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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42화 (42/189)

42화

저주와 일체화된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전부 없애버리는 에르잔의 정화술.

카밀라를 업고 교회를 찾아갔을 때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항상 발동하는 것은 아닌 듯하지만, 에르잔은 스스로 정화술의 발현 정도를 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에르잔에게 네나뷔스테를 비롯하여 저주의 대상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인데.

“에르잔, 네나뷔스테를 놓아주세요, 빨리!”

“읏……!”

바르셀다처럼 제 주군을 위협하던 괴물 같은 남자도 아니고,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는 해도 네나뷔스테는 민간인이다. 네나뷔스테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었던 에르잔은 얼른 손을 떼고 물러났다.

끄윽, 하고 신음하며 네나뷔스테가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양 소매는 불에 타 버린 것처럼 흩어졌고, 에르잔에게 잡힌 손목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수포가 올라와 진물이 터져 흘렀다.

“아윽! 아아아!”

저주에 잠식되어도, 이성을 잃었어도, 네나뷔스테는 인간이었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남쪽 구역을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의 핵을 품고 있을지언정 그녀도 보통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

양팔이 불에 타오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겪고 비명을 지르는 네나뷔스테의 모습에 에르잔은 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민간인에게는 결코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 기사의 철칙일 터인데. 지금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질렀나.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과는 달리, 에르잔의 푸른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날 공격할 때는 무슨 쓰레기 치우듯이 던져 버리더니만, 사람 차별하기야?”

얼어붙은 에르잔의 어깨를 퍽 후려치며 나자예프가 호통을 쳤다.

회복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느리다고 해야 할지. 물린 손등보다 걷어차인 부위가 더 아픈 것인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텨 선 나자예프가 마지막 「관」을 가리켰다.

“에르잔, 뭐 하는 거야? 마지막 하나, 빨리 부수라고!”

“……아, 알았다!”

기사도를 어기고 민간인을 상처 입혔다는 사실에 얼이 빠진 것도 잠시, 당초의 목적을 깨달은 에르잔은 마지막 네 번째 관을 부숴 버렸다.

아니, 부수려 했다.

그러나 에르잔이 네 번째 관의 벽을 부수려 내지른 주먹이 판자에 닿기도 전에, 관이 부풀어 오르듯 쪼개졌다.

“안 돼! 알……!”

네나뷔스테가 막냇동생의 이름을 외치기도 전에

네 번째 관이 산산조각이 나며 튀어나온 것은 온몸에 가시가 가득한 커다란 고슴도치였다.

아니, 고슴도치라기엔 몸이 너무 길다.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뱀이나 지네와도 같았다. 몸 전체에 가시를 두르고, 팔인지 다리인지 모를 하얀 관절만이 보였다.

기이한 괴물 같은 것을 처음 목도한 에르잔은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당혹스러워서였다.

‘저 관에는 아이들이 갇혀 있던 것이 아니었나?’

예상 밖의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에르잔과는 달리, 겨우 바르게 설 수 있게 된 나자예프는 작게 허어, 하는 감탄사를 내뱉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쩐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만. 저주를 피하고 있던 게 나 하나뿐만이 아니었네.”

“뭐라고?”

“분노의 저주는 뱀 모양이었는데, 증오의 저주는 고슴도치 모양인가? 아니, 지네라고 해야 하나? 저건.”

마지막 관에서 튀어나온 괴물 같은 무언가는, 어디가 얼굴인지도 모르게 온통 가시로 덮인 모양새였다.

몸통 너비는 갇혀 있던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지만 길이는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였다. 다리는 4개이니 아마도 한쪽이 머리, 다른 한쪽이 꼬리이리라.

“에르잔, 물러나요!”

“사비나 아가씨?”

난폭하게 「관」을 부수고 나온 것치고는, 증오의 괴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씨익. 씨익 하는 숨소리만 낼 뿐.

에르잔을 공격하려는 건 아닌 듯했다. 그의 손에 누이의 양팔이 불타오르는 것을 관 안에서도 감지한 걸까.

마치 서로를 탐색하듯, 증오의 괴물은 에르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네 다리로 천천히 옆으로 기어갔다.

에르잔은 난처해졌다. 정황상 「관」 안에 갇혀 있던 저것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네나뷔스테의 어린 동생이 저주를 받아 저런 모습이 되었다는 뜻인데.

자신이 저것을 잡으려 들면 또 주체할 수 없는 정화의 힘이 발현되어 황금빛으로 저것을 태워 버릴지도 모른다. 비록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저것이 어린아이라면 에르잔은 아이를 해칠 수 없었다.

“에르잔, 남쪽 구역을 벗어나요, 어서.”

“사비나 아가씨.”

“저 아이를 죽음에서 구해야 해요.”

끔찍하게 가시가 돋아난 모습은 단순히 저주로 인한 몸의 변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의 원념이 들러붙은 모습이었다. 저 아이는 관에 갇힌 채로 누이의 저주를 대신 받다가, 증오심을 쏟아 내기 위해 밖으로 나오려 했을 것이다.

관은 쇠사슬로 감겨 있고, 바깥은 누이가 지키고 있으니 아마도 방법은 땅굴을 파고 도망치는 것이었으리라.

‘마을의 남쪽에 살던 이들을 죽인 건 네나뷔스테가 아니라, 저 아이야.’

