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45화 (45/189)

45화

빈 복도 끝에는 등불 대신 양초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맞은편의 문이 카밀라가 쉬고 있는 기도실이리라.

사비나는 몸을 돌려 반대편의 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미사실의 불은 분명 켜져 있는데, 로스카옌 사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외출한 걸까? 아니면 피곤해서 다른 곳에서 주무시는 걸까.’

로스카옌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가 전부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사비나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그녀 자신에 대해, 콘바야젠 가문에 대해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지도 아직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비나가 정체를 드러낸다고 해서 로스카옌이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거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사실을 알면, 도리어 경계하며 더욱 진실을 감추려 들 가능성도 있었다.

‘말을 해도 고민이고, 하지 않아도 고민이네…… 어쩐담.’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일단은 좀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사비나는 미사실을 나와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밤은 아득하고 고요했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사비나가 풀을 밟는 소리만이 사박사박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불빛은 없었다.

서쪽에 사는 것은 카밀라와 카이라트 뿐이라고 들었다.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집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불빛은 없었다.

‘카이라트는 어쩌고 있을까? 카밀라에게 얻어맞고 아픈 것 같았는데…….’

설마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저주로 인한 상처가 아니라 맞아서 아픈 상처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평소 로스카옌 사제와 교류가 있는 것 같았으니, 어쩌면 로스카옌이 돌봐 주지 않을까.

카이라트의 상태가 궁금했지만 이 어둠 속을 헤치고 그를 찾아가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던 사비나는 걸음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한층 더 검은 숲이 보였다. 이 숲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일까.

네나뷔스테의 칼을 피해 이 숲으로 뛰어들었다가, 아페티트가 있는 창고까지 가 버렸던 것이 기억이 나, 사비나는 교회 뒤편으로 흘긋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아페티트가 머무는 창고까지 닿지도 못하고 도중에 나타난 한 인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에르잔……?”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이는 커다란 윤곽은 에르잔의 것이었다.

그는 사비나와 마주친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어두워서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째서인지 사비나는 에르잔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르잔. 괜찮아요?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는 아니다.

그런데도 대답은 없었다.

에르잔이 사비나의 말을 무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에르잔?”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에르잔이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치 그녀로부터 피하듯이.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거리를 벌리려는 듯한 움직임에 사비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에르잔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의 저주를 빨아들이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작은 관에 갇혀 있는 어린아이나 괴물이 되어 버린 어린아이, 사비나를 공격했다고는 한들 민간인인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을 정화의 불꽃으로 태워 버릴 뻔했으니 그의 기사로서의 명예에 흠이 갔을지도 모른다.

‘기사는 명예를 위해 산다고 들었는데…… 이런 일에 에르잔을 끌어들이다니, 내가 너무 경솔했어.’

아무리 호위기사라 하더라도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는 안 되었다. 어떤 명분을 들이대서라도 에르잔은 교회에 남아 있도록 해야 했었다.

하지만 에르잔이 아니었으면, 사비나와 나자예프 둘만으로는 네나뷔스테를 제압하고 네 개의 관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비나는 에르잔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주군의 명을 따르는 것이 기사의 본분이라지만,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에르잔의 고결한 기사도에 흠결을 낸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사비나는 그 자리에서 꾸벅, 고개를 숙여 에르잔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에르잔.”

“…….”

“당신은 내 호위기사인데, 이런 불명예스러운 일에 끌어들여서…….”

“제가 호위기사입니까?”

민간인을 상처 입히고, 기사의 검에 주군의 목이 잘릴 뻔한 끔찍한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는데, 에르잔은 전혀 다른 질문을 해 왔다.

“제가, 정말로 사비나 아가씨의 호위기사가 맞습니까?”

“에르잔.”

“호위기사란 주군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 임무입니다.”

멀리서 대답하는데도, 에르잔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늘 들어왔던 음성이 아니었다.

에르잔의 목소리는 중저음이라도 무겁지 않고 부드러웠다. 저울에 무거운 추를 올려놓아도, 한 번에 아래로 푹 꺼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쪽의 가벼운 물체가 놀라지 않을 만큼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또한 따스했다.

