나 아가씨지.”
“뭐?”
“처음엔 말렸지만, 이 마을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분을 내가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한데 아무래도 에르잔 하나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말이야.”
“로스카옌. 혼자서 세월을 다 처맞느라 치매가 왔나? 원래는 나보다도 어린 주제에.”
“치매는 아니지만 움직이기는 성치가 않지. 그러니 오딜, 자네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침착하면서도 여유로운 음성에 오딜이 미간을 찌푸리며 로스카옌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행색은 나보다도 멀쩡하면서…….”
“자네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군.”
“안 씻어도 병 같은 건 안 걸리니까 말이야. 어차피 더러워질 거.”
제대로 씻지도 않아 얼룩덜룩한 피부와는 달리 생생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와 검고 탁한 눈동자가 마주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사내와 홀로 세월을 감당해낸 사내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혔다.
“마을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이거지.”
제 나이보다도 폭삭 늙어 버린 로스카옌에 대한 동정심일까, 아니면 너무 어이없는 상황을 마주한 까닭에 현실감이 사라진 것일까. 오딜은 삐딱하게 앉았던 자세를 바로 하고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애송이. 자네가 모시는 아가씨가 정화술사인가?”
“아닙니다. 저주를 없앨 수 있는 건 제 쪽입니다.”
“자네가?”
“하지만 저는 제 능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을 상처 입혔지요.”
사비나의 말에 의하면, 에르잔의 정화는 그저 체질일 뿐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기에, 그가 함부로 정화하려 들면 저주와 결합한 대상은 황금빛 불꽃으로 타 버린다.
처음 바르셀다를 다치게 했던 일이야 그가 사비나를 덮치려는 줄 알았으니 정당방위라 치더라도, 민간인인 네나뷔스테와 그 어린 동생에게까지 화상을 입혀 버린 일은 합리화하기 어려웠다.
에르잔은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밝히기로 했다.
“제가 함부로 저주의 핵을 건드렸다간 그자의 목숨과…… 이 마을의 모두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정화하는 게 아니라 사비나 아가씨께서 그들의 저주를 대신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주를 대신 받아들인다고?”
“사비나 아가씨께는 저주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주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사비나는 분명 그들의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
연못의 물을 정화하고, 카림과 카밀라를 괴롭히던 증세를 낫게 해 주었다. 네나뷔스테가 품고 있던 증오의 핵을 전부 흡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두르고 있던 어린아이가 제 모습을 찾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아이에게 걸려 있던 저주는 사비나가 흡수한 듯했다.
“네나뷔스테가 실신했다고 하시니 바로 상태를 보러 가기는 어렵겠군요. 나머지 세 개의 핵을 처리하는 일에 오딜, 당신이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주군이랑 아주 쌍으로 미쳤어? 이봐, 로스카옌!”
오딜이 어이없다는 듯이 로스카옌에게 한 소리 하려던 그때, 단상 왼쪽의 문이 열리며 카밀라가 들어왔다. 카밀라의 녹색 눈동자가 또렷해지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이게 누구야!”
“……너야말로 누구냐?”
“오딜 아저씨, 머리가 그게 뭐야? 좀 씻고 다녀! 여기까지 냄새가 나잖아!”
“어른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막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카밀라.”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도, 오딜은 카밀라의 얼굴이 멀쩡한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다리를 저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저주로 시간이 멈추기 전, 15년 전의 활발한 모습 그대로의 카밀라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내심 당황한 오딜을 보고 카밀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 옆으로 비켜섰다.
“가뜩이나 마을 꼴이 말이 아닌데, 손님 앞에서 그렇게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야 직성이 풀리겠어? 내가 정말 창피해서…… 사비나. 코 막고 들어와.”
“……사비나?”
에르잔이 말한 그 주군이라는 여자인가.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이기에 이런 미친 짓에 뛰어드는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 싶어 문 쪽을 바라보던 오딜은 카밀라의 뒤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머리의 여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