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35화 (35/189)

35화

“그럼 로스카옌 신부님은…….”

“사비나. 그 할아버지한테 관심을 가질 시간에 내게 관심을 가져 주면 어떨까?”

“이런 미친, 나자예프! 저리 꺼져. 사비나한테 다가오지 마!”

“갑자기 웬 보호자 행세야, 카밀라? 눈먼 카이라트를 돌보다 보니 연약한 사람을 보면 아주 봉사심이 끓어오르나 보지?”

“내 얼굴이랑 다리를 고쳐 준 게 사비나야. 나는 너 같은 난봉꾼이랑은 달리 은혜를 알거든.”

사비나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카밀라와 능글맞게 웃는 나자예프를 보며 사비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알아야 할 일도, 해결해야 할 일도 산더미 같은데 이래서야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사비나는 제힘으로 말릴 수 있는 카밀라를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앞에서 능글거리던 나자예프의 발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휙, 하고 사라졌다.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에르잔. 깨어났어요?”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두고 제가 늦잠을…….”

“저기. 사과는 나한테 해 주지 않을래? 나 허리가 나간 것 같은데, 허리는 남자의 생명…….”

바닥에 뻗은 채로 하소연하는 나자예프를 뒤로하고, 사비나는 카밀라와 함께 카이라트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르잔은 나자예프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한 번 더 걷어차서 기절시키고는 뒤를 따랐다.

9. 한걸음 내디디면, 그곳에는

“어서 오세요.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눈이 멀었어도 온도와 습도만으로 날씨를 추측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감각이 예민한 카이라트는 세 사람의 발소리를 알아듣고 문 쪽을 향해 인사했다.

침대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여전히 몸의 근육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이라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생기나 기운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저주처럼 음험한 것도 아닌, 초월적인 무언가가.

사비나는 카이라트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며시 머리를 굽혀 인사하며 사과했다.

“어제는 그냥 돌아가서 미안했어요, 카이라트. 당신 눈을 고쳐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아닙니다. 저야말로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 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비나.”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이제 카이라트, 당신에게 깃든 저주를 거두어들일게요.”

“아닙니다. 우선 당시의 상황 설명을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카이라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침 일찍 상태를 보고 온 카밀라의 말에 의하면 우물은 정화되었지만 시체는 사라졌다고 한다. 연못을 정화했을 때는 죽은 이들의 뼈가 남아 있었는데, 어째서일까.

“사비나. 어제 정화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정화해 놓고도 영문을 몰라 하는 사비나와는 달리, 카이라트는 담담하게 물었다.

“어제 들어갔던 우물을 정화했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풍덩 빠졌거든요. 헤엄쳐서 빠져나가니 남쪽 우물이었어요.”

“그랬군요.”

“두 우물끼리 이어져 있던 것과 시체가 사라진 것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을까요?”

“저주의 핵은 이어져 있습니다. 우물이 이어져 있다면 당신이 정화하면서 남쪽의 핵에도 영향이 미쳤을 거예요.”

“아, 그래서 네나뷔스테가…….”

뚜껑이 덮여 있었으니 분명 사용하지 않는 우물일 텐데, 계속 끼긱거리면서 도르래를 감는 소리가 들렸다. 남쪽 우물 벽을 타고 기어올라 와 뚜껑을 열고 나온 사비나를 보고, 네나뷔스테는 마치 무서운 어떤 것을 본 것처럼 경계했다.

카밀라나 나자예프의 표현에 의하면 남쪽 구역의 사람이 아니라면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바로 칼을 들고 달려들 만큼 공격적이라고 하는데, 처음 마주쳤을 때의 네나뷔스테는 비록 우도를 들고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긴 했지만, 사람을 해치는 것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처럼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사비나의 말을 들은 카이라트가 잠시 숨을 삼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나뷔스테를 만났습니까?”

“나도 놀랐지 뭐야. 다행히 다친 곳은 없대.”

“카밀라. 나는 사비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 뭐야. 설명해 줘도 불만은…….”

카밀라가 툴툴거리며 낡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사비나도 앉으라는 뜻이다.

“사비나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아!”

에르잔은 겉옷을 벗어 먼지투성이인 의자를 닦아 내고는, 나무의 결이 상해 가시에 찔릴 것을 경계했는지 겉옷에 달라붙은 먼지를 탁탁 털어 다시 의자에 얹었다.

“이제 앉으셔도 됩니다, 사비나 아가씨.”

“……와. 집주인 앞에서 너무 대놓고 챙기는 거 아냐? 나도 맨날 그 의자에 앉는데 아무 이상 없어. 사람 무안하게.”

“에르잔. 이러는 건 카밀라에게 실례예요.”

“제 역할은 사비나 아가씨를 호위하는 것입니다.”

에르잔은 고지식하게 답했다.

호위의 범주는 적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고, 혹 낯선 곳에 발을 들였을 때 위험 요소가 없는지 먼저 탐색하는 정도지, 모든 수발을 다 들고 애지중지 여긴다는 뜻이 아니었으나 에르잔과의 대화가 길어져 봐야 오해만 싹트고, 카밀라와 카이라트의 앞에서 할 말도 아니었으므로 사비나는 그냥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에르잔은 호위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듯, 벽 쪽으로 물러나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사비나. 네 호위기사, 저러고 있으니까 꼭 무슨 밀랍인형 같다. 눈도 안 깜박여.”