그런데 지금 에르잔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다. 마치 감정을 억지로 배제한 것처럼, 딱딱하고 경직된 어조였다. 뭔가를 꾹 눌러 참는 듯이, 억눌린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켜야 할 분으로부터, 「쫓아내라」는 말을 듣는 호위기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단단한 것은 쉬이 부러진다고 누가 말했던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처럼, 에르잔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나자예프에게 말씀하셨지요. 저를 쫓아내라고.”

“에르잔. 미안해요. 당신이 저주의 대상과 접촉하면 위험하니까, 다급해져서…….”

“저는 사비나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로군요.”

“아니에요, 에르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네나뷔스테의 주의를 끄는 사이에 네 개의 관을 부수는 것은 에르잔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바로 멀어졌다면 좋았을 것을, 사비나가 네나뷔스테를 제대로 붙들고 있지 못했던 까닭에 에르잔이 중간에 끼어들어야만 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는 걸 알아요. 오늘 사고는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니까, 책임은 나에게 있죠.”

사비나와 나자예프가 합을 맞춰 네나뷔스테를 제압하고, 증오의 저주에 잠식된 그녀의 동생을 정화했다면 에르잔이 민간인을 상처 입힐 일도, 제 무기 때문에 사비나가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계획을 짠 것은 사비나다.

그녀의 계획이 미흡하여 중간에 일이 틀어졌고, 에르잔은 당초의 임무 외에 다른 역할까지 맡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기사도에 흠결을 남기는, 아주 불명예스러운 역할을 강제로 하도록 만든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미안해요. 당신에게 누가 될 거라는 걸 아는데…….”

“제가 도움이 된다고 하셨던 말씀은, 거짓이었습니까?”

“에르잔, 아니에요!”

에르잔은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도움이 되었다.

오히려 자신이 부족한 탓에 에르잔에게 불명예스러운 일마저 시키지 않았나.

사비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에르잔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에르잔이 물러나지 않았다.

사위가 어두워도, 서로 한 걸음가량을 남겨 놓을 만큼 가까워지자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에르잔의 표정이 어떤지 사비나는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그의 표정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분노한 것도 아니고,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사비나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감정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표정.

그의 목소리가 떨리던 순간과 똑같이, 단단한 바위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느낌이었다.

“에르잔. 당신은 제게 무척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건 정말이에요.”

“제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요?”

“그래요. 앞으로도 계속, 에르잔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에르잔은…… 그게, 내키지 않겠지만…….”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할 때는 또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

괴물처럼 강인한 바르셀다를 제압하려면 에르잔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또 에르잔의 기사로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사비나는 그것이 못내 미안하면서도, 그렇다고 에르잔의 도움 없이 해 보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마을을 둘러싼 네 개의 핵.

자칫 실수하면 저주의 핵인 네 사람뿐 아니라 마을의 생존자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에르잔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잔의 도움이 없으면 해낼 자신이 없었다.

“제가 내켜 하지 않는다고요?”

“알아요. 에르잔은 내 호위기사로서 명예로운 일을 하고 싶겠죠. 하지만 나는…… 나는, 당신에게 이런 일밖에 부탁할 수가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주를 흡수하는 과정에도 또다시 민간인이, 여자와 어린아이가, 노인이 다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기사인 에르잔에게는 차라리 주군을 배신하고 싶을 만큼 모욕적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비나에게는 에르잔이 필요했다.

그의 희생이 절실했다.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에, 기사에게 목숨과도 같은 명예를 버리라 말하는 것은 대체 어떤 모순일까.

“미안해요, 에르잔. 정말 미안해요.”

“사비나 아가씨…….”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어요. 에르잔…… 제발 나를 도와줘요.”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저주를 풀기 위해, 마을의 모두를 살리기 위해, 에르잔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이런 명령을 내리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책임지고 사비나의 마지막을 에르잔에게 맡길 것이다.

만약 정화의 불꽃이 사비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에 타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 채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에르잔을 끌어들인 일에 대한 죗값이라 여기고 감내할 것이다.

사비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알겠습니다.”

성큼, 에르잔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딱 한 걸음만을 남기고 선 거리였기에 에르잔이 다가오자 사비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뺐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그녀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제가 사비나 아가씨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이런 일뿐이라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네……?”

“부탁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과하실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라도, 제가 도움이 된다면.”

에르잔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사비나의 몸을 안아 들었다.

분명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눈높이가 훌쩍 높아진 탓인지 에르잔의 새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푸른 눈동자에 잠긴 밤하늘이 훅,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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