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40화 (40/189)

40화

“있잖아, 아이베크. 오늘 누나가 뭘 가져왔는지 아니?”

“끄으…….”

“무려 내가 처음 자수를 놓은 천을 발견했어. 아이베크, 기억하니? 내가 해바라기 모양의 자수를 놓다가 잠시 닭 모이를 주러 간 사이에, 너와 자니베크가 와서 내 자수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거.”

네나뷔스테의 손에 들려 있는 붉은 천에는 가운데에 원을 두고 가장자리에 노란색의 실타래가 밖을 향해 뻗어 나오는 모양새였다.

균형 잡힌 꽃잎의 모양이 아니라 어디는 짧고 뚱뚱하고 어디는 중간이 갈라지고 어디는 흐물거리는 그것은, 해바라기보다는 차라리 해파리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만큼 형편없었다.

“그때 내 첫 자수를 망친 너희들한테 마구 화를 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처음부터 자수에 소질이 없었어.”

해바라기를 수놓으려 했는데 생각한 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아, 점점 실이 꼬이는 모양이 이상해져서 괜히 화가 나 탁자 위에 던져 놓고 닭 모이를 주러 나갔다.

네나뷔스테의 동생으로 쌍둥이였던 아이베크와 자니베크는 누이의 방에 들어왔다가, 붉은 천에 놓인 자수를 보고 신기해하며 자기들도 수를 놓아보려다 모양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뒤늦게 방으로 돌아와 그걸 발견한 네나뷔스테는 자수를 망쳐 놓은 동생들에게 화를 냈지만, 「망쳐 놓았다」라는 건 틀린 말이었다. 어차피 그건 처음부터 망친 자수였으니까.

“그때, 화내서 미안해. 지나고 보면 참 별것도 아닌 일인데 많이 싸웠지, 우리.”

“아으으…….”

“창고가 무너지면서 완전히 폭삭 주저앉아, 무거운 기둥과 벽재를 치워 내지 않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치우다 보니까 드디어 안에 있던 물건들이 보이더라고.”

내일 또 추억이 깃든 물건을 발견하면 가져올게.

……라고 인사하고는, 네나뷔스테는 반짝 눈을 떠서 아이베크가 웅크리고 있는 관에서 떨어졌다.

혹시 바람이 불어 관끼리 부딪혀 넘어지면 동생들이 다칠까 염려했던 네나뷔스테는 관 사이를 멀찍하게 띄워 놓았다. 그녀의 걸음으로는 여섯 걸음쯤 될까. 자니베크가 있는 관으로 다가간 네나뷔스테는 똑똑. 노크를 하고는 벽에 귀를 기울였다.

“안녕, 자니베크. 누나가 왔어.”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니베크. 자고 있니? 해가 중천인데. 슬슬 일어나야지.”

네나뷔스테의 음성이 조금 커졌다.

딱!

판자를 두드리는 소리도 조금 더 격해졌다.

“매일 그 안에서 하는 일 없이 있다고 해서 아무 때나 자고 깨면 안 돼. 밤에 잠들고, 낮에 깨어 있으라고 누나가 말했지?”

쾅쾅. 판자에 붙어 있던 먼지가 떨어지고 쇠사슬이 흔들거릴 만큼 벽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니베크! 자니베크! 대답해!”

아이베크와 대화할 때는 마치 추억을 나누는 남매처럼 다정했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더니, 이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누나가 왔다고 했잖아!”

노크를 할 때만 하더라도 온화했던 네나뷔스테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지더니, 그녀가 우도를 든 손을 치켜들었다.

콰앙!

낡은 판자에 네나뷔스테가 휘두른 우도가 꽂혔다. 낡았다고는 해도 워낙 두툼한 탓에 우도를 휘두른 정도로는 흠집밖에 나지 않지만, 네나뷔스테는 홈 사이에 낀 우도를 끙끙거리며 빼내고는, 다시 관을 향해 휘둘렀다.