“방해하지 않으려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카이라트, 저한테 묻고 싶은 게 뭔가요?”

“네나뷔스테의 상태는 어떻던가요? 더 심해졌습니까? 아니면 나아졌습니까?”

심해졌는지 나아졌는지를 물어도, 사비나는 그날 네나뷔스테와 마주한 것이 처음이었기에 본래 그녀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모른다.

다만 처음엔 사비나를 무슨 이상한 것 보듯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가 사비나에게 이름을 불리는 순간, 눈빛이 변하며 칼을 휘둘렀다는 게 차이점일까.

“심해졌는지 나아졌는지는 몰라요. 다만 우물가에 나와 있던 것으로 봐서, 아마 우물에서 정화가 이루어지는 걸 느끼고 무슨 일인지 파악하러 나온 것 같았어요.”

“상황을 보려고 움직일 정도는 된다는 뜻이로군요.”

“감금되어 있는 건 바르셀다와 아페티트 뿐이고, 네나뷔스테는 본래 남쪽 구역 전체를 도맡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우물 뚜껑을 부수고 무언가를 떨어뜨려 공격하지 않고, 경계하기만 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우물을 정화한 것만으로 저주의 효력이 약해졌다는 뜻이에요.”

“아…….”

카이라트의 말에 사비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만약 우물을 기어오르는 중에 네나뷔스테가 뚜껑을 열고 무언가를 던지거나 공격해 왔다면, 사비나는 다시 물속에 빠져 버렸을 테니까.

조금 긴장했다가 다시 안도하는 사비나와는 달리, 카밀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사비나는 등을 돌리고 있어 모르는 모양이지만, 에르잔의 표정이 범상치 않았다.

지금 제 주군을 위험에 처하게 하려 했느냐는 듯이, 카이라트를 노려보는 눈빛이 흡사 칼날 같았다.

‘카이라트가 앞이 안 보여서 다행이야.’

저 눈빛을 자신에게 향했으면 카밀라는 놀라서 까무러쳤을 것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카밀라는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사비나의 호위기사를 자극했다간 큰일이 나겠다는 것도.

“네나뷔스테는 제가…… 로스카옌 신부님과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경계했는데, 제가 네나뷔스테의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달려들었거든요.”

“네나뷔스테는 로스카옌 신부님을 의심하고 있으니까요. 증오의 핵 때문에 남쪽 구역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제일 먼저 공격받는 건 로스카옌 신부님이었을 겁니다.”

아. 사비나는 가볍게 탄식했다.

숲으로 달아나 도망치던 사비나는 난생처음 걷는 장애물 많은 길에 익숙지 않아 걸음이 느렸다. 반대로 네나뷔스테는 숲길에 익숙하다는 듯이 곧바로 따라와 금방이라도 붙잡힐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녀의 기척이 뚝 끊겼다.

‘아페티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였지.’

남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경계. 네나뷔스테는 거기에 가로막혀 더는 사비나를 쫓아올 수 없었던 걸까.

“로스카옌 신부님도 외부인이라고 들었어요. 그분은 왜 혼자 이곳에 계시는 건가요?”

“로스카옌 신부님은 마을의 저주를 관리하는 분입니다. 네 어귀의 「핵」 중 하나라도 망가지면 그들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나머지 이들조차도 무사하지 못하니까요.”

이미 15년 전 쳐들어온 군인들에 의해, 그리고 완성된 저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어 버렸지만, 적어도 더 이상의 희생은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걸까.

만약 남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로스카옌이 사제로서 희생하고 있는 거라면, 저주에 익숙해 보였던 그 탁한 눈빛도 납득이 간다.

“잠깐만요, 카이라트. 그럼 제가 우물을 정화한 것이, 잘못하면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는 뜻 아니에요?”

“어? 그러네.”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이 카밀라가 대꾸하며 카이라트를 쳐다보았다.

“카이라트. 너 우리 마을의 생사를 걸고 실험을 한 거야?”

“그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사비나에게 부탁한 거야, 카밀라.”

네나뷔스테의 증오심이, 공격적인 성향이, 우물의 정화로 인해 일순간이지만 약해졌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품고 있는 「증오의 핵」의 힘이 일시적이지만 약해졌다는 뜻.

네 어귀의 핵은 서로 완벽한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라,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머지 셋도 무사하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비나. 검은색의 물감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사비나가 되물었다. 카이라트는 침대에서 벗어나, 천천히 벽을 짚고 일어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오랜 침대 생활을 한 탓에 다리에 힘이 없는지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 또 시작이네. 저놈의 현학적인 병.”

카밀라는 비틀거리는 카이라트를 부축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팔짱을 낀 채로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물감의 색을 만들려면 식물이나 광물에서 빛깔을 내는 염료를 추출해야 하지만, 검은색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색을 섞으면 만들어지거든요.”

빨간색, 녹색, 파란색, 보라색,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그리고 그 검은색은, 윤기 나는 새까만 색이 아니라 아주 혼탁한, 어지러운 검은색이 된다.

“사람을 저주해 죽이는 주술은 존재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주술은 존재하지 않지요.”

“카이라트. 저주의 주술에 대해 알고 있나요? 당신, 주술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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