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기절한 카밀라가 깨어나지 않은 까닭에 카이라트에게 무사하다는 인사만을 건네고 오두막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침실에 들었다.
에르잔은 침대를 정리할 동안, 사비나는 탈의를 위해 만들어 둔 간이 천막에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괜찮을 것 같네.’
흡수한 저주의 양이 많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아페티트라는 남자를 만나 저주를 빼앗긴 탓일까. 야릇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 밤은 에르잔과 몸을 겹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남자는 대체 뭐였을까.’
아페티트라는 남자는 자신을, 사비나와 같은 저주의 화신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남자가 교회 뒤편의 창고에 갇혀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문은 잠겨 있지 않았으니 엄밀히 말해서 갇혀 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페티트 자신은 ‘갇혀 있었다’고 표현했다.
‘따라나오지 않았던 걸 보면…… 아페티트는 그 창고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동쪽 첨탑의 지하에도 출입금지 팻말만 걸려 있을 뿐, 아예 막아 둔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 바르셀다라는 남자도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지하에서 괴로워하기만 할뿐 그 장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저주의 핵은, 반동을 받는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
동쪽 첨탑의 지하에는 바르셀다.
서쪽 교회의 뒤쪽 창고에는 아페티트.
남쪽과 북쪽에 있는 저주의 핵은 누구일까.
네나뷔스테는 누구를 지키기 위해 사비나에게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을까.
그리고 마을의 네 방위에 저주의 핵을 심어, 이 마을의 시간을 멈추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버지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내 저주의 능력을 사용해야 했지만…….’
이런 작은 산골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 저주의 주술을 완성하고, 마을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비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주술사는 미래를 읽는 자로, 각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가문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존재다. 그러나 콘바야젠 가문에는 본래 주술사가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는 꼭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은 콘바야젠 가문을 업신여겼지.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을 거란다. 사비나, 네가 있으니까.」
「나는 주술사가 아니에요. 미래 같은 건 알지 못해요.」
「아니야, 사비나. 너는 아주 훌륭한 주술사가 될 거란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기억 속 아버지의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 붉게 빛났다.
* * *
“……아!”
오싹한 느낌과 함께 사비나는 잠에서 깼다.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그녀가 잠든 뒤에도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는지, 침대 옆에서 에르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은 어두웠으나 어둠에 익숙한 사비나에게는 에르잔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걱정이 많은 그를 안심시키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에르잔은 조금도 안심되지 않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아 주었다.
‘시원해…….’
자신의 몸이 뜨거웠던 걸까, 아니면 에르잔의 손이 차가웠던 걸까. 커다랗고 시원하게 이마를 짚어 주자 사비나는 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가씨, 악몽이라도 꾸신 겁니까?”
“아뇨,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에르잔.”
에르잔 덕분에 괜찮아졌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에르잔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상처가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늘 괜찮다고만 말씀하시는군요.”
에르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비나는 조금 당황했다.
검이나 창 같은 날붙이와는 달리, 손톱에 긁힌 상처는 피부가 베인 자리가 깔끔하지 않다. 그래서 치료하는 것도 힘들고 아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통증 때문에 고열이 나고 상처 부위에 세균이 번식해 상태가 악화될지도 모르지만, 사비나는 저주의 주술에 잠식된 몸이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갔고, 아마 내일쯤이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았다.
‘아픈 것은 익숙한걸. 못 견딜 정도로 괴로운 것도 아니고.’
굳이 비교하자면 이 마을 사람들이 훨씬 더 괴롭고, 이렇게 자신을 지키느라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그녀를 염려하는 에르잔 쪽이 훨씬 피곤할 것이다.
저주의 화신인 자신과는 달리 이 마을 사람들은 엄연히 평범한 인간인 상태로 저주의 주술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고통이 어떠할지 사비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이들에 비한다면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고, 저주의 주술에 잠식당해서 이성을 유지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은 실로 가벼운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자신이 괴로움을 호소해 봐야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사비나는 조금 더 얼굴 근육에 힘을 주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확실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 주기 위해서.
“……후우.”
하지만 어째서일까. 사비나가 좀 더 태연하게, 좀 더 명랑하게 ‘괜찮은 모습’을 어필할수록, 에르잔의 표정은 어두워지기만 했다.
꼭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일자로 굳게 다물기를 반복한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그 입을 열게 할 용기가 사비나에게는 없었다.
‘내게 하지 못할 말을 품고 있는지도 몰라. 그걸 억지로 말하게 할 수는 없어.’
자라면서 평범하게 사람을 마주한 경험이 적은 사비나에게 인간관계란 막연한 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혹시 실수한 걸까.’
어쩌면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어색하게만 보일는지도 모른다. 호위기사인 에르잔의 입장에서는 사비나가 하는 행동이 이상하다고 한들 제대로 지적할 수도 없으니, 억지로 입을 열게 했다간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실토하고도 그녀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생각해 자책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것은 묻지 않는 편이 에르잔을 위해 좋겠지.’
