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43화 (43/189)

43화

아이가 일부러 감춘 것인지, 관에 가두면서 네나뷔스테가 떨어뜨린 것인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머리핀에 저주의 주술이 깃들어, 아이를 제물로 만들었다는 것뿐.

사비나는 얼른 자신이 저주를 빨아들이던 아이의 모습을 살폈다.

가시가 전부 뽑혀 나간 아이는 정신을 잃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처음 관에서 발견한 아이와 비슷한 체격이었다.

“흐윽. 언니…… 언니…….”

관이 부서졌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가 훌쩍이며 네나뷔스테를 불렀다. 저 아이에게 붙어 있는 저주의 농도는 그리 진하지 않다. 사비나는 가시에 긁혀 상처투성이인 몸을 천으로 대충 가리며 소녀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 내가 네 언니를 구해 줄게.”

카림은 사비나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구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연못의 저주를 빨아들였을 뿐, 이미 죽어 버린 카림의 어머니는 살려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카림은 사비나에게 「구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사비나라고 해서 모든 저주를 다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마을의 시간은 멈추어 있고, 나자예프가 바르셀다를 「제물」로 두고 있는 한, 바르셀다의 저주를 먼저 흡수할 수도 없다.

죽음의 화신이자 불사의 몸을 가졌음에도 사비나가 할 수 없는 일은 있었다.

아니, 많았다.

이것이 과연 네나뷔스테를 「구하는 일」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럴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히, 죄를 지은 인간이라면 더욱더.

누군가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떨쳐 내고 싶을 테니까.

“네나뷔스테!”

“아으윽! 아악!”

허공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하는 네나뷔스테의 허리를 끌어안고, 사비나는 그녀의 몸에 가득한 증오의 저주를 빨아들였다.

카림이나 카밀라의 저주를 흡수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증오의 괴물로부터 죽음의 업보를 빨아들이는 것 또한, 가시가 피부를 찌르는 것이 아플 뿐 괴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의 「핵」이기 때문일까, 사비나는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제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구잡이로 피부를 할퀴는 네나뷔스테의 손톱이 느껴졌다. 그것을 저주로 괴로워하는 이의 몸부림이라 여긴 사비나는 더욱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다리를 속박하자 네나뷔스테가 넘어지며 사비나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비명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아아아악!”

마치 피부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혹은 피부를 갈라 핏줄을 뽑아 가는 것 같다고 할까. 네나뷔스테는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그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시간이 멈춘 마을.

죽어 가는 사람들.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울면서 만들었던 관.

남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우도로 위협하여 쫓아냈던 일…….

모든 기억이 유리 조각처럼 부스러지며 네나뷔스테의 온몸을 찔러 왔다.

“저리 가! 가아아아아!”

네나뷔스테가 떨쳐 버리려 하는 것은 사비나일까, 아니면 저를 감싼 저주일까. 그것도 아니면 저주에 잠식된 후 일어난 일들일까.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양팔에서 흐르는 피 때문이 아니었다. 네나뷔스테의 절규에 나자예프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주에 잠식된 인간의 모습은, 한결같이 처참하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목 뒤가 서늘한데 목구멍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바르셀다를 제물로 삼고 있던 자신에게 저주가 되돌아오면 자신도 저런 모습이 될까.

네나뷔스테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체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자예프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에 제 모습을 겹쳐 보고는 에르잔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에르잔을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늪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무언가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늘어지는 모습에 가까웠다.

나자예프는 네나뷔스테로부터 저주를 빨아들이는 사비나의 모습을 숨조차 쉬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피처럼 검붉은 그것은 네나뷔스테의 몸에서 흘러나올 때는 액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가, 기화하여 사비나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비나는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고, 얼마만큼의 저주를 흡수하더라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진짜일까. 저주의 핵을 그녀의 몸으로 옮기는 일이 정말로 가능할까.

네나뷔스테와 사비나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음에도, 나자예프는 사비나를 돕기는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아윽! 윽……!”

사비나를 매단 채로 바닥을 질질 기어가던 네나뷔스테의 눈에 녹슨 쇠사슬이 감긴 은색의 칼날이 비쳤다. 에르잔의 검이다.

“다, 다 저리 꺼져! 죽어! 죽으란 말이야!”

“네나뷔스테! 제발 진정…… 아악!”

네나뷔스테는 몸을 굴려, 사비나의 머리를 장검 쪽으로 밀어냈다. 아무리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처지라도 힘도 체격도 네나뷔스테 쪽이 우위였다. 힘없이 밀려난 사비나의 가느다란 목을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사비나 아가씨!!”

아녀자에 이어 어린아이에게까지 상처를 입히고, 제 주군으로부터 저를 쫓아내라는 말까지 듣고 넋이 나가 있던 에르잔의 의식이 한순간에 되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온 에르잔은 말리는 일은 나자예프에게 무리였다. 에르잔은 나자예프를 한 손으로 밀어내고 엉켜 있는 두 여자에게로 뛰어왔다. 칼날에 사비나의 목을 들이대는 네나뷔스테를 끌어내고,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사비나를 안아 들었다.

사비나의 가느다란 목이 피로 흥건했다. 같은 상처를 입어도 목은 다른 부위보다 피가 많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붉은 선혈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빙 두르고 있는 모습이 흡사 목이 잘린 것처럼 보여 에르잔은 오싹해졌다.

