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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46화 (46/189)

46화

“흡……!”

처음은 조금 차가운 듯했던 입술이 벌어지며 혀가 들어오자 금세 숨이 달아올랐다. 발이 공중에 뜬 상태로는 피할 길이 없어, 사비나는 에르잔의 어깨에 손을 짚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조금 내려와 엉덩이를 받치더니, 다른 한쪽 손이 목덜미부터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에, 에르잔. 잠깐…….”

“저주를 흡수하신 후, 그 한때뿐이라도 아가씨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네?”

“그 역할만이라도, 제게 맡겨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질문은 뜨거운 입술에 삼켜져 버렸다.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매달린 채로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르잔은 그녀의 표정이 변해 가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했다.

호위기사로 불려 와 놓고,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저주를 흡수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르잔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나.

저주를 흡수하고 욕정이 일어난 사비나의 성욕을 해소해 주는 것뿐.

호위기사로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는 사실이 비참하지만, 반대로 이 일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맡겨 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역할조차 나자예프나,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다면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에르잔, 잠깐…… 뭔가 오해가…….”

“제가 아가씨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하지만 이 역할마저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꾹 눌러 삼키며, 에르잔은 사비나의 입술을 집어삼킬 듯이 키스하며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소매가 넓은 까닭에 옷을 벗기지 않아도 소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사비나의 맨살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생채기가 가득했던 피부는 어느새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평소의 몸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것이 어째서인지 더욱 애틋하고 아련해져, 에르잔은 사비나의 몸을 추슬러 안고는, 그녀의 옷자락을 이로 물어 끌어내렸다. 상처 하나 없는 흰 가슴이 튕기듯 율동했다.

“에, 에르잔!”

아무리 밤이라 사위가 어두워도 암흑은 아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드러난 탐스러운 젖가슴에 에르잔은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사비나의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이 마을에 온 이후로 줄곧, 사비나는 저주를 흡수하면 에르잔과 몸을 섞어 왔다. 주술의 반동이 주는 고통을 버텨 내기 위해, 몸이 끊임없이 쾌락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저주를 흡수하면 이성마저 날아가고, 적당량의 저주를 흡수할 때는 이성을 유지한 채 욕구만 이는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비나는 지금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 몸이 쾌락을 요구하지 않았다.

네나뷔스테로부터 증오의 핵을 흡수했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고통에 휩싸여 벌써 이성을 잃고 에르잔에게 매달려야 하는데, 기이할 정도로 제 몸은 멀쩡했다.

‘그러고 보니, 아페티트를 만났을 때…….’

카이라트의 부탁으로 우물의 저주를 빨아들였던 날, 사비나는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 막연하게 아페티트를 만나 저주를 빼앗긴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 외에는 특별히 몸에 이상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쩌면 저주에 잠식되어 무거웠던 몸이 갑자기 가벼워진 것과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된 것 사이에도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성욕에 미친 상태도 아닌데 에르잔에게 봉사를 요구할 수는 없다. 사비나가 에르잔을 밀어내려 그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순간, 에르잔은 입을 크게 벌려 그녀의 가슴을 깨물었다.

“아!”

아프게 깨문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치아의 감촉이 닿았으나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에르잔의 애무가 이전과 달랐다. 전에는 사비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표정을 살펴 가며 혹여 상처라도 입힐까 조심스럽게 피부를 핥았는데, 지금은 감촉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이 이로 깨물고, 유두에 유륜까지 삼켜 버릴 기세로 입술로 감싸 빨아들이고 있다.

“에르, 잔. 잠깐만요……!”

사비나는 당황하여 에르잔을 말리려 했지만, 에르잔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했다. 사비나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면 곧 움직임을 멈추던 그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사비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에르잔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옷자락을 더 끌어 내려 가슴 밑을 핥고 빨기 시작했다.

“아, 읏!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려 왔다.

그 음성에 흠칫 놀란 사비나가 에르잔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내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에르잔이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 속에 흐르는 밤하늘이 비쳤다. 별들이 궤도를 따라 도는 모양이 흡사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 은하수라고 부른다고 하던가.

하지만 에르잔의 눈에 비치는 별빛은 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깊은 물에 빠져,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반짝이는 별빛이 사실은 에르잔의 눈물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제가, 필요 없어지셨습니까……?”

“네, 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필요며,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것일까. 사비나는 물어볼 수 없었다. 에르잔의 간절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가슴 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푸른 물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주술도 무엇도 아닌 그 찰랑이는 물결은 시원하기도 했고 또한 갑갑하기도 했다.

