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34화 (34/189)

34화

“카밀라가 도와줘야 할 건 다른 거예요.”

“응? 어떤 거?”

“음…….”

사비나는 창문 너머를 흘긋 보고는, 에르잔이 깨지 않도록 오두막에서 떨어졌다. 카밀라도 넘겨짚기가 심해서 그렇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서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멀어졌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빠져나오고 나서야, 사비나는 카밀라에게 물었다.

“이 마을의 남쪽과 북쪽에는 무엇이 있나요?”

“응?”

“동쪽에는 빈 첨탑이, 서쪽에는 교회가 있지만 집들은 거의 비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카밀라를 만나기 전까지, 이 마을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줄 알았어요.”

그 전에 카림과 나자예프를 만나기는 했지만, 설명을 듣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제외했다.

“동쪽엔 너희들 말고 아무도 없는 거 맞아. 서쪽엔 나랑 카이라트밖에 없고. 아, 교회에 로스카옌 신부님이 있긴 하지만.”

“북쪽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들었어요.”

마을 연못의 뼈들을 건져 내 장례를 치를 정도면 적어도 한두 명의 인원은 아닐 것이다.

카림은 북쪽을 가리켜 「체념한 이들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외부인의 출입을 거절한다는 것을 보면, 폐쇄적인 집단일 터였다.

“북쪽에는, 그게…….”

“북쪽은 비관자들의 영역이지. 나는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기가 빨려서 발도 들이지 않아.”

카밀라의 말을 자르며,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장신의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자예프!”

“안녕, 사비나. 오늘도 여전히 예쁘구나?”

“이런 미친. 나자예프, 저리 꺼져! 어디서 수작질이야?”

“왜, 네게도 인사해 주길 바랐어? 미안하지만 카밀라, 나는 원래 한 여자에게만 몰두하는 성격이라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질 않아.”

“헛소리 말고 사비나한테서 떨어져.”

인상을 쓰며 이를 가는 카밀라와는 달리, 나자예프는 넉살 좋게 웃으며 경계하지 말라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전날 에르잔에게 맞고 뻗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는 멀쩡해 보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니? 사비나. 난 네게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데. 아주 부드러운 일부터 격렬하고 뜨거운 일까지.”

“무시해, 사비나. 이 자식 성희롱 상습범이야.”

카밀라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진저리치며 사비나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사비나. 우리 마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카밀라보다는 내가 더 빠삭할걸?”

입가에 손가락을 댄 채 고개를 기울인 나자예프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여유로웠다.

이번에는 허세가 아닌 걸까?

사비나는 카밀라를 따라 자리를 피하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나자예프. 북쪽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

“말했잖니. 자포자기한 패배자들의 영역이라고. 뭐니 해도 「체념」의 핵이 깃든 곳이니까.”

“체념의 핵……?”

“무기력은 자살할 의욕도 빼앗아 가는 모양인지, 공교롭게도 생존자는 제일 많아. 어차피 숨만 쉬는 시체에 불과하지만.”

저주를 내려 사람들을 죽게 하고 이 마을의 시간을 멈춘 주술.

그 주술을 내린 자에게 반동이 오지 않도록 제물로 대신 내세운 네 개의 핵.

그 핵은 마을의 네 어귀에 하나씩 있다고 했다.

“북쪽에 체념의 핵을 지닌 사람이 갇혀 있다면, 나머지 세 곳에 갇힌 사람은 무슨 저주를 안고 있나요?”

“음, 사실 갇혀 있는 건 사내놈들뿐인데…… 우선, 동쪽 첨탑의 지하에 있는 내 동생, 바르셀다는 「분노」의 핵을 지니고 있어.”

분노의 핵이라.

그러고 보니 사비나를 처음 붙잡을 때, 용서하지 않겠다며 난폭하게 공격해 왔던 것을 기억한다. 지하라 어두운 데다 온몸에 털이 가득해 외모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노에 가득한 붉은 눈동자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서쪽에 봉인된 건 「욕망」의 핵인데…… 그쪽은 진짜로 미친놈이니까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고.”

“아페티트를 말하는 건가요?”

“……잠깐. 설마 벌써 만났어?”

내내 여유롭던 나자예프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비나를 바라보다가, 아쉽다는 듯이 작게 한탄했다.

“이럴 수가…… 사비나. 나는 그렇게 밀어내 놓고서, 아페티트한테는 벌써 허락한 거야?”

뭘 허락해 줬다는 걸까.

굳이 묻지 않아도 나자예프의 표정을 본 것만으로 알 것 같았다.

아페티트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냐고 묻는 거겠지.

‘키스, 는…… 하긴 했지만…….’

그건 키스가 아니었다.

집어삼킬 듯이 저주를 빨아들이는 끝없는 탐욕.

바르셀다의 저주가 사비나의 저주와 섞일 때 서로에게 타격을 주는 상반된 성질이라면, 아페티트는 그 반대였다.

그가 저주를 빨아들이자 몽롱한 기분이 들어,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으니까.

“어쩌지? 아페티트랑 비교되기는 싫은데…….”

“비교할 일도 생각도 없으니 이상한 상상은 그만두세요. 아무 일 없었으니까.”

