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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33화 (33/189)

33화

에르잔의 푸른 눈동자에 멀리 동터 오는 새벽의 푸른빛이 겹쳐졌다. 자신의 먹물에 잠긴 듯한 까만 눈동자에는 없는 맑은 빛. 사비나는 문득, 에르잔이 새벽빛과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연한 어둠에 잠긴 자신이 밤이라면, 에르잔은 동터오는 새벽의 하늘이다. 사람에게 빛을 전해 주는.

‘밤은 하루의 끝이고, 새벽은 하루의 시작이니까…… 틀린 말도 아니네.’

죽음의 저주를 휘감은 자신이 밤, 저주를 정화하는 금빛의 태양을 휘감은 에르잔이 새벽 아침.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 또한 비슷할지도 모른다.

새벽의 태양이 밤의 어둠을 거두어 가 버리는 것처럼.

언젠가 에르잔의 정화의 빛이 그녀 안의 어둠을 정화해 주지 않을까.

‘마을의 저주를 전부 흡수하면, 그래서 이곳이 평화로워지면…… 내 마지막을 에르잔에게 부탁하자.’

에르잔이 들었으면 피를 토하며 벌떡 일어날 법한 상상을 태연하게 하면서, 사비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잘 자요,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어서요. 피로가 누적되면 큰일이에요.”

“으음, 예. 그럼…… 조금만 자고 일어나겠습니다.”

에르잔은 여전히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결국 사비나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피로하지 않다고 버티던 것이 무색하게도, 에르잔은 금방 잠들어 버렸다.

‘역시 피로가 쌓여 있었을까.’

저주에 익숙한 사비나와는 달리 에르잔은 평범한 기사로 살아왔을 것이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 마을에 온 뒤로 에르잔이 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도리어 사비나의 옷가지며 먹을거리를 챙기느라 애쓰기만 했지.

‘호위기사인데…… 정작 「호위」라고 부를 만한 일은 하나도 시켜 주지를 못했네.’

차라리 사비나가 평범하게 산이나 계곡을 돌아다니고, 산짐승을 마주치거나 물에 빠지지 않도록 호위하는 일이었다면 훨씬 보람이 있었을 텐데.

지금 하는 일은 하인도 아니고, 가정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도 아니다.

물론 연인은 더더욱 아니다.

매일 사비나가 먹을 식사를 차려 주고, 입을 옷을 준비해 주고, 방을 청소하고, 산책할 때 동행하는 에르잔. 사비나는 기사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주군을 위협하는 것들을 검으로 물리치는 것이 기사의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저주를 정화하는 데 에르잔의 도움을 빌릴 수는 없다.

저주받은 마을. 저주에 잠식된 사람들.

저주와 결합한 대상까지 전부 황금빛으로 태워 버리는 에르잔에게 그들의 정화를 맡길 수는 없다.

저주의 흡수는 사비나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새로이 흡수한 저주를 사비나의 몸이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돕는 것이 에르잔의 역할이다.

‘돕는다고는 해도, 사실 정신 착란을 일으킬 만큼 성욕에 미친 여자에게 봉사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로 관계를 맺었던 첫 밤보다, 의식이 있는 상태로 관계를 가졌던 두 번째 밤이 더욱 부끄러웠다.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이상한 기분.

누군가와 몸을 맞대고 있는데 불쾌하지 않았던 것은 처음이었다.

저주의 화신인 자신이 가까워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제 몸을 쓰다듬어 주는 에르잔의 손길이 좋았다. 맞닿은 피부의 온기가, 맥동하는 심장의 고동이 생생하게 느껴질수록 야릇한 충만감이 일었다.

“미안해요, 에르잔.”

사비나는 잠든 에르잔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있기에 푸른 눈동자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편안하게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는 사비나도 부끄러워서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하니까.

‘에르잔. 속눈썹이 길구나…….’

워낙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남자다운 얼굴이라 인상이 강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면 콧날도 오뚝하고 이마도 반듯하다. 커다란 입은 다물고 있을 때는 다부져 보이지만, 그와 입술을 겹칠 때 느꼈던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뜨겁고 아릿한 감각을 사비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비나의 인생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는 생사조차 모르고, 아버지는 그녀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든 원망스러운 존재다.

제 몸에 닿은 인간들은 병에 걸리거나 살이 썩어 들어가 죽었다.

아버지 외에, 그녀에게 닿아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 몸이 닿았을 때, 불쾌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마을에 와서 사비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했다. 이름을 불러도 저주에 걸리지 않고, 손이 닿아도 살이 썩어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이곳에는 있다.

‘정말, 처음이야.’

저주에 잠식되어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저주를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그들 앞에서는 감히 내뱉지 못할 말이지만─ 솔직히, 기뻤다.

평범하게 말을 건네고, 평범하게 이름을 부르고, 평범하게 손을 잡는 일은 평생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비나에게 이 저주받은 마을은 오히려 축복과도 같았다.