“사비나 아가씨, 아가씨!”

“에르잔, 비켜요……! 저주, 를…….”

사비나는 에르잔을 밀어내려다 울컥 검은 피를 토했다. 검은 저주는 바닥에 닿자 치이익, 검은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나자예프의 청록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붉게 빛났다.

증오의 저주가 옮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나뷔스테도, 그녀의 동생도, 사비나도 죽지 않았다.

증오의 핵을 완전히 흡수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러나 상당한 양의 증오가 옮겨갔음에도 저주의 균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마을의 시간은 여전히 멈추어 있다.

그리고 자신도 살아 있다. 여전히.

그제야 나자예프는 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마주할 때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 희생양을 남겨 두고 죄책감을 안은 채 도망치던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강력한 불길.

휘두르면 무기가 되고, 받아치면 방패가 되는 그것의 이름은 바로 희망이었다.

‘사비나가…….’

처음은 그저 미인이라서, 첫사랑인 올가를 닮은 외부인이라 관심을 보였을 뿐인데. 시간이 멈춘, 유령마을과도 같은 곳에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사람이 그리워서 그녀에게 이끌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자예프의 몸은, 머리보다도 빨리 더 자신의 구원자를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내내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던 나자예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는 울상이 된 얼굴로 처절하게 사비나의 이름만 부르는 에르잔의 등을 후려쳤다.

“사비나 아가씨……!”

“아, 거 참! 정화를 안 할 거면 치료라도 빨리해! 뭘 하는 거야!”

정신이 멀쩡한 상태라면 이길 수 없어도, 피를 흘리며 기절한 사비나의 모습에 넋이 나간 에르잔을 떠미는 것쯤은 나자예프에게도 가능했다. 얼굴만 보면 여기서 제일 치명상을 입은 듯한 에르잔의 등을 교회 쪽으로 떠밀며 나자예프는 호통을 쳤다.

“빨리! 사비나를 보호하는 게 네 임무라며!”

임무.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자동적으로 반응한 기사의 팔이 품 안의 주군을 단단히 부둥켜안았다. 사비나의 몸이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따뜻한 체온과 짙어진 피 냄새. 가쁜 숨소리. 불규칙하게 뛰는 맥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윙윙 울리며, 주위의 모든 것이 빛을 잃고 흐려졌다.

‘사비나 아가씨를, 아가씨를 빨리 안전한 곳으로……!’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데 저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뒤에서 소리치는 나자예프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빨리.

어서 빨리.

사비나를, 제 주군을 로스카옌 사제에게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에르잔……!”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교회 문을 열고 나온 로스카옌 사제의 시선은 넋이 나간 얼굴로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기사로부터, 그가 안고 있는 가녀린 여인에게로 옮겨 갔다.

사비나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목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모습이 끔찍할 정도였다. 좀처럼 안색이 변하지 않는 로스카옌 사제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에르잔, 아가씨를 어서 안으로 옮기게!”

“…….”

“에르잔!”

“이봐, 에르잔! 로스카옌 말을 들어!”

앞에서는 로스카옌이 잡아끌고, 뒤에서는 나자예프가 떠미는 형태로 에르잔은 주춤거리며 사비나를 로스카옌의 방으로 옮겼다.

침대에 그녀를 눕히자, 로스카옌은 지혈을 해야 한다며 에르잔과 나자예프를 밖으로 내쫓았다.

“저는 사비나 아가씨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치료가 우선이니 좀 나가 있게!”

“제가 사비나 아가씨의 호위기사입니다!”

“호위기사가 제 주군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돌아와?”

답지 않게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로스카옌 사제는 치료를 위해 가져온 성수를 에르잔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나자예프는 자신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녀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로스카옌이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로스카옌의 성난 얼굴을 보았다가, 에르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에르잔은 흠칫 어깨를 떨더니,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제가 사비나 아가씨를…….”

“나자예프. 에르잔 좀 끌고 나가게.”

“어휴, 나는 왜 늘 이런 역할인 거야. 뭐 떨어지는 것도 없는데…….”

나자예프는 투덜거리며, 힘이 빠진 에르잔을 질질 끌며 방을 나섰다.

“아오, 더럽게 무겁네!”

기사인 에르잔은 나자예프보다 키만 큰 게 아니라 체격도 더 좋다. 게다가 네나뷔스테와 몸싸움을 벌이느라 이런저런 타격을 받은 자신에 비하면, 에르잔이야말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지 않은가. 나자예프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에르잔, 네 발로 걸어! 나도 더는 못하겠다!”

나자예프는 무슨 무거운 짐짝을 밀어내듯 에르잔의 등을 온몸으로 들이받아 교회 밖으로 쫓아냈다.

“나도 아파서 쉴 거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나자예프는 그렇게만 말하고, 문을 닫았다.

에르잔은 멍하니 교회의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저 닫힌 문일 뿐인데, 마치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것이 제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위기사가, 주군을…….”

에르잔은 로스카옌이 했던 말을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문 너머는 보이지도 않건만, 에르잔은 마치 버림받은 개처럼 닫힌 문을 바라보며 사비나의 이름을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