“뭐? 그럴 리가. 그 만년 발정 상태인 난봉꾼이…….”

누가 누구더러 난봉꾼이라는 걸까.

아페티트의 험담을 늘어놓는 나자예프를 향한 사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밀라는 아예 관심을 끊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듯이 귀를 후비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무튼 서쪽에는 욕망의 핵이 있고, 남쪽에는요?”

“제일 무서운 곳이지. 증오의 핵을 품고 있거든. 절대로 가까워지지 않도록 조심해, 사비나.”

로스카옌 사제도 말했다. 남쪽은 네나뷔스테의 구역이니 가지 말라고.

우물에서 빠져나왔을 때 만난 네나뷔스테는 평범하게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다만 사비나와 로스카옌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갑자기 눈빛이 변하며 사람을 해치는 데 주저함이 사라졌을 뿐.

“그럼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증오심을 품고 있나요?”

“어차피 돌아다니는 건 핵 하나뿐이긴 한데, 장난이 아니야. 내가 들고 다니던 손도끼도 원래는 호신용이었다고.”

“호신용이요?”

“아무리 남자와 여자의 완력 차가 있다고는 해도 그건 정신이 정상일 때의 이야기지, 미친놈은 정상인보다 힘이 5배는 강하다는데, 네나뷔스테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나도 감당 못 해.”

“네나뷔스테가 증오의 핵을 품고 있다고요?”

동쪽의 바르셀다는 첨탑 지하에, 서쪽의 아페티트는 교회 뒤쪽의 창고에 갇혀 있었다.

첨탑 지하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 있었고, 아페티트는 창고 문이 열렸음에도 사비나를 따라 나오지 않고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안에 있었다.

마치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네나뷔스테는 마을 우물가에서 마주쳤다. 게다가 사비나가 숲으로 뛰어들어 가자 쫓아오지 않았던가.

“그럼 네나뷔스테는 다른 「핵」을 품은 이들과는 달리, 움직일 수 있는 건가요?”

“사비나. 네나뷔스테를 만났어?”

이번엔 옆에 있던 카밀라가 더 놀라서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세게 잡히자 사비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서가 아니라, 타인과 밀접하게 접촉할 경우 저주가 옮겨간다는 경험에 의한 습관적인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카밀라는 손을 세게 잡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얼른 놓아주었다.

다행히 카밀라에게 저주가 옮겨 가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사비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사비나. 안 다쳤어? 네나뷔스테는 위험해. 남쪽 구역엔 우리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고.”

“외부인만 경계하는 건 아닌가 보군요.”

“증오심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발달했다고 할까…… 마을의 남쪽 전체가 네나뷔스테의 구역이거든. 그 안에 발을 들이면 제 동생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지, 칼을 마구 휘두르며 쫓아와.”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걸까. 로스카옌은 저주의 핵을 품은 네 명의 제물에게 가족이 있다고 말했다.

바르셀다와 나자예프는 형제 관계고, 네나뷔스테에게는 동생들이 있다.

아페티트는 누구와 연고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북쪽에는 인구가 많다고 하니 아마 북쪽의 핵을 지닌 사람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제 빠진 우물이 남쪽 우물과 이어져 있었거든요. 빠져나오니 풍경이 달라서…… 그곳에서 마주쳤어요.”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네. 네나뷔스테는 나도 무서워서 남쪽으로는 발길을 돌릴 엄두를 못 내는데…….”

카밀라가 사비나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며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네나뷔스테의 칼에 베이긴 했지만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아페티트와 접촉하면서 나은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로스카옌 사제가 왜 남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네나뷔스테는 자신의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제 구역에 발을 들이는 모든 이에게 증오심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네나뷔스테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이상한 말?”

“로스카옌 신부님을 싫어하는 것 같았거든요.”

“네나뷔스테는 자기 동생들 말고는 다 싫어해. 나나 카이라트는 물론이고, 나자예프는 그림자만 보여도 식칼을 날려 버릴걸.”

“그게 아니라…… 로스카옌 신부님만, 나이를 두 배로 먹고 있다고.”

저주에 잠식되어 시간이 멈춘 마을. 카림은 어린아이의 몸으로 연못에 빠진 제 어미가 백골이 될 때까지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카밀라는 겉으로 보기에 사비나의 또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녀보다 한참 연상일 것이다.

시간이 멈춘 이 마을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런데 로스카옌 사제만이 나이를 두 배로 먹는다니, 그건 무슨 뜻일까.

카밀라는 사비나의 말에 조금 머뭇거리다가 뺨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야, 로스카옌은 외부인이니까.”

“네?”

“사비나, 너랑 에르잔도 외부인이잖아. 마을의 시간이 멈춰 있어도 여기서 계속 머물면 너랑 에르잔은 나이를 먹어. 우리랑은 달리.”

그럼 로스카옌에게는 시간을 멈추는 마을의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하지만 사비나는 로스카옌 사제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탁한 눈동자를 보고 그가 저주에 익숙한 인간임을 알아차렸다.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에르잔처럼 멀쩡할 것이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주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병에 걸리거나 죽게 되었을 텐데.

“그럼 로스카옌 신부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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