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39화 (39/189)

39화

“알았어요. 그럼 방법을 바꾸죠.”

“사비나 아가씨?”

“가늠하긴 어렵지만, 저주의 핵은 이제까지 내가 흡수했던 어떤 주술보다도 강력할 거예요. 난폭한 바르셀다를 상대로 시도했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사비나는 생각했다.

동쪽의 핵, 바르셀다.

서쪽의 핵, 아페티트.

남쪽의 핵, 네나뷔스테.

북쪽의 핵을 지니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폐쇄적인 곳에 발을 들인다면 저주를 흡수하기도 전에 쫓겨날 가능성이 다분했다.

‘아페티트……도, 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정보가 너무 없는걸.’

바르셀다와의 저주가 서로를 삼키며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면, 아페티트에게는 저주를 뺏기는 느낌이었다. 빼앗긴 저주 대신으로 들어온 몽롱한 것의 정체를 사비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은 괜찮은 것으로 보아 몸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듯하지만.

“로스카옌 신부님. 제게 남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죠?”

“아가씨. 네나뷔스테는 위험합니다. 바르셀다처럼 감금된 상태도 아니고, 남쪽 구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르셀다처럼 덩치가 큰 남자도 아니고, 여자잖아요. 저는 호위인 에르잔도 있고…….”

“남쪽에는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밖에 살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나요?”

“네나뷔스테가 죽였지요.”

사비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우물을 빠져나왔을 때, 건너편에 몇 채의 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폐가처럼 보이지만 카밀라와 카이라트의 집도 그랬으니까, 아마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나뷔스테가 증오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로, 제 동생들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보호자라면.

그 증오심을 가장 먼저 쏟아 낼 대상은 바로 주위의 인간들이다.

“그럼 네나뷔스테가, 남쪽 구역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 아니었다면…….”

“저는 물론이고, 북쪽 마을까지 달려가 살아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을 테지요. 쉬이 제압할 수 없을 겁니다.”

나자예프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성을 잃은 인간은 평소 낼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해, 남녀의 완력 차를 무시할 정도였다고.

물론 에르잔의 무력이라면 네나뷔스테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에르잔에게서 정화의 힘이 발현될 경우 네나뷔스테의 몸이 저주와 함께 타들어 간다는 것이다.

사비나의 목표는 증오의 핵만을 흡수하여 네나뷔스테를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지, 그녀를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죽으면 나머지 세 명의 「핵」은 물론이고, 이 마을의 남은 생존자마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저기, 사비나.”

아까와는 달리,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나자예프가 사비나를 불렀다.

“그렇다면 미끼를 쓰는 게 어때?”

“미끼요?”

“아까 너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버렸으니까, 만회할 기회를 줘.”

나자예프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죽기 싫다며 몸부림치던 모습을 ‘자칭’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보인 게 민망했는지, 마른세수를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네나뷔스테를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릴게. 그럼 그때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하면 되잖아?”

“……할 수 있겠어요? 나자예프도 네나뷔스테는 무섭다고 했으면서.”

“저주는 바르셀다가 대신 받아 주지만 다른 타격은 그대로 나한테 오거든. 네 호위한테 얻어맞는 것도 무지 아프고 네나뷔스테의 칼에 베이는 것도 엄청 아프겠지만…… 저주로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행여 잘못되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저주로 죽느니 네나뷔스테의 칼에 찔려 죽는 게 낫다는 걸까. 여전히 한심스럽다는 듯이 나자예프를 바라보는 로스카옌과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입가를 느슨하게 했다.

“나자예프. 회복이 빠르죠?”

“응?”

“허리가 아프다더니만, 지금은 멀쩡히 서 있잖아요.”

에르잔에게 맞고 뻗은 것이 동쪽의 오두막 근처였는데, 어느새 서쪽의 교회까지 기어들어 와 엄살을 부리는 것을 보면 나자예프의 회복 속도 또한 정상이 아니다.

“다른 저주는 피해가지만, 이 마을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니까…… 외부인인 너희보다는 빠른 편이지.”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지만, 살짝 베인 정도는 금방 아물고 근육통이나 멍이 든 정도는 금세 사라진다.

기본적으로 노화란 세포의 재생 속도가 떨어지면서 일어나는 것이니, 불로 상태를 유지하는 이 마을에서 어지간한 상처는 통상보다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좋아요.”

“정말? 역시 사비나는 달라.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나자예프가 감격한 얼굴로 두 손을 모으며 다가왔지만 에르잔에게 가로막혀 어차피 사비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밀라는 기절했고, 카이라트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조차 없어.’

사비나에게는 아군이 필요했다.

