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44화 (44/189)

44화

11. 자신을 다잡을 수 없다면

목이 간질간질했다.

따끔거리기도 하고, 살짝 갈증이 일기도 했다.

사비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다.

낯선 천장이 보였으나 정갈한 방의 모습과 미약한 물 냄새에 사비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로스카옌, 신부님……?”

“일어나자마자 찾는 게 그 할아버지야? 사비나는 정말 취향이 독특하네.”

나자에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려다, 목에 통증이 와 사비나는 윽, 작게 신음하고는 눈알만을 굴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서 있는 것도 피곤했는지, 나자예프가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사비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네나뷔스테는, 어떻게 됐어요……?”

“글쎄. 바닥을 구르다가 기절하는 것까지는 봤는데. 그 이후는 나도 모르겠어. 에르잔이 제정신이 아니라 널 무사히 교회로 데려올 수 있을까 불안했거든.”

저주로 인한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

사비나는 죽음의 저주에 짓눌려 괴로워하면서도 의식을 잃지는 못했다.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몸의 방어기제다.

미쳐 버릴 듯한 고통을 온전히 느껴야만 하는 상태를 벗어났다는 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저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겠지.

사비나는 제 가슴 속에서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이것이 증오의 핵일까.’

완전히 흡수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네나뷔스테에게 약간 남아 있어 한 번 더 저주를 흡수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저주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든 것을 보면 적어도 네나뷔스테를 괴롭히던 대부분의 저주는 사비나의 몸속으로 흘러든 상태이리라.

“에르잔은요……?”

“정신이 완전히 나간 모양인지, 로스카옌이 무슨 소리를 해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더라고. 성수를 병째로 얼굴에 뿌렸는데도 도무지 낫지를 않아서, 내가 억지로 끌어냈어. 얼마나 무거운지, 아직도 어깨랑 허리가 쑤실 정도야.”

“다, 다치지는 않았어요?”

“……저기, 사비나? 여기서 지금 제일 많이 다친 사람은 너야.”

나자예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늘 능글맞게 웃거나, 의뭉을 떨며 성희롱이나 일삼던 난봉꾼답지 않게, 나자예프의 표정은 조금 침울해 보였다.

‘도와준다고 해 놓고 제대로 활약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걸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사비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나자예프는, 괜찮아요?”

“안 괜찮아.”

“어디 다쳤어요?”

“말하기 싫…… 아냐, 안 다쳤어. 나 멀쩡해.”

네나뷔스테가 있는 힘껏 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바람에 한참을 애벌레처럼 엎어져 있었지만, 그것은 나자예프에게 떠올리기조차 치욕스러운 과거였다.

제 동생을 저주의 제물로 삼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불한당에 난봉꾼에 성희롱만 일삼는 인간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어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는데.

만약 네나뷔스테에게 당했던 일을 누군가 거론한다면 죽기 살기로 그놈의 입을 틀어막을 것이다.

“……한심하네.”

“뭐가요?”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건 다른 일인데, 이딴 흑역사밖에 떠올리지 못하다니 난 진짜 쓰레기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나자예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조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비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 이상 그 화제를 올리고 싶지 않다는 나자예프의 심정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그와 오래 말을 섞어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스카옌 신부님은 어디 계세요?”

“널 치료하고, 카밀라가 잘 자는지 좀 보다가, 지금은 미사실에 있어.”

기도실을 카밀라가, 로스카옌의 방을 사비나가 차지하고 있으니 로스카옌은 잘 곳이 없다.

아마도 밤새 미사실에서 두 사람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릴 것이다.

“로스카옌 신부님께 너무 폐를 끼쳤어요. 저는 제 오두막으로 가도 되는데…….”

“내버려 둬. 할배라도 아직 쌩쌩한 50대니까.”

“네……?”

“52살? 53살?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로스카옌이 처음 저주의 핵을 관리하기 시작했을 때가 30대 후반이었으니까 15년을 더하면 아마 그 정도일 거야. 겉보기엔 6, 70살쯤 되어 보이지만.”

그러고 보니 네나뷔스테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로스카옌만이 나이를 두 배로 먹고 있다고.

카밀라는 사비나와 에르잔을 가리켜, 두 사람은 외부인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물면 자신들과는 달리 나이를 먹을 거라고 말했다.

30대 후반부터 이 마을에서 저주의 핵을 관리해 온 로스카옌 사제는 외부인이다.

15년이 흘렀으니 원래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지금은 50대 초중반쯤 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로스카옌의 주름진 얼굴과 풍성한 흰 수염은 중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60후반 내지는 70세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까.

‘왜……? 왜 로스카옌 신부님만 두 배로 나이를 먹는 거지?’

외지인이라서 나이를 먹는다면 15년을 더해야 할 터인데, 왜 혼자서 30년은 더 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사비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리에 없는 로스카옌을 불러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네나뷔스테가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면, 아마 다른 이들도 물어보았을 텐데.

카밀라도 「로스카옌 신부님은 외부인이니까」라고 답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어째서 그 혼자서만 나이를 두 배로 먹고 있는지는 모른다는 뜻이다.

“남 걱정할 시간에 네 몸이나 걱정해, 사비나.”

“저는…… 아무리 저주를 흡수해도, 죽지 않아요. 상처도 금방 낫는 편이고.”