“자니베크! 누나 말이 안 들려?”

쩔그렁. 우도가 쇠사슬에 부딪혀 탁한 금속음을 내며 흔들렸다.

“내가!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를 무시해?”

네나뷔스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서툰 자수가 놓여 있던 천을 내던지고 양손으로 우도를 움켜쥐었다.

쾅!

콰앙!

묵직한 우도가 두꺼운 나무판자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리와 낡은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으아앙……!”

옆의 관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관을 쪼갤 기세로 우도를 휘두르던 네나뷔스테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헐레벌떡 세 번째 관으로 달려갔다.

“줄디즈, 줄디즈! 왜 그러니? 왜 울어?”

“무서워…….”

“왜 그러니? 악몽이라도 꾼 거야? 괜찮아. 언니가 있으니까 안심해. 아무도 우리 줄디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테니까,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언니만 믿으렴.”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자니베크가 있던 관을 우도로 내려찍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네나뷔스테는 처절한 얼굴로 줄디즈가 웅크리고 있는 관을 쓰다듬었다.

두 남동생보다 더 어린 줄디즈에게는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전무했다. 그래서 네나뷔스테는 줄디즈의 관을 더욱 튼튼한 관으로 짜고, 쇠사슬도 훨씬 많이, 칭칭 감아 놓았다.

그래서 다른 동생들처럼 판자에 귀를 기울이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열심히 보호한 덕분에 다른 두 동생보다 조금 기운이 있는 건지, 줄디즈는 네나뷔스테와 약간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줄디즈? 줄디즈, 괜찮아…….”

“언니, 무서워.”

“언니가 있으니까 괜찮아. 안심하렴.”

“언니, 무서워…….”

줄디즈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해하기를 거부한 건지, 네나뷔스테는 마치 악몽을 꾼 동생을 달래듯 쇠사슬이 감긴 관을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내가 너희를 지킬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훌쩍. 줄디즈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그친 거라면 다행이다. 그렇게 판단한 네나뷔스테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마지막 네 번째 관을 향해 다가갔다.

―쉬이익.

관 안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알마즈. 안에 있지?”

―쉬익, 쉭. 푸다닥!

마치 커다란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끊어지고, 짐승이 벽에 빠르게 몸을 부대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흔들흔들. 쇠사슬로 칭칭 감아 놓은 나무 관이 흔들렸다.

“얌전히 있어, 알마즈.”

―다닥. 닥.

네나뷔스테의 말을 알아들은 듯, 안에서 몸부림치던 소리는 수그러들고, 굵은 손톱 같은 것으로 벽을 닥닥 긁는 소리가 들렸다.

“얌전히 있으라고, 누나가 말했지?”

네나뷔스테가 한 번 더 엄포를 놓자, 닥닥거리던 소리마저 끊어졌다.

네나뷔스테는 가까이 다가가 벽에 귀를 기울였다.

씨익. 씨익.

조금 흥분한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으나 어딘가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알마즈. 오늘도 건강한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평안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네나뷔스테는 고개를 흔들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천과 우도를 줍기 위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던 중, 시야에 들어온 낯선 이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에르잔의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거대했다. 그 뒤의 사비나와 나자예프의 모습까지 확인하자, 네나뷔스테는 번개처럼 달려가 떨어진 우도를 낚아챘다.

“오지 마.”

동생들과 추억을 나눌 때와는 전혀 다른, 냉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는 듯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네나뷔스테가 경고했다.

“오지 말라고 했어.”

“네나뷔스테. 우리는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에르잔의 뒤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비나가 한 걸을 밤을 내딛는 순간, 네나뷔스테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죽어!!”