끔찍한 저주에 당해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사비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과 경계심, 자신보다 약한 것에는 잔악하지만 불안감을 느끼면 보호자를 찾으려는 본능.

누이를 증오하면서도, 누이를 사랑하고, 누이가 잘못되면 자신의 보호자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뛰쳐나온 것일 터.

“아, 알마즈……?”

네나뷔스테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화상에 짓무른 양팔에서 진물과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데, 그런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이 황망한 얼굴로 눈앞의 「동생」을 보고 있었다.

쉬이익.

증오의 괴물이 네나뷔스테를 향해 긴 가시를 흔들어 댔다. 아니, 그것은 지느러미처럼 보이기도 했고, 더듬이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혀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저것이 그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리라.

네나뷔스테는 주저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증오의 괴물도 흠칫거리며 천천히 주변만 맴돌 뿐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저주를 흡수하려면 지금뿐이야!’

사비나는 증오의 괴물과 네나뷔스테가 서로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이, 천천히 괴물의 뒤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언니, 무서워…….”

작게 콜록거리며, 부서진 관 안에서 소녀의 훌쩍거림이 들려왔다.

쉬이익!

방금까지만 해도 경계 태세였던 증오의 괴물이 위협하듯 빠른 속도로 혀를 날름거렸다.

“언니, 언니. 자니베크 오빠가, 알마즈를…….”

─키에엑!

소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꺼져 가는 촛불처럼 작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오의 괴물은 마치 소녀를 죽이려는 듯이 네 다리를 번쩍 들어 쿵! 울리더니 세 번째 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아아!”

“안 돼!”

사비나는 증오의 괴물이 소녀를 덮치지 못하도록, 그의 몸체에 딱 달라붙어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날카로운 가시가 피부에 박혀 왔으나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비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증오의 괴물의 몸에 박혀 있는 가시를 물어뜯고는 꿀꺽 삼켰다.

─키에에엑!

제일 먼저 빨려들어 오기 시작한 것은 증오의 괴물에 들러붙어 있던 「죽음」이었다.

남쪽에는 과연 몇 사람이 살아 있었을까.

이 가시 하나가 그들 하나의 생명이라면, 이 아이는 대체 몇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일까.

혹은 이 「죽음」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곤충까지도 포함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알마즈! 자니베크!”

네나뷔스테는 두 동생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며 달려왔다. 저 괴물이 알마즈든 자니베크든, 고슴도치든 지네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지금 저 여자가 들러붙음으로 인해 제 동생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선이었다.

“내 동생을 놔줘!”

“아윽!”

네나뷔스테가 사비나의 머리채를 잡고는 그녀의 얼굴을 할퀴었다. 사비나는 양팔로 증오의 괴물을 꽉 끌어안은 채로 놓지 않았다. 증오의 괴물에 깃든 저주를 전부 빨아들이면, 네나뷔스테와 이 아이를 잇는 주술도구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빼내면, 둘 모두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저주를 흡수하는 일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것은 증오의 괴물에 난 가시가 사비나의 몸을 찌르는 것이 고통스러워서도 아니고, 저를 떼어 놓으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네나뷔스테가 성가시기 때문도 아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오지 마세요!”

─키에에엑!

사비나를 구하기 위해 에르잔이 증오의 괴물에 손대는 순간, 마치 기름 먹인 밧줄을 타고 불길이 번지듯이 가시가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에르잔, 손을 떼요! 어서!”

“아가씨, 위험합니다!”

“떨어져! 내 동생한테서 떨어지란 말이야!”

증오의 괴물은 가시로 찌르며 몸부림치고, 네나뷔스테는 사비나의 옷을 찢고 그녀의 피부를 마구 할퀴고 깨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든데, 에르잔이 증오의 괴물을 태워 버린다면 자신은 이 아이도, 네나뷔스테도 구할 수 없게 된다.

사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나자예프! 에르잔을 광장으로 쫓아내요!”

“응? 내, 내가?”

“사비나 아가씨!”

사비나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인지, 평소라면 나자예프의 힘에 밀리지 않을 터인데도 에르잔은 나자예프가 잡아끄는 손길에 그만 비틀거렸다. 에르잔의 손이 증오의 괴물로부터 떨어지자 치이익, 연기가 걷히며 가시 돋친 꼬리가 다 타 버리고, 화상을 입은 듯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의 피부가 드러났다. 엉덩이부터 척추를 타고 날개뼈까지, 꼭 나무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것처럼 물집이 잡혀 있었다.

괴물 같은 몸체와는 달리 드러난 피부가 완전히 어린아이의 몸 그 자체라서, 에르잔은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죽어! 죽으란 말이야! 내 동생 괴롭히지 말고!”

“아윽!”

증오의 괴물에 매달려 있던 사비나는 네나뷔스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드득. 손에 잡혀 있던 가시와 작고 뾰족한 무언가가 함께 뽑혀 나왔다.

그러자 그 순간, 네나뷔스테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며 몸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아! 아! 아아악!”

제압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몸부림을 치는 네나뷔스테의 머리쓰개가 벗겨지고, 윤기 나는 백금발이 한낮의 태양 아래 드러났다.

사비나는 제 손에 잡혀 있는 가시들 사이에서 주술도구를 발견해 냈다.

그건 네나뷔스테의 머리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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