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37화 (37/189)

37화

“교회는 이쪽입니다, 사비나 아가씨.”

기절한 카밀라를 들쳐메고 에르잔이 성큼 다가왔다.

“……에르잔은 굉장히, 태연하네요.”

“무기를 든 병사도 아니고, 카밀라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카이라트와 카밀라의 대화를 듣고도, 에르잔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걸까.

어쩌면 저주나 주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비나와 카이라트가 나눈 대화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오간 거라 듣지 못했을 테고.

“겨우 의문이 풀렸으니까요.”

“의문이라니요?”

“로스카옌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15년 전의 참상 말입니다.”

이 산도 누군가의 영지에 속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외진 산골 마을이라면 세금을 수급할 관리인과 화물 마차를 보내는 것이 도리어 손해다. 저주받은 마을이라고 한들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도 않고, 사비나와 에르잔이 15년 만의 방문객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그런데 이렇다 할 자원도 물자도 없고, 그렇다고 영토분쟁의 거점으로 쓸 만한 곳도 아닌 이런 작은 마을을 군인들이 습격해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지를 이유가 무엇일까. 에르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카이라트의 말을 듣고서, 겨우 알아챘다.

불로불사의 주술.

고금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특히 권력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얻고자 하는 것.

카이라트의 연구 자료를 훔쳐 간 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자료를 읽은 권력자가 내용을 신뢰했다면, 먼저 시험해 보려 할 것이다.

외따로이 떨어져 방문객조차 찾아오지 않는, 아마도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을 이 마을은 최적의 ‘실험 장소’였으리라.

“그런 참혹한 일이 일어난 이유도,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도, 카이라트의 말을 듣고 나니 납득이 가더군요.”

“그래서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 카밀라를 말리지 않은 건가요?”

에르잔도 이 마을에 참혹한 재앙을 가져온 원인이 카이라트에게 있다고, 모든 것이 그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카이라트는 그저 연구를 했을 뿐입니다. 실행을 하지도, 누군가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지요. 연구 자료를 도둑맞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마을이 이렇게 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가족인 카밀라를 속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카밀라에게는 당연히 화낼 권리가 있습니다.”

가족을 속였으니까.

그 말에 사비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사비나는 아직도 에르잔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많이 있다. 그녀 자신이 죽음의 화신으로서 죽지 않는 몸이며, 다른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고 에둘러 설명하긴 했지만, 그녀가 콘바야젠 백작가문의 주술사로서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마을의 모든 저주를 없애고 나면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하고 싶다는 말도 아직 하지 않았다.

아마도 최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결코 말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러면 그때까지 자신은 에르잔을 계속 속이는 셈이다.

카이라트가 카밀라를 속였던 것처럼, 그래서 카밀라가 울분을 터뜨리며 절규했던 것처럼.

훗날 진실을 알게 되면, 에르잔도 사비나를 원망하며 폭언을 퍼부을까.

“어쩌죠? 나도…… 에르잔을 속였는데.”

“사비나 아가씨?”

“저주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병’이라고 둘러댔죠. 게다가 저주를 흡수한 반동으로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하고, 우물을 정화하는 건 혼자서도 가능할 거라고 말해 놓고 사라져서 걱정을 끼치고, 또…….”

“그건 사비나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에르잔을 끌어들일 거라면, 미리 고백해야 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죠.”

“사비나 아가씨. 저는 괜찮습니다.”

에르잔은 주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비나가 자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의 화신으로서 타인의 저주를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밝히고 싶어 할까.

바르셀다로부터 사비나를 지키지 못한 것도 호위인 자신의 책임이고, 우물에서 사라진 사비나를 곧바로 찾아내지 못한 것도 호위인 자신의 책임이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비밀은 있어. 예기치 못한 변수도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법이고.’

에르잔은 사비나가 자신에게 비밀을 가지는 것을 결코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여자에 대해 무지해도 머리까지 바보는 아니다. 콘바야젠 백작 가문에서 오랫동안 보호받으며 자라와 타인과의 접촉을 낯설어하는 그녀가, 처음 보는 호위기사에게 마음을 쉬이 열 리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저는 사비나 아가씨의 호위기사입니다. 당신의 모든 비밀을 알려 달라고 할 만큼 주제를 모르지 않습니다.”

“에르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 상처가 되는 추억이 있다. 사비나의 과거가 결코 평탄하지 않았음을 짐작한 에르잔은 그녀의 과거를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사비나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인생에 딱 한 번의 기회가 온다는 게, 이런 거였군요.”

“사비나 아가씨?”

죽음의 화신으로서 수많은 이들을 죽여 온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끔찍한 고통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운명은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이 태양 같은 남자를 보내 주었다.

“에르잔이 내 호위기사로 와 주었다는 게, 내게는 분에 넘칠 만큼 기쁜 일이라서.”

