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사비나. 이 나자예프는 평생 단 한 명의 여자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남자야. 내 마음엔 오직 너뿐이야. 맹세할 테니까!”
그런 맹세는 받고 싶지도 않고 받을 이유도 없었으나, 사비나가 거절의 답변을 하기도 전에 로스카옌이 한탄했다.
“이놈의 헛소리 하나하나에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여자의 이름을 외치며 돌아다니던 녀석이니, 아가씨께서 떠나시면 또 손바닥 뒤집듯 대상을 바꿀 겁니다.”
“잠깐, 로스카옌! 그건 경우가 다르지. 올가는 죽었잖아! 손 한 번 못 잡아 본 여자를 15년이나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이젠 새 사랑을 찾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을 접고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게. 자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뿐이니까.”
사제치고는 상당히 신랄한 발언이었다. 아무리 나자예프가 난봉꾼이라도 로스카옌에게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비나는 조금 당황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나자예프는 에르잔에게 맞아서 몸이 불편한 상태예요. 그냥 쉬게 해 주세요.”
“역시 사비나는 상냥해. 내가 여자를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지. 올가를 꼭 닮은 걸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괜히 편을 들었다는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던 사비나는 문득 그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다.
“누구를 닮았다고요?”
“올가. 우리 마을에서 최고로 미인이었거든. 내 첫사랑이야.”
평생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방금 지껄여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첫사랑」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니 역시 나자예프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건 헛수고다.
사비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도실로 향하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르잔이 언제 돌아올까 기다리는 듯이.
“앗, 사비나. 혹시 질투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미모로만 따지면 사비나가 더 고상한 이미지니까. 뭣보다 올가는 나보다 12살이나 연상이었거든.”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아니면 에르잔이 없을 때 최대한 자기 어필을 해 둬야 한다고 판단한 건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듣는 사람도 없을 터인데 나자예프는 혼자서 열심히 지껄였다.
“어린 시절 이야기야. 어른이 되면 올가에게 청혼하려고 했지만, 올가는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거든. 그리고 8년 뒤에 죽어 버렸고. 추억은 있지만 난 아직 순결한 몸이니까 사비나에게 온전히 내 처음을 줄 수 있어.”
“아, 에르잔.”
나자예프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있던 사비나는 열린 문틈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에르잔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기도실에 환자를 눕힐 만한 공간이 없어 자리를 마련하느라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카밀라의 상태는 어때요?”
“호흡도 고르고, 편히 잠든 상태입니다. 걱정하실 것은 없어 보입니다.”
발작하듯 오열하다가 까무러쳤으니 중간에 두통으로 깰 수도 있고, 악몽을 꿀 수도 있겠지만 에르잔은 사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뒷말은 생략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행이네요. 카이라트도 혼자서는 몸을 가누기 힘들 테니 치료를 해야 할 텐데…….”
“그럼 가는 길에 오두막에 들르시겠습니까?”
에르잔이 자연스럽게 사비나를 에스코트하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곳에서 먼저 할 일이 있어요.”
“역시 사비나. 내 진심을 알아주는구나? 그런데 나 지금 허리 상태가 말이 아닌데.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로스카옌. 허리에 좋은 치료제 같은 건 없어?”
여전히 혼자서 오해하고 할 말만 지껄이는 나자예프의 머리를 손으로 밀면서 로스카옌 사제가 에르잔에게 손짓했다.
“에르잔. 아가씨께서 하시는 말씀에 방해가 될 듯하니 이 녀석부터 좀 조용히 시켜 주게.”
“예, 로스카옌 신부님.”
“너무하네! 어째서 내 사랑에는 항상 이렇게 장애물이……!”
“에르잔, 기다려요.”
나자예프를 일격에 졸도시키겠다는 듯이 손가락을 뚜둑 꺾으며 다가가는 에르잔을 사비나가 불러 세웠다. 울상이 되었던 나자예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로스카옌 사제도 놀란 눈으로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사비나가 에르잔을 멈춰 세운 건 두 사람의 오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유였지만.
“동쪽의 핵에 깃든 「분노」의 저주를 흡수하려면, 어차피 나자예프의 도움도 받아야 하니까요.”
“뭐라고?”
“나자예프. 당신 동생이라고 했죠? 바르셀다에 대해 알려 주세요. 그 사람부터 구해야겠어요.”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당혹스러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로스카옌은 놀라지는 않았으나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사비나와 나자예프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리고 나자예프는, 에르잔이 자신을 기절시키려 다가올 때보다 더 처절한 얼굴로 소리쳤다.
“안 돼! 나는 죽기 싫어!”
“안 죽어요. 바르셀다의 저주를 내 몸에 흡수하려는 거니까.”
로스카옌 사제는 처음엔 사비나와 에르잔을 마을에서 내보내려 했지만, 사비나가 남겠다고 고하자 알아서 해보라는 듯이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 마을에 어떤 저주가 깃들고, 그 주술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마을의 저주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로스카옌 사제라고 카이라트는 말했다. 그 말이 진짜라면, 저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로스카옌일 터.
비밀을 말하지 않는 그의 입을 열게 하려면 이쪽의 패부터 보여야 하리라.
