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48화 (48/189)

48화

“사비나, 괜찮아?”

“카밀라?”

사비나에게 안겨 든 카밀라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직 떠나지 않았구나…….”

가볍게 한숨을 내쉰 카밀라는 사비나의 양 뺨을 감싸 얼굴을 더듬다가, 그녀의 목에 길게 늘어선 붉은 상흔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에 그거…… 칼에 베인 자국이지? 아프겠다.”

“이제는 괜찮아요. 다 나았어요.”

사비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끌어 올려 목을 감추면서 카밀라로부터 한걸음 떨어졌다. 카밀라는 사비나를 붙잡으려다가, 손을 거두고는 민망한 듯이 손가락을 매만졌다.

“로스카옌 신부님이 방에 있다고 했는데, 네가 없길래 벌써 떠난 줄 알았어.”

“아, 그건…….”

밤새 에르잔과 숲속에서 몸을 섞었던 일을 떠올리자 양 뺨이 뜨거워져, 사비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를 짐작조차 못 하는 카밀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감아 비비 꼬면서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네가 네나뷔스테의 저주를 흡수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게다가 엄청 다쳤다고 하니까…… 미안해서, 붙잡을 수가 없겠더라고.”

“붙잡다뇨?”

“넌 우리 마을이랑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호의로 도와주는 건데, 너랑 에르잔이 저주를 풀려고 움직이는 동안 나는 쿨쿨 잠만 잤고, 나자예프는…… 뭐, 안 봐도 방해만 되었을 게 뻔하고.”

사실 나자예프야말로 다른 의미로 심각한 상처를 입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친 상태였으나,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카밀라는 사비나에게 못내 미안해했다.

“처음 도와줬을 때도 제대로 고맙단 말도 못 하고 도망쳤잖아. 미안해.”

“카밀라. 나는 괜찮아요.”

“우물에서 사라졌던 날도 걱정했는데, 다쳤다는 말까지 들으니까 이젠 다 끝이구나 싶더라고.”

카밀라는 아무래도 사비나가 어제 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마을에서 도망치려 한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새벽에 일어난 카밀라는 로스카옌으로부터 사비나가 네나뷔스테의 저주를 흡수하러 갔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목에서 피가 줄줄 흐를 만큼 깊은 상처였다기에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가, 자는 환자를 깨우면 더 안 좋을 것 같아 복도를 서성이다가, 결국 걱정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로스카옌의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카밀라가 빈 침대를 짚었을 때는 이미 시트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부상이 심했다고 그랬는데……. 에르잔이 데리고 달아났나?’

카이라트의 부탁으로 우물을 정화하러 들어갔을 때, 사비나를 위험에 처하게 할 뻔했다는 이유로 에르잔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던 것을 기억하는 카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비나가 상처를 입은 이상, 에르잔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사비나에게 더는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미안하다고, 자신을 괴롭히던 저주를 거두어 줘서 고마웠다는 말만이라도 건네고 싶었는데.

착잡한 심정으로 빈 침대를 쓰다듬다가 문을 열고 나오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어쩐지 기운이 빠져 잠시 벽에 기대 있는데, 복도 저편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비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카밀라는 깜짝 놀랐다.

에르잔은 사비나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급히 등을 돌려 휙 뛰어나갔다. 아마도 이 마을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그런 것이리라. 완전히 잘못 넘겨짚은 카밀라는, 사비나가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하기 위해 다급하게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다.

“네가 마을을 떠난다고 해도…… 도망친다고 해도 말릴 자격이 없는 거 알아. 원망할 자격도 없는 거 알고.”

“저기, 카밀라?”

“그래도 몸이 나을 때까지는 교회에 있으면 안 돼? 여기까지는 그래도 아무도 안 들어오거든. 몸조리만이라도 하고 나서 떠났으면 좋겠어.”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이 등을 두드리고 어깨를 쓰다듬는 카밀라의 표정에, 사비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카밀라. 나는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

“응?”

“어제 네나뷔스테의 증오의 핵을 흡수하면서 실수를 했거든요. 저주를 전부 거두어들였는지 확신이 없어서 에르잔이 돌아오면 확인하러 가려고 해요.”

“사비나, 너 미쳤어?”

도움을 받는 처지니 감사하기만 해도 모자란다는 걸 알면서도 대뜸 막말이 튀어나왔다. 카밀라는 합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고르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나뷔스테는 위험해.”

“알아요.”

“만에 하나 저주가 풀렸다고 해도 이쪽에 호의적으로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야. 걔는 원래부터 성격이 대단해서…….”

“그러니 확인하러 가야죠. 제가 시작한 일이잖아요.”

“……사비나.”