우도를 움켜쥔 채로 돌진하는 네나뷔스테를 막아 낸 것은 에르잔이 아니라 나자예프였다. 사비나 하나만 보고 달려드는 네나뷔스테의 시야에서 살짝 벗어난 나자예프는, 반대로 달려가 네나뷔스테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촤아악!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네나뷔스테의 몸이 바닥을 쓸면서 엎어졌다.

“휘우. 속바지를 얼마나 단단히 챙겨 입었는지 치마가 뒤집어져도 뭐 하나 안 보이네.”

이럴 때마저 성희롱을 잃지 않는 것이 나자예프답다고 할까. 에르잔이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자 나자예프는 씩 웃으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음, 저기. 나는 어디까지나 돕는 입장인 거, 잊지 말아 줘.”

“나자예프…….”

노기가 서린 목소리가 땅에 깔리더니, 바닥에 엎어져 있던 네나뷔스테가 몸을 일으켰다. 흙과 풀잎이 옷에 가득 들러붙은 데다 바닥에 고꾸라진 탓에 얼굴에 생채기까지 생겼으나, 네나뷔스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도를 다시 움켜쥐었다.

꽈악. 칼자루를 움켜쥔 손에 힘줄이 울뚝 불거진 것을 본 나자예프는 조금 질린 기분이 들었다.

‘와. 이러다 손가락 한, 두 개 정도는 날아가겠는걸.’

바르셀다와 연결된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는 사수해야 한다. 나자예프는 오른손을 슥 뒤로 숨겼다. 기왕이면 검은 장갑이 아니라 기사들이 끼는 건틀릿이라도 에르잔에게서 빌려올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 나자예프는 실실 웃으며 네 개의 관이 늘어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네나뷔스테의 관심이 사비나로부터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려면, 네나뷔스테의 ‘보물’에 접근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니까.

“나자예프. 꺼져.”

“네나뷔스테, 나를 상대로 밀어내는 전법은 안 먹힐 거야. 게다가 이미 나에게는 사비나라는 연인이 있거든.”

“꺼지라고 말했어.”

“아, 그렇다고 사비나에게 질투하면 안 돼.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공격하는 건 그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도리어 미움을 사는 법이거든.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만 접고…… 끄아악!”

네나뷔스테는 주저 없이 나자예프를 향해 우도를 날려 버렸다. 아슬아슬하게 귀 끝을 스치고 날아간 우도가 나무에 처박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왼쪽 귀가 반절은 날아갔을 것이다. 나자예프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에르잔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뭐 해? 내가 미끼가 될 동안 너도 뭘 좀 해야지!’

그러나 에르잔은 나자예프의 필사적인 눈길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네 개의 관이 늘어선 자리에 꽂혀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저것은…….”

“아직 살아 있어요. 세 명은.”

네나뷔스테가 지키는 관은 네 개.

살아 있는 사람은 셋.

그렇다면 한 명은 죽었다는 뜻일까. 에르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비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지 않도록 후드를 뒤집어썼다.

“에르잔. 내가 네나뷔스테를 향해 달려가는 동시에, 당신은 저 네 개의 관을 부숴 버려요.”

“네 개의 관을 전부, 말입니까?”

“정화해서는 안 돼요. 안에 있는 이들이 저주와 결합된 상태라면 당신의 힘에 크게 다칠 테니까. 부수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중앙 광장을 향해 뛰세요.”

네나뷔스테의 구역인 남쪽 영역 밖으로 벗어나라는 뜻이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아가씨의 호위입니다.”

“당신이 저걸 부수고 네나뷔스테의 구역을 벗어나는 게,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후드를 깊이 눌러써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단호한 목소리만으로 에르잔은 사비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에르잔이 허리춤의 검에 손을 짚었다.

따로 신호를 할 필요는 없었다. 나무에 꽂힌 우도를 뽑아 낸 네나뷔스테가 그것을 다시 나자예프에게 휘두르려는 순간, 사비나는 그녀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에르잔은 녹슨 쇠사슬에 칭칭 감긴, 네 개의 관을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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