아무리 자해를 해도 하룻밤이면 싹 나아 버렸다. 목을 조금 베이긴 했지만 깊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바닥을 구르며 난 생채기나 네나뷔스테에게 긁히고 물린 상처쯤이야 벌써 아물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말해 봐야 무리겠네. 알았어. 그럼 로스카옌한테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 둘게.”

나자예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동작에 어색함이 없는 것을 보면 다친 곳이 없다는 말은, 아니, 완전히 나았다는 말은 정말인 모양이다.

사비나는 조금 의아한 듯이 눈을 깜박였다.

“나자예프. 내 상태를 보려고 여기 있었던 거예요?”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보는 얼굴이 할배 얼굴인 것보단 젊고 잘생긴 내 얼굴인 편이 좋지 않아?”

“…….”

“역시 할아버지 취향인가? 사비나는.”

“……그게 아니고…….”

깨어났을 때 나자예프가 방에 있어서, 솔직히 놀랐다.

물론 이곳은 교회이고, 밖에는 로스카옌 사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와 단둘이 방에 있는 상황에 처하리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으니까.

게다가 사비나의 상태를 묻고, 대답을 주고받고는 이렇게 깔끔하게 물러갈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 못 했다.

“미안해요, 나자예프.”

“뭐가?”

“내가, 당신을 오해했던 것 같아서…….”

“……사비나. 너 혹시…….”

나자예프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황당하다는 듯이 입이 쩍 벌어졌다.

“내가 너한테 엄한 짓이라도 할 줄 알았어?”

“…….”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하고, 사비나는 시선을 돌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압박하며 이상한 농담이나 건네던 난봉꾼이 아닌가. 사비나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는 걸 알면 강간이라도 할 줄 알았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사비나가 함구하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나자예프는 뭔가에 분노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가, 진심으로 허탈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반했다고 했잖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야?”

“네?”

“……젠장. 꼴사나운 모습 보였다고 걱정할 때가 아니었잖아? 내 이미지는 완전 최악이네…….”

이제 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면서, 나자예프는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등을 돌렸다.

“알았어. 대역죄인은 이만 나가 볼게. 필요하면 머리맡에 종을 울리면 돼. 로스카옌이 올 거야.”

“나자예프.”

“아, 막막하네…… 에르잔 녀석이나 걱정할 때가 아니었잖아…….”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나자예프는 방을 나섰다.

사비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알 수 없다는 듯이 눈만 깜박거렸다.

‘내가 기절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물어볼 사람은 없다. 사비나는 다시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카밀라는 자고 있을 테고, 로스카옌 사제는 기도 중일까. 나자예프는 어디 먼 곳으로 가 버린 모양이다.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체력 회복을 위한 휴식은 충분하다고 몸이 판단한 것일까. 상처는 거의 다 나은 듯했다. 움직이기 버거울 정도로 몸이 무겁다는 점만 제외하면 문제는 없었다.

‘이상해. 왜 이렇게 무겁고…… 간지럽지?’

저주에 짓눌릴 때의 무거운 감각은 익숙하다.

그러나 사비나의 몸 곳곳에 깃든 증오의 저주는 그녀 안의 저주에 물들지도, 섞이지도 않았다.

마치 아주 작은 알갱이가 혈관을 타고 몸속 곳곳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소름 끼쳐 할 그 감각을, 사비나는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간지러운 부위를 긁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무거워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읏…….”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고 싶다, 고 욕망한 순간, 간지러운 감각이 멈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멈추었다가 아주 강렬하게 진동했다. 마치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는 짐승처럼 어지럽게 배회하던 찌릿한 감각이 어느 한순간 불꽃처럼 사그라들었다.

뼛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씹어 삼킨 것처럼, 제 안을 간지럽히던 저주의 감각은 그렇게 사라졌다.

‘뭐지?’

사비나는 흠칫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팔이 들렸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꼭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 움직이는 것이 힘겨웠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마치 각성제라도 먹은 것처럼, 반대로 온몸의 신경세포가 활성화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까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는데도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분명 간지러운 감각이 멈추었음에도 사비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넘어져 구르며 생겼던 생채기, 네나뷔스테가 할퀴고 깨물었던 자국은 모두 사라졌다. 사비나는 제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피는 멎었지만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있었다. 매끈해야 할 목에 가느다란 상흔이 남았다.

에르잔의 검에 베인 상처였다.

‘깊게 베인 건 아니었는데…… 낫는 데 좀 더 걸리려나?’

온갖 방법으로 자해와 자살 시도를 해 본 사비나였지만 목을 잘라 본 경험은 없었다.

목에 칼을 찔러 넣어도 의식만 잃을 뿐, 그것을 발견한 아버지가 하인을 시켜 칼을 뽑아내면 하루도 안 걸려 아물고는 했으니까.

그런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목이 잘리더라도 죽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사비나는 절단만은 시도하지 않았다.

만약 목이 잘린 채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채로, 그러고도 계속 살아 있다면 그거야말로 지옥 속에 스스로를 처박아 버리는 방법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만약 목을 자르는 것으로 진짜 죽을 수 있다면…… 이제까지 죽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온 시간이 하찮을 만큼 편하겠는걸.’

사비나는 제 목의 상흔을 손끝으로 문지르고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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