사비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르는 것은 묻고, 의심 가는 것도 물어보며, 넘겨짚거나 오해하지 말고 소통하는 편이 관계를 이어 나가고 거리를 좁혀 나가는 일에 좋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으므로.
사비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멀리 어슴푸레하게 푸른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동이 터오네요.”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습니다, 아가씨. 좀 더 주무시지요.”
“저는 잠이 다 깼어요.”
본래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도 할 일이 없어 누워 있다 보니 쿨쿨 잠을 자게 되었을 뿐, 본래 사비나는 잠이 많은 체질은 아니었다.
“에르잔, 당신이 누워요.”
“예?”
“저를 지키느라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잖아요? 누우세요.”
“아닙니다, 사비나 아가씨. 아가씨를 두고 제가 어찌 잠을 자겠습니까.”
“그렇게 자꾸 밤을 새우면 몸에 좋지 않아요. 피로가 누적된다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비나는 아까 전 에르잔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늘 괜찮다고만 말하는 건 어느 쪽이야?’
사비나가 권유해도 에르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에르잔. 저는 지금 명령하는 건데요?”
“사비나 아가씨. 주군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기사의 덕목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군의 안위를 지키고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주군을 호위하는 임무를 버려두고 태만하게 잠자리에 들라는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직하기만 한 호위기사의 대답에 사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에르잔의 몸은 강철로 되어 있나요?”
“……예?”
“잠을 자지 않으면 피로가 쌓이고, 피로가 쌓이면 움직임이 둔해져요.”
“송구합니다만 아가씨,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며칠 밤을 지새우는 것 정도는…….”
“당신 자신은 괜찮다고 할지 몰라도, 에르잔이 인간인 이상 소모하는 체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티가 나게 돼요. 만약 내일 또 누군가가 이곳에 쳐들어와 저를 공격하거나 했을 때, 당신이 피곤해서 막아 내는 게 늦어진다면요?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는 아주 약간의 틈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어요.”
악몽을 꾸긴 했어도 잠을 자고 일어났기 때문일까, 명쾌해진 머리로 다다다다 쏘아붙이자, 에르잔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르잔의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내 안위에도 문제가 생기잖아요. 아닌가요?”
“아니…… 마, 맞습니다.”
“그럼 지금 조금이라도 자 둬야 하겠죠?”
“하지만 사비나 아가씨를 혼자 두고 잠들 수는…….”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될 거예요.”
“나가시면 안 됩니다.”
사비나가 혼자서 외출한다는 소리에 에르잔이 난색을 표했다. 호위기사로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라는 걸까.
사비나는 창문 너머로 고요한 마을의 풍경을 확인했다. 이 마을이 위험하다고는 하나 사비나가 저주의 화신인 이상 그들도 일부러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고 있다고는 한들 에르잔처럼 기척에 예민한 기사를 함부로 습격할 만큼 마을 사람들은 담대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같이 잘까요?”
“아, 아가씨?”
모포를 걷어 보이며 손짓하자, 에르잔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아차.’
에르잔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사비나는 제가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저주를 잠재우기 위해 몸을 섞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유혹하는 듯한 말을 해 버린 걸까.
‘나를 혼자 두면 불안하다기에 함께 자자고 했을 뿐인데.’
연인 사이도 부부 사이도 아닌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서 잠드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사비나의 짧은 상식으로도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짐작은 딱 거기서 끝났다. 젊은 남성이 매혹적인 여성과 한 침대에서 잠들 때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는 점까지는 자각하지 못했다.
사비나는 살짝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와,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에르잔. 침대에 누우세요.”
“저, 사비나 아가씨.”
“누우세요. 명령이에요.”
사비나가 재촉하자 에르잔은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몸에 모포를 덮어 주고, 방금까지 에르잔이 앉아 있던 자리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역할 교대예요. 이번엔 내가 이곳에 앉아 있을게요.”
“사비나 아가씨께서요? 안 됩니다. 아가씨를 그런 바닥에 앉게 할 수는…….”
짚더미도 깔려 있고 양털로 만든 방석까지 있으니 바닥이 아닌데도, 늘 불면 날아갈까 눈비에 젖을까 노심초사하며 사비나를 지켜 오던 에르잔은, 그녀가 앉도록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만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가 이곳에 앉는 게 싫으면, 당신 옆에 누울까요?”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렇게 묻자 에르잔의 얼굴이 더 이상 붉을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분명 체격이 그녀의 두 배는 됨직한 장신의 남자면서도, 이럴 때는 영락없는 소년의 표정을 짓는다. 그 기묘한 간극을 접할 때마다 사비나는 묘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역시 연하라서……일까?’