“사비나 아가씨…….”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에게는 못 할 짓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사비나는 에르잔을 원했다.

이 마을의 저주를 전부 빨아들이는 건 사비나 혼자서는 무리다.

나자예프를 쫓아내고, 카밀라를 진정시키고, 괴물처럼 강력한 바르셀다도 제압할 수 있는 에르잔의 힘이 필요했다.

에르잔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인데, 기사로서의 보람도 느낄 수 없는 일일 텐데, 사비나에게는 에르잔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에르잔. 나는 이 마을의 저주를 풀고 싶어요.”

“……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요. 전부 흡수한다고 바로 풀리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죠. 그래도…….”

“언제까지고, 사비나 아가씨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전에, 사비나의 의중을 읽은 것처럼 에르잔이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사비나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로, 로스카옌 신부님께 가요. 카밀라를 쉬게 해야 하니까.”

“예, 사비나 아가씨.”

오두막에 버려진 카이라트는 어쩌고 있을까. 그의 눈을 고쳐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지금 중요한 일은 그게 아니었다.

사비나는 에르잔과 함께 교회로 향했다.

이 시간이라면 로스카옌 사제는 기도실에 있을 것이다.

***

“안녕, 사비나. 역시 여기서 기다리는 게 정답이었네.”

“……나자예프?”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단상의 바로 앞 긴 의자에 드러누운 나자예프가 사비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늘 내 앞에서 로스카옌을 찾길래,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앞으로는 기다릴 필요도 없게 될 거다.”

카밀라를 들쳐멘 채로 에르잔이 성큼 다가가자, 불경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던 나자예프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잠깐, 잠깐! 나는 환자야, 응? 기사가 무기도 없는 일반인을 공격해도 돼?”

“사비나 아가씨 앞에서 무례를 일삼는 자를 치우는 것도 호위기사의 일이지.”

“잠깐, 난 아직 허리가…… 사비나, 좀 말려 줘!”

“에르잔. 진정해요.”

엄살과 절규가 반반 섞인 나자예프의 외침에 사비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에르잔을 만류했다. 에르잔에게 맞은 상처가 아직 회복이 덜 되었는지, 나자예프는 휘우, 한숨을 내쉬며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추스르더니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댔다.

“무슨 일인가?”

단상 왼쪽의 문이 열리더니 로스카옌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앉은 건지 널브러진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나자예프를 한심스럽게 쳐다보고는, 에르잔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혀 있는 카밀라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사비나는 얼른 에르잔의 앞으로 나서 로스카옌에게 부탁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카밀라를 이곳에서 쉬게 할 수 있을까요? 카이라트와 심하게 다투는 바람에, 당분간은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무엇 때문에 싸우고 어쩌다가 기절했는지 묻지도 않고, 로스카옌은 가볍게 수긍한 후 에르잔에게 카밀라를 기도실로 옮기도록 했다.

에르잔은 자리를 뜨기 전에 한 번 더 나자예프를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고는, 카밀라의 몸을 추슬러 안고 기도실로 향했다.

나자예프는 에르잔의 눈빛에 질겁하는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아…… 누가 보면 내가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줄 알겠네. 나는 사비나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뿐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나자예프. 그건 고백이 아니라 성희롱이에요.”

사비나가 정정해 주려 하자 로스카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끼어들었다.

“아가씨. 더 말을 섞으실 것 없습니다. 나자예프, 자네는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

“왜? 다쳤을 때는 교회에 오면 보호해 주겠다면서!”

“카밀라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도실에 머물 텐데, 사내인 자네를 이곳에 드나들게 할 수는 없지 않나.”

“지금 내가 카밀라한테 손이라도 댈까 봐 쫓아내겠다는 거야?”

로스카옌의 평가로도, 카밀라의 평가로도, 그리고 사비나가 보기에도 나자예프는 골칫거리인 마을의 불한당, 난봉꾼에 지나지 않았다.

카밀라가 당분간 카이라트와 떨어져 쉴 수 있도록 보호하려면 남자의 출입은 금지하는 게 당연하다. 사제인 로스카옌이나 사비나의 호위인 에르잔이라면 모를까, 나자예프라면 특히 더 그렇다.

그런데도 나자예프는 마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재판장에 선 피고인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항변했다.

“내 마음엔 오직 사비나 하나밖에 없어! 다른 여자한테 손대기는커녕 눈길도 줄 생각이 없다고. 남자의 순정을 무시하지 마!”

아무도 물어본 적 없는데 혼자서 열심히 자신의 진심을 피력한 나자예프는 사비나를 향해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사비나. 이 나자예프는 평생 단 한 명의 여자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남자야. 내 마음엔 오직 너뿐이야. 맹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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