“로스카옌 신부님. 저 또한 저주에 잠식된 인간이에요.”
사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정화술사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보통의 주술사처럼 자유자재로 저주를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아가씨?”
“그 대신 저는 그 어떤 저주라도 흡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얼마만큼의 저주를 흡수하더라도 죽지 않죠.”
마을의 네 어귀에 저주의 핵을 심음으로써 마을의 시간이 멈춘 것. 카이라트는 그것을 「불로」의 주술이라고 받아들였다. 사고나 자살로 죽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연사를 하지 않게 된다면 일종의 「불사」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냐면서.
하지만 사비나는 진정한 불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병에도 걸리지 않고, 자살도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치명상을 입어도 나아 버리는 저주스러운 몸뚱어리를 지닌 존재가 바로 그녀 자신이니까.
저주에 오염된 연못과 우물을 정화하면서 마을의 공기는 조금 맑아졌지만, 주술은 풀리지 않았다. 카림이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카밀라의 얼굴과 다리도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멈추어 있다.
마을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정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물을 정화했을 때, 네나뷔스테는 잠시 증오로부터 벗어나 이성을 되찾은 듯했으나 곧 다시 증오의 저주에 잠식되었다.
사람이나 장소에 깃든 저주를 빨아들이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마을의 저주를 풀려면, 네 개의 핵에 깃든 주술을 사비나가 전부 흡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하려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에르잔에게만 의지해서는 바르셀다가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까. 나자예프, 당신이 도와줘야 해요.”
“사비나, 안 돼. 나한테 오는 저주를 바르셀다가 대신 받고 있다고 말했잖아.”
저주를 흡수하다가 실패해서 반동이 올까 걱정하는 걸까? 바르셀다가 죽으면 기껏 대신 저주를 받아 주던 제물이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나자예프의 표정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바르셀다의 저주는 흡수할 수 없어.”
“네?”
“아니, 죽을지 안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르셀다도 그렇게 괴로워했는데. 나라면 분명 죽을 거야.”
저주의 주술에는 순서가 있다. 주문을 걸든 제물을 바치든 주술을 걸기 위한 준비를 하고, 상대에게 저주를 건다. 상대가 저주받으면 돌아오는 반동을 주술사가 감당하거나, 대신 받아 낼 「제물」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둘 이상의 주술을 걸 때는 더욱 복잡해진다.
저주의 반동을 대신 받는 「제물」에 저주가 걸리면, 먼저 걸린 주술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한 나중에 걸린 저주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르잔처럼, 모든 저주를 한 번에 없애 버리는 정화술사를 제외하고는.
“사비나. 네가 진짜 저주를 흡수할 수 있는 존재라면…… 바르셀다와 마주쳤을 때, 이상한 걸 느꼈을 텐데. 몰랐어?”
나자예프의 말에 불현듯 첨탑 지하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검은 뱀과도 같은 저주에 이끌려 끌려 들어간 곳에서 마주한 붉은 눈의 남자. 바르셀다와 사비나의 몸이 닿는 순간 서로의 몸에 동시에 충격이 왔던 것을 기억한다.
정확히는 사비나가 바르셀다의 저주를 빨아들이는 만큼, 반대로 사비나의 저주가 바르셀다의 안으로 빨려들어 간다고 할까.
“균형을 이루기 위해…… 일정한 저주의 농도가 유지된다는 거군요.”
바르셀다가 받고 있는 나자예프 몫의 저주를 먼저 그에게 되돌려 주지 않으면, 사비나와 바르셀다 사이에서 죽음의 저주와 분노의 저주가 끊임없이 서로 뺏고 뺏기며 순환할 뿐이라는 뜻이다.
“나자예프. 저주를 감당하는 게 두렵나요? 당신 동생은 저주의 핵을 품은 채로도 15년이나 그걸 감당하고 있었는데.”
“그래, 무서워. ……젠장, 알아. 나도 내가 쓰레기라는 거. 그렇지만 저주로 죽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다고.”
나자예프는 저주로 죽어 가는 인간을 수없이 보아 왔다. 온몸이 썩어 들어가고,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피부가 벌어져 내장이 튀어나오는데도 바로 죽지 않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절규하는 이들을 보아 왔다. 깔끔하게 목이 잘려 죽는 건 차라리 호사스러울 정도고,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다 죽는 것만도 감지덕지다.
적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그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는 이들을 나자예프는 보아 왔다.
그에게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이 자를 먼저 없애는 것.”
에르잔이 비정한 얼굴로 나자예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순간 보인 절망적인 나자예프의 표정에 사비나는 순간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저주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을 제물로 삼고,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자신의 친구, 이웃들이 저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나자예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도끼를 들고 마을 안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사비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위협하듯 다가오며 희롱하던 것만 보더라도 나자예프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악독한 남자다.
그러니 에르잔이 보기에, 마을의 저주를 푸는 일에 나자예프의 존재가 방해된다면 그는 죽어도 마땅한 존재였다.
“사비나…….”
더없이 애절한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는 나자예프를 사비나는 비웃을 수 없었다. 에르잔처럼 그를 가증스럽다고 여길 수도 없었다.
사비나야말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온 장본인이었으니까.
사비나에게 나자예프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방법을 바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