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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49화 (49/189)

49화

“그, 그게 아니라……! 에르잔과……는 맞지만! 그, 카밀라가 오해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사비나는 난처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르잔과 자신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다.

저주를 흡수하면 성욕에 휩쓸리는 그녀를 섬기는 처지이기에, 에르잔이 억지로 잠자리 봉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간밤에는 성욕이 인 것도 아니면서 그 사실을 숨기고 에르잔에게 안겨 버렸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에르잔을 속였다.

그의 체온을, 숨결을, 심장의 고동과 음성과 눈빛을 알고 싶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했다.

그것을 상기한 사비나의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내가 에르잔을 곤란하게 해서…… 그래서, 나를 도와준 것뿐이에요.”

“뭐야, 설마…… 연애는 귀찮고 섹스만 하겠다, 그런 거야?”

“네?”

“사비나. 그러면 안 돼. 그거 남자들의 전형적인 책임 회피 수법이라고? 더 강하게 나가야지!”

“아니, 아니라니까요…… 그,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안 돼! 내 친구를 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려는 남자를 내가 어떻게 가만히 둬?”

책임 회피는 무엇이고 강하게 나가는 건 무엇이며 악의 구렁텅이는 또 뭘 의미하는 건가.

사비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카밀라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정말 실망이네. 나자예프도 아니고, 에르잔이 그럴 줄이야. 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

“에르잔이 뭘 어쨌다고?”

“꺄아! 로스카옌 신부님!”

진저리치는 카밀라의 뒤에서 로스카옌 사제가 말을 걸어오자, 카밀라는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뛰어가 사비나의 뒤로 숨었다.

카밀라의 말을 이해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어 혼란했던 사비나는 로스카옌이 나타나 준 사실에 차라리 감사했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 묵례하자, 로스카옌의 탁한 눈동자가 사비나의 모습을 모로 훑었다. 혼탁한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과 안도, 그리고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네, 네…….”

사비나는 옷자락을 끌어당겨 목 언저리를 가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스마크는 가렸지만 옷자락에 붙은 흙먼지와 나뭇잎은 털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끝이 헝클어진 머리와 여전히 달콤한 페로몬이 감도는 몸이, 밤새 자리를 비워 놓고 에르잔과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한들 로스카옌이 이 꼴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다. 사비나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로스카옌은 사비나에게 간밤에 어디 갔느냐고 묻지 않았다. 옷차림이 왜 그러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목욕을 하시는 게 좋겠군요. 카밀라. 사비나 아가씨께 새 옷을 가져다드리려무나.”

“으응, 옷? 아, 그러네. 옷도 갈아입긴 해야겠다.”

방금까지 복도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차마 로스카옌 사제 앞에서 친구의 낯부끄러운 비밀을 드러낼 수 없었던 카밀라는 눈을 굴리며 뻣뻣한 자세로 교회 뒷문을 열고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간 복도에 멀찍이 떨어진 두 개의 그림자만이 늘어졌다.

“저어, 로스카옌 신부님…….”

“욕실은 이쪽입니다.”

간밤에 자리를 비워 걱정을 끼친 사실을 사과하려 했으나, 로스카옌은 사비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욕실 문을 가리켰다. 명백하게 대화를 피하고자 하는 태도였다.

간밤의 일을 말하기 껄끄러운 처지인 사비나로서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로스카옌에게 고맙다는 말만 건네고 욕실로 들어갔다.

복도 바닥에는 이제 한 사람의 그림자만이 남았다.

“허어, 이것 참…….”

로스카옌 사제는 닫힌 욕실 문을 한 번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름 가득한 손이 복슬복슬한 수염을 몇 번 쓰다듬더니 옷섶에 가려져 있던 금줄 목걸이를 쥐었다.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교회에 모셔야 할 성물인 그것이 성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지는 오래다.

자신이 사제가 아니게 된 지 오래인 것처럼.

“나자예프 녀석이 날카롭기는 하구먼. 올가를 참 닮았어…….”

로스카옌 사제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미사실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추고는 건너편의 고해실을 바라보았다.

교회에서는 미사를 올리지 않으나 이따금 고해실을 이용하는 이는 있었다. 가끔 카밀라가 와서 제 처지를 한탄하거나, 나자예프가 와서 구시렁거리고는 했으니까.

고해성사가 아니라 화풀이 내지는 하소연이나 마찬가지인 그것을 15년간 묵묵히 들으며, 로스카옌은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줄 알았다.

목에서 붉은 피를 줄줄 흘리며 에르잔의 팔에 안겨 있던 사비나를 보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하려나.”

혼탁한 검은 눈에 쓸쓸함이 깃들었다.