사비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채로 에르잔의 뒷머리부터 목덜미까지 쓸어내렸다. 밤이슬에 젖은 것일까. 아니면 로스카옌 사제가 부었다는 성수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일까.

에르잔의 머리카락 끝은 촉촉했고 목덜미는 서늘했다. 태양처럼 따스하게 빛나던 금발은 달빛 아래서 얼음처럼 시린 빛을 냈다.

곧고 단정하던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끔 수줍어하고 당황하는 표정을 보일지언정, 이런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절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에르잔…….”

이름을 부르자 그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이, 애원하는 듯이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사비나는 읽어 낼 수 없었다.

사비나가 의식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병에 걸린다. 늘 그렇게만 생각해 왔던 사비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이름’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니 에르잔이 그녀에게 이름을 불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에르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처음에는 저주가 깃들까 두려워 닿는 것을 피하고, 그다음에는 이성이 날아가 어떤 감각이었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고 부끄러워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에르잔의 몸이 크고 단단하고, 그의 품 안이 뜨겁고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뿐, 그와 몸을 겹칠 때는 사비나도 저주의 반동으로 쾌락을 추구하는데 열중한 상태였기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주의 반동은 없었다. 육체가 쾌락을 탐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에르잔이 그녀를 위해 억지로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안기고 싶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이름을 부르고, 몸을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제가 필요하다는 말씀, 진심이십니까?”

사비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쾌락을 원해서가 아니다.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녀를 위해 억지로 밤시중까지 들어야 했던 에르잔에게 이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비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요.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서둘러 삼켜 버리자 꽉 목이 메어 왔다. 사비나는 윽, 작게 신음하며 에르잔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나, 나를 만져 주세요…….”

이기적인 본심을 애달픈 목소리로 포장하는 것만큼 가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비나는 참을 수도 없었다. 정확히는, 참고 싶지 않았다.

에르잔과 몸을 맞대고 싶다. 이 남자의 단단한 팔에 안겨, 넓은 품에 안겨, 푸른 눈을 마주하며 입을 맞추고 싶었다.

“사비나 아가씨, 춥지 않으십니까?”

사비나가 고개를 가로젓자, 에르잔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겨 버렸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나체는 녹아 버릴 듯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한 팔로 사비나의 몸을 추슬러 안은 에르잔은 제 옷마저 벗어 버렸다.

이곳이 밖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어차피 이 마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파고들 틈마저 주지 않겠다는 듯이 두 남녀의 몸이 겹쳐졌다. 한 팔로는 그녀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지지하고, 다른 한 팔로는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입으로는 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커다란 혀로 훑어내렸다.

“하읏, 에르잔……!”

바닥에 발도 닿지 않는 불안정한 자세로 에르잔에게 매달려 있는데도, 사비나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까닭에 제가 매달려 있는 커다란 남자의 단단한 육체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에르잔의 몸이…… 이랬구나.’

사비나는 어깨에 얹고만 있던 손을 움직여 목덜미와 턱선을 더듬었다. 남자다운 목은 두껍고 단단했으나 목울대가 넘어갈 때마다 울컥 하고 힘줄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반듯한 이마에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콧날. 섬세한 속눈썹.

가까이서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을 때와는 달랐다. 사비나가 에르잔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숨을 불어넣자,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낮게 목을 울렸다. 후우. 가볍게 내쉰 한숨이 델 듯이 뜨거웠다. 그 열기에 사비나의 몸도 후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에르잔, 계속해요. 멈추지 말고…….”

“아가씨…….”

쾌락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비나는 알고 싶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에르잔이 어떤 남자인지.

이 남자의 체온은, 맥박은, 땀이 배어나는 피부가 맞닿아 미끄러지는 느낌은 어떤지, 단단한 근육이 섬세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몸을 감싸 올 때 느껴지는 압박감은 어떠할지.

모든 것이 궁금했다.

“에르잔, 읍…….”

입술이 맞닿는 순간, 사비나는 반사적으로 에르잔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가 힘을 풀었다.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의 입안으로 침범한 커다란 혀는, 의외로 부드럽게 움직이며 그녀의 입천장과 고른 치열을 훑고는 작은 혀를 톡톡 두드렸다.

사비나가 혀를 살짝 들어 올리자 맞닿았던 입술이 아주 조금, 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것을 데우듯 에르잔은 후우, 뜨거운 숨을 내쉬며 다시 혀를 섞었다.

두껍고 커다란 혀가 그녀의 붉은 혀 아래로 슬쩍 머리를 들이밀어, 고인 타액을 핥아내고는 ?, 소리와 함께 삼켜 버렸다.

사비나는 으응,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손을 내려 그의 몸을 더듬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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