연못을 정화해 죽은 이들의 뼈를 건져 내고, 저주의 피를 흘리는 카림을 진정시키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리를 저는 카밀라를 낫게 해 주었다.

그들에게는 저주로 인해 고통받은 15년의 세월이 무척이나 괴로웠을 텐데, 사비나는 저주로 고통받는 그들을 구하면서 보람을 느꼈다.

‘그 사람들은 무척 괴로워했을 텐데, 그걸 내가 구원받는 일에 이용하다니…….’

죽음의 화신으로 살아온 인간이란 어쩌면 이리도 염치를 모르는지.

사비나는 조금 우울해져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침대는 따스했다. 에르잔의 체취가 느껴진다. 사비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가 에르잔의 커다란 손등을 쓰다듬었다. 사실은 얼굴을 만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잠에서 깰 것 같았다.

‘나는 이 손으로 저주를 내뿜고, 흡수하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데…… 에르잔의 손은 정말 신기해.’

기사답게 커다랗고 투박하지만, 움직임은 의외로 섬세하다. 제 몸을 만질 때 상처가 나지 않도록 손에 힘을 빼고 움직이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요리 솜씨도 좋고, 처음 들어왔을 때는 폐가에 가까웠던 이 집을 살 만하게 바꿔 놓은 것을 보면 청소와 정리정돈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검술 실력이야, 모르긴 몰라도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을 정도니까 뛰어날 테고.

실제로 나자예프는 에르잔의 주먹 한 대에 뻗어 버리지 않았나.

‘에르잔이 내 호위를 맡지 않았더라면, 그 능력을 훨씬 더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저주가 통하지 않는 특수한 체질이라는 이유로 콘바야젠 백작은 에르잔을 황궁에서 치워 버렸다.

죽지 않는 사비나에게 호위를 붙여 보낼 이유가 없다. 호위는 핑계일 뿐,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데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남자가 주위에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진짜 이유겠지.

아무리 소속조차 배정받지 못한 말단 기사일지라도, 에르잔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처단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콘바야젠 백작에게, 저주로 제거할 수 없는 에르잔의 존재는 언제 어떤 위험요소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수였을 테니까.

결국 에르잔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다.

‘당신은 나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고 있는데, 나는 당신의 도움을 받는 지금이…… 좋아요.’

에르잔에게 혼자 떠나라고, 자신은 이 마을에서 저주를 흡수하고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잘난 척 지껄였지만, 사실은.

에르잔이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 줘서 좋았다.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지지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나는 왜 항상, 누군가의 불편과 고통을 전제로만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걸까.’

기사로서 무투를 자랑할 수도, 공훈을 세울 수도 없는 일에 끌어들였음에도 에르잔은 사비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맙고, 또 미안했다.

사비나는 말로 내뱉지 못할 사과와 감사의 말을 속으로 삼키며 에르잔의 손바닥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때였다.

“어머나……!”

창 너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 화들짝 놀란 사비나가 상체를 일으키자, 놀란 얼굴의 카밀라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우물에 빠진 사비나가 사라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고 그랬지. 카이라트에게 대강 사정 설명은 하고 돌아왔지만, 카밀라로서는 걱정이 되어 상태를 보러 왔을 것이다.

“카밀라. 저기…….”

“아니, 아니야. 난 그냥 갈게. 하던 거 계속해.”

침대에 누워 잠든 에르잔과, 침대에 기대어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사비나. 창 너머에서 보더라도 오해를 살 만한 광경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오해였다.

그것도 에르잔에게 무척 실례인.

“기다려요, 카밀라. 오해예요.”

“으응, 알았어. 알았으니까 괜찮아.”

“……괜찮지 않다니까요.”

조금 울컥해서, 사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왔다. 카밀라는 사비나의 상태가 멀쩡한 것에 한결 안도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카밀라.”

“뭐, 뭐 어때서 그래? 젊은 남녀가 한집에서 살다 보면 정분이 날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이런 외지에서 의지할 데도 없이 둘이 붙어 있다 보면…….”

“아뇨. 정말 오해예요. 에르잔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에르잔이 깨지 않도록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제법 단호함이 깃든 음성에 카밀라는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왼쪽 위를 향했다가 다시 오른쪽 아래로 향하는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카밀라는 눈알만 굴려 사비나와 창 너머로 보이는 잠든 에르잔을 번갈아 보고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짝사랑이야? 도와줄까?”

카밀라의 녹색 눈동자가 가늘게 기울었다. 저주로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다리를 절고 얼굴 한쪽이 일그러져 늘 고통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카밀라의 표정은 생기가 넘쳤다.

생각해 보면 처음 사비나가 입을 옷을 빌려준 것도 카밀라였다. 에르잔과 사비나의 뒤를 쫓아오면서도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던 것도 그렇고, 원래는 호기심도 많고 정도 많은 사람일 것이다.

진짜 ‘카밀라’는 이렇게 밝은 사람이었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해받는 데도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카밀라가 도와줘야 할 건 다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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