로스카옌 사제는 마치 추억을 더듬듯 고해실의 문을 쓰다듬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사실로 건너가는 그의 등이 한층 더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

남쪽 공터를 향하던 에르잔은 울타리 너머에서 멈춰 섰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서진 네 개의 관이 흩어진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바닥에 꽂혀 있어야 할 제 검이 그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누구십니까?”

안개 때문일까. 동터오는 새벽빛을 등진 탓일까.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체격 정도일까.

에르잔에 비해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장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는 남자의 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검을 쥔 모습이나 서 있는 자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손도끼나 휘두르며 다니는 양아치 같은 나자예프와는 달리, 상대는 제대로 검술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남쪽에는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만이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로스카옌 사제의 말을 떠올리며, 에르잔은 몸을 긴장시켰다.

역광이 남자의 실루엣을 금실로 수놓듯이 더듬어 나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게 자네 검인가?”

묵직한 저음이었다. 적어도 바로 공격하지 않고 대화가 가능한 상태라는 점에 에르잔은 조금 안도했다. 그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울타리 너머의 상대를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예. 제 검입니다.”

“기사가 검을 놓고 다녀? 해이하군.”

“어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으면 벌써 죽었어야지.”

남자의 음성에 순간 살기가 들어찼다. 어두운 음영이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에르잔은 곧바로 울타리를 건너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피했다.

서걱!

에르잔이 서 있던 자리의 울타리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남자가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 조금만 주저했더라도 에르잔의 몸은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주 애송이는 아니군.”

“제 검을 돌려주십시오.”

“주인이 버린 검은 가지는 사람이 임자 아닌가?”

또다시 등골이 오싹해지며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에르잔은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가 기대 서 있던 커다란 나무의 정확히 가운데를 장검이 꿰뚫었다.

그대로 기대 서 있었다면 심장을 꿰뚫렸을 것이다. 상당한 거목이었는데, 남자는 준비 자세도 없이 아주 간단하게 그것을 꿰뚫었다. 어지간한 검의 달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에르잔의 머릿속에 불현듯 로스카옌의 말이 떠올랐다.

원래 이 마을의 호위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다. 군인들이 와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에는, 호위대장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종적을 감추었다고.

“당신이 이 마을의 호위대장이라는 오딜입니까?”

“아니.”

남자는 한 마디로 부정하고는 에르잔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막을 수단은 없다. 그러나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르잔의 시야에 나무에 꽂힌 시커먼 칼날이 들어왔다.

어제 네나뷔스테가 나자예프를 향해 던진 우도였다.

쨍!

나무에 박힌 우도를 한 손으로 뽑아낸 에르잔은, 자신을 향해 내리꽂는 장검의 궤적을 받아 흘렸다. 하도 거칠게 다룬 까닭에 우도의 날은 여기저기 이가 빠져 있었으나 제법 튼튼하고 묵직했다.

정면에서 받아낸다면 부러졌을 테지만, 궤적을 비틀어 받아 흘리는 거라면 무딘 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에르잔의 목을 일격에 베어 낼 기세로 휘둘렀던 장검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푹 꽂혔다.

남자의 손이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아내기까지의 아주 잠시.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에르잔은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큭!”

남자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흉터가 가득한 손이 칼자루를 놓친 순간, 에르잔은 제 검을 뽑아 들었다. 익숙한 검의 무게감과는 달리 자루에는 낯선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에르잔은 남자를 향해 검을 겨누며 공격 자세를 취했으나, 그는 에르잔의 검을 피하지도, 다른 무기를 뽑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걷어차인 부위를 툭툭 털어 냈다.

“아니, 취소해야겠어. 역시 아직 애송이로군.”

“뭐가 말입니까?”

“검을 빼앗았으면 바로 나를 베어 버렸어야지. 하다못해 살기만 제대로 내뿜었어도 단검 정도는 뽑았을 텐데 말이야.”

“제게는 당신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난 자네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검을 되찾으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니까요.”

“……그따위 마음가짐으로는 자기 몸 하나도 지키기 힘들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쯧, 혀를 차며 남자가 우드득 팔을 풀었다. 내내 역광 때문에 보이지 않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무튀튀한 갈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나이는 40대쯤 되었을까. 입가와 눈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는, 상당히 진한 인상의 남자였다.

“여기 있던 네 개의 관을 부순 게 자네인가?”

“……그렇습니다.”

“네나뷔스테가 아주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실신을 했어. 뒷수습을 못 하겠으면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네나뷔스테의 가족……분이십니까?”

“그렇게 보이나? 별로 안 닮았을 텐데.”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에르잔에게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남자의 목에서 칼날까지의 거리가 불과 반 뼘도 되지 않는데도 그는 태연했다.

이 마을 사람은 모두 저주에 걸려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나 거친 피부와는 달리, 남자의 눈은 혼탁하지 않고 맑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하면, 알기는 하나?”

“기억해 두겠습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성실한 답변에 중년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는 흉터 가득한 손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제 이름을 말했다.

“오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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