에르잔은 호위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스럽지만, 저주받은 인간을 상대하기에는 부적절했다.

나자예프는 늘 불쑥 튀어나와 그녀에게 이상한 농담이나 건네는 난봉꾼이지만, 어쨌든 이 마을에서 드물게 사지 멀쩡한 몸을 가진 남자다.

저주에 물들지도 않고, 저주받은 이를 불태워 버리지도 않는.

“약속할게요, 나자예프.”

“뭐를?”

“나와 에르잔을 도와서 네나뷔스테로부터 증오의 핵을 흡수하는 데 성공하면, 당신이 죽지 않고도 바르셀다를 구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더는 누군가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죽음이 사비나를 사랑한다면, 이 마을의 모든 이들이 겪을 「죽음」마저 그녀에게 이끌릴 테니.

사비나의 검은 눈동자가 나자예프를 향했다.

일순간이지만, 나자예프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얼핏 붉은 빛이 비친 듯했다.

나자예프는 조금 놀란 것도 같고, 불안한 것도 같고, 자존심이 상한 것도 같은 이상한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사비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지킬 테니까.”

“나자예프.”

“음. 기왕이면 죽기 전에 키스 한 번만 해 주면 천국으로 갈 수 있을 텐데.”

“사비나 아가씨. 역시 이 남자를 데려가는 건 재고해 보심이 좋겠습니다.”

에르잔이 정색하며 나자예프를 밀어내고, 나자예프가 떫은 소리를 내며 과장스럽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비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로스카옌 신부님. 카밀라를 잘 부탁드려요.”

“……진정,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은 카밀라가 깨어나면 해 주세요.”

괜찮다, 가 아니라 오히려 기쁘다.

어째서 기쁜지 말해서는 안 된다. 들뜬 심정을 감추기 위해 입안을 깨물면서 사비나는 눈을 감았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는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저주의 핵은 흡수하는 일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지만, 사비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죽음의 화신이 된 것은 바로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라고.

10. 남쪽에서 부는 바람

마을의 남쪽에는 몇 채의 집이 있다. 대부분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지만, 적어도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거라면, 그 집들을 해체한 중앙 구역에는 조금 특수한 창고가 있다.

창고라고 해야 할까, ‘관’이라고 해야 할까.

성인 남자 한 사람이 들어가기도 빠듯한 크기의, 네모난 판자로 둘러싸인 구조물에는 그 나름대로 집의 모습을 형상화하려 한 것인지 지붕에 창이 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간이 화장실이나, 집 형태로 멋을 부려 만든 사물함처럼 보이는 그 구조물에는, 안에 사람이든 물건이든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없었다.

바로 「문」.

문이 없는,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네 개의 길쭉한 구조물.

구조물 위를 덮은 지붕과 딱 바깥의 공기가 들어올 만큼만 네모난 창이 달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영락없이 관짝이 서 있는 모양새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보였다. 가장 이상한 점은, 어차피 열릴 문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녹슨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다는 점이었지만.

네나뷔스테는 한 손에는 우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서툴게 자수가 놓인 천을 들고 네 개의 관이 늘어서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살랑살랑. 손에 들린 천과 넓은 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머리쓰개 아래로 보이는 백금발은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으나 윤기만은 잃지 않았다.

꼭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기분 좋은 표정으로, 네나뷔스테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장 왼쪽에 서 있는 관에 다가가 녹슨 쇠사슬을 위아래로 벌리고, 나무 판자에 머리를 기댔다.

창이 달려 있는 위치는 지붕이라서 네나뷔스테의 키로는 발돋움을 해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나 관이 비좁은 까닭에 판자에 몸을 기대고 귀를 기울이면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이베크. 잘 지내니? 누나가 왔단다.”

“누우, 나…….”

쇠사슬로 감긴 관 안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완전히 목이 잠겨 갈라지는 음성은 도무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네나뷔스테는 동생의 인사를 들은 것이 기쁜지 작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날이 좋아.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 바람도 시원하고. 그런데 창문이 작아서 너도 바람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 으…….”

관 안에서 신음이 들렸다.

아이베크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네나뷔스테가 말을 걸면 어떻게든 목소리는 내는 것으로 보아, 말은 알아듣는 것 같았다.

네나뷔스테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저주받은 마을, 수없이 죽어 간 사람들.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괴로워하던 이들 사이에서 동생들을 지켜 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도, 대화를 나눌 수 없어도, 이렇게 판자에 기대어 귀를 기울이면 남동생의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긁힌 신음을 들을 수 있다.

동생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한 네나뷔스테는 오늘도 무사히 ‘적’으로부터 제 동생을 지켜 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있잖아, 아이베크. 오늘 누나가 뭘 가져왔는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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