“마을의 네 어귀에 있는 「핵」을 전부 흡수할 때까지,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

담담하지만 단호한 사비나의 대답에, 카밀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허 벌렸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존재를 목도한 듯이.

“이게 그건가……? 희생정신? 인류애?”

“네?”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잖아. 왜 우리 마을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사비나는 자조했다.

그녀가 이 마을에 남아, 저주의 핵을 거두어들이고 시간이 멈춰 버린 마을에서 그들을 구하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

누군가를 저주해 죽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희열. 보람. 감격스러움으로 몸이 떨려와, 따스하게 충만해지는 느낌.

사비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는 건 카밀라를, 이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벌이는 일이다. 이기심으로 비롯된 행위에 감사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사과의 말을 들을 이유도 없다.

오히려 사비나는 미안해했다.

카밀라와 카이라트, 이 저주받은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그들의 평화를 깨뜨린 일에.

저주로 고통받는 이들을 구한다는 자기만족으로, 삶의 보람을 찾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의 삶이 의미 없지 않다는 증명을 원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용하고 있음에.

“카밀라도 겪어 봤으니 알잖아요.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

“나는 저주를 흡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얼마든지 저주를 흡수해도 죽지 않고…….”

저주를 거는 주술사라고만 해도 께름칙한 존재일 터인데, 죽음의 화신이란 것까지 알면 얼마나 혐오스러워할까. 분노하여 카이라트를 걷어찼던 것 이상으로 사비나를 떠밀며 쫓아내려 할지도 모른다.

제 정체를 전부 드러낼 수는 없다. 카밀라에게 욕을 듣거나 걷어차이는 일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들이 사비나를 꺼리며 저주를 거두어 가는 것을 거부할까 봐서다.

“그러네. 사비나가 보통 사람은 아니지. 보통은 그렇게 못하지.”

“네. 그러니 더는 제게 다가오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사비나.”

“네?”

카밀라는 저주를 흡수하는 존재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저주를 흡수하고도 멀쩡한 존재도 처음 보았다.

그래서 사비나가 무서웠다. 욕을 하며 도망쳤다.

하지만 다시 마주했을 때, 평범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를 건네는 사비나를 보고 카밀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비나. 나는 너처럼 대단한 희생정신도 없고 착하지도 않고 용감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은혜를 입었으면 그걸 갚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나한테는 양심이라는 게 있다고. 나자예프랑은 달리.”

카밀라는 특히 마지막 말에 힘주어 말했다. 자리에 없는 나자예프가 문득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카밀라. 내가 기분 나쁘지 않아요?”

“우리 사비나가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왜?”

우리 사비나?

사비나는 그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에게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다.

사비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서야 제가 닭살 돋는 소리를 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카밀라는 헤헤 웃으며 사비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비나. 당분간은 교회 안에서 쉬어. 로스카옌 신부님이 구워 주는 빵 맛있거든? 그거 같이 먹자.”

“카밀라, 잠깐만요. 이러지 마세요!”

시간이 멈춘 이 마을의 생존자는 모두 저주에 익숙해진 몸이다. 그러니 카밀라라면 이름을 불리거나 가볍게 접촉하는 정도로는 사비나로부터 저주가 옮겨 가지 않겠지만, 이렇게 팔짱을 끼거나 가까이서 치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겨우 카밀라를 괴롭히던 저주를 흡수했는데, 또다시 그녀에게 저주가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카밀라. 이, 이거 좀 놓으세…… 앗!”

사비나가 붙잡힌 팔을 빼내려 몸을 당기자, 카밀라가 붙잡고 있던 옷자락이 흘러내리면서 가녀린 어깨와 흰 앞가슴이 드러났다.

“헉!”

카밀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알몸을 본 것이 민망해서가 아니다.

사비나의 쇄골부터 가슴까지 붉은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목도한 카밀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사비나, 너…… 너, 그래서 옷을…….”

“앗,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너무 밀착하면 저주가 옮겨갈지도 모르니 경계한 것뿐인데, 카밀라는 사비나의 몸에 가득한 정사의 흔적을 보고는 어버버거리다가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는, 씩 웃었다.

“에르잔? 에르잔이지?”

“뭐, 뭐가요?”

서둘러 옷자락을 끌어 올려 키스마크를 가렸으나 이미 보인 것을 잊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비나는 카밀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옷깃을 부여잡은 채로 쩔쩔맸다. 귀 끝에서부터 서서히 붉어지다가 뺨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사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카밀라는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축하해, 사비나! 드디어 고백했구나?”

“네에?”

“이제 에르잔이랑 사귀는 거야? 행복해야 해!”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에르잔 말고 다른 남자는 아닐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설마 나자예프는 아닐 테고.”

“그, 그게 아니라……! 에르잔과……는 맞지만! 그, 카